이미행복벗, 안녕. 하하몬이야.
오래 전 군대에서 이등병일 때 선임병이 자꾸 내 가슴을 만지는 거야.
“아버지가 아들 가슴 좀 만져보자”며.
지금 생각하면 강제추행이지.
때리지도, 겁주지도 않았지만 내가 뜻과 상관없이 신체를 만졌으니.
얼마 전 나온 대법원 판결을 보며 군대 시절이 떠올랐어.
대법원이 강제추행죄의 기준을 바꾸는 판단을 내놨거든.
무려 40년 만에. 앞으로 가해자가 어느 정도 폭행이나 협박을 한 뒤 추행했다면, 강제추행죄를 묻겠단 거야.
지금까지는 가해자가 강한 폭행이나 협박을 해야만 처벌받았거든.
피해자가 죽기 살기로 저항해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젠 내가 군대에서 겪은 일도 법적으로 강제추행이란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거지.
지금까진 내 주장에 불과했지만. 처음엔 기분이 좋더라고.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고.
근데 알면 알수록 아쉬운 거야.
피해자가 폭행과 협박으로 공포심을 느꼈는지는 진술해야 하니까. 폭행과 협박이 없는 추행이 많기도 하고.
왜 대법원은 계속 강제추행죄를 복잡하게 따지려는 걸까?
그냥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동에 동의했는지, 안 했는지로 간단히
판단하면 안 되는 걸까?
이번 주엔 휘클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 때론 시원했다가, 때론 화도 나겠지만 끝까지 함께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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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반 발짝 나아간 대법원
40년 만에 바뀌긴 했는데
- 2014년 8월15일, ㄱ씨가 15살인 사촌 여동생을 침대에 쓰러뜨린 뒤 몸을 눌렀어.
그리곤 “만져줄 수 있느냐?
” “가슴을 만져도 되느냐”며 몸을 더듬었어.
ㄱ씨는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어.
1심 강제추행죄 유죄, 2심 무죄가 나왔고. - 사건 발생 9년 만인 지난 9월21일,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원심(2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어.
강제추행죄 유죄이니, 다시 판결하란 뜻이야.
대법원은 “피해자가저항하기곤란한정도의폭행과협박이아니라도가해자가 물리적인 힘을 가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한 뒤 추행을 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어. - 큰 변화야.
대법원이 40년 만에 강제추행죄 판단 기준을 새로 만든 거거든.
형법298조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만 돼 있어.
얼마나 강하게 폭행, 협박해야 강제추행죄가 된다곤 안 돼 있지. - 그래서 지금까지 대법원은판례로 기준을 세워놨었어.
‘피해자의 저항이 곤란할 정도’로 폭행하거나 협박한 뒤 추행해야 강제추행죄를 인정할 수 있다고.
근데, 이번에 대법원이 이걸 바꾼 거지.
‘죽기살기로 저항했냐’곤 안 묻겠다
- 뭐가 달라진 걸까. 앞으로도 가해자가 피해자를 추행할 때 폭행이나 협박했는지를 따지긴 하겠지만, 예전보단 덜 따지겠단 거야.
아예 안 보겠단 건 아니고. - 미성년자인 15살이 사촌오빠에게 추행을 당했는데, 법원이 9년간 피해자에게 이걸 따져물었어.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저항했니?
’ ‘끝까지 버텼다면 추행을 안 당하지 않았을까?
’라고.
결국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웠는지’를 끊임없이 물은 거야.
지속적인 2차 가해지. -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야.
피고인이 술에 취해 피해자의 가슴을 만지려고 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구호요청이 가능했음에도 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기도 했거든.
더 저항했어야 한단 뜻. - 대법원이 기준을 바꿨으니, 앞으론 좀 달라질 거야.
죽기 직전까지 저항했단 걸 피해자가 입증하지 않아된단 거니까. 가해자가 폭행이나 협박을 한 뒤 추행했다면 유죄를 선고하겠단 거거든.
처벌받는 가해자가 좀 늘어나겠지.
1·2심 판사들이 요구한 것
- 대법원이 변한 이유가 있어.
대법원의 기준을 안 따르는 1심, 2심 판결들이 자꾸만 나왔거든.
예를 들어 ‘혼인 외 성관계를 폭로하겠다면서 추행’한 가해자도 강제추행죄로 처벌받았어.
예전이었다면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며 무죄 판결이 내려졌을 거야.
‘회사 사장과 친분이 있다며강제로 러브샷’을 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 역시. -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하잖아.
이런 판결을 통해 일부 판사들이 대법원에 생각을 좀 바꾸라고 요구한 거야.
더는 성폭력 범죄피해자에게‘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단 뜻으로. 그래서 대법원도 고민 끝에 기준을 바꾸기로 한 거야.
때린 뒤 추행은 2.7%뿐
- 강제추행죄는 사람의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거든.
그 목적을 고려하면 이번 대법원 판단에도 한계는 있어. -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을 당했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폭행이나 협박을 했는지는 따져보겠단 거거든.
피해자에게 저항했는지는 안 물어보겠지만. 여전히 성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지킬 순 없는 상황인 거지. - 현실에선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이 더 흔하잖아.
지난 6월 여성가족부가 내놓은‘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 따르면, ‘가해자의 속임수’로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는 응답이 34.9%로 가장 많아.
추행 피해 당시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여성은 각각 2.7%, 7.1%였고.
새로 바뀐 기준으로도 처벌 공백이 너무 큰 거야.
피해자 저항 대신 ‘동의’로
-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사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해. 상대방의 행동에 내가 동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가해자가 내 가슴을 만졌을 때 내가 동의를 안 했으면 강제추행인 거지.
내가 저항했는지와 상관없이. - 하지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이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혔어.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강제추행죄를 판단하진 않겠단 거야. - 다만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강조한 소수의견이 처음으로 나왔어.
노정희 대법관 주장이야.
“세계 주요국은피해자‘저항’을요구하던데에서피해자의‘동의부재(결여)’를파악하는것으로변하고 있다.”
‘비동의
강간죄’ 거부하는 정부
- 지금까지
강간죄를 처벌해온 논리도 강제추행죄와 똑같아.
강간을 당할 때 피해자가 저항이 곤란할 정도로 가해자가 강한 폭행이나 협박이 있는지 따지고 있거든.
강제추행죄보다 더 엄격하게 들여다보지.
피해자에 더 강한 저항을 요구하는 거야.
가해자가 받을 처벌이 더 무겁다는 이유로. - 이번 대법원 판결로
강간죄 판결 기준까지 바뀌는 건 아냐. 그건 별로도 판단해야 해. 같은 대법관들이 판단한다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단정할 순 없어. - 강제추행죄와 마찬가지로
강간죄도 피해자가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동의했는지로 유·무죄를 따져야 한단 주장이 있어.
특히 여성계 목소리가 커. 가해자가 폭행·협박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단 건 아냐. 폭행·협박을 하며
강간했다면, 죄를 더 엄하게 물어야 한단 거지. - 대법원의 판단도 판단이지만, 정부의 입장도 중요해. 형법에 강제주행이나
강간죄를 처벌하는 근거로 ‘피해자 동의’를 명시하는 게 가장 깔끔하니까. 근데, 국회에서 법을 개정하려면 여당이 나서야 하잖아.
그걸 움직이는 건 정부고. - 정부는 반대하고 있어.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거든.
지난 1월에 여가부는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겠다고 했다가 법무부 반대로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해버렸지.
대법원이 반 발짝 앞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갈 길이 멀지?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졌고 뭐가 달라져야 하는지 알아보자.
대법원
한 번 물어봤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취재한 법조팀 오연서 요원에게 물어봤어.
휘클리: 이번 판결 어떻게 봤어?
연서 요원:사법부는 성범죄를 엄벌하겠단 걸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여준 거라고 받아들였어.
40년 만이긴 하지만.
휘클리: 형법에서 ‘정조’란 말이 사라진 지 30년 가까이 됐잖아.
근데 왜 아직도 법관들은 피해자의 정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연서 요원:법원 출입 기자인 나도 낯설더라고.
사법부가 사회적 인식을 뒤늦게 쫓아가는 건 맞아.
법적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이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는 법원 안팎에선 언젠가는 강제추행죄나
강간죄에 대해선 대법원이 정리를 하겠구나 하는 분위기는 있었어.
휘클리: 예를 들면?
연서 요원:예전 같으면 무죄가 나왔을 사건에 유죄가 나오기 시작했거든.
이번 대법원 판례도 원래 1심에선 유죄였잖아.
2심은 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었다며 가해자에 무죄를 내렸고.
대법원 입장에선 이렇게 판단이 갈리는 사건들이 쌓이게 되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
휘클리: 앞으로 추행하기 전에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는지를 따지긴 해야 하잖아.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이 어느 정도여야 해?
연서 요원:글쎄. 강제추행죄에서의 협박이 성립하려면 피해자가공포를 느꼈느냐가 중요해졌지.
이 역시 저항이 곤란했는지를 따지는 것 못지않게 추상적이고.
다만 법원은 협박죄에 대한 판례가 축적돼 있어 혼란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아.
휘클리: 공포심이 들었단 걸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잖아.
그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당할 거 같은데?
연서 요원:그런 우려는 가능해. 근데 죄를 따질때 피해자를 완전히 빼고 재판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해. 분명한 건저항이 곤란한 상황이었단 걸 입증하는 거랑 내가 공포감을 느꼈다는 걸 입증하는 거랑은 확실히달라.
휘클리: 노정희 대법관이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로 죄를 묻자는 의견을 냈잖아.
이 주장은 그냥 묻히는 건가?
연서 요원:법원은 그 문제는 자신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아.
휘클리: 그럼 누구의 일이란 건데?
연서 요원:지금 형법 조항엔 폭행·협박만 있으니까 재판은 그 범위에서 해야하고,동의를 따지는 건 국회가 법 조항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대법원이 비동의 추행죄는 이번 판결의 쟁점이 아니라고 직접 밝힌 거고.
휘클리: 판사들이 재판할 땐 어때?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요하게 안 봐?
연서 요원:법원에선 동의를 좀 더 넓게 보고 있긴 해. 예를 들어 미성년자가 성매매에 동의를 하고 남성을 만나고 돈까지 받았어.
1심과 달리 2심에선 동의 하에 이뤄진 일이니 강제추행이 아니라고 보고무죄
판결을 했지.
근데 오히려 대법원은 성매매를 위해 동의를 했더라도 이를 번복할 자유가 있다고 봤어.
휘클리: 왜?
연서 요원:학대와 같은 행위를 동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지.
그리곤 피해자가 동의를 안 했다며 유죄를 인정했어.
성적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
휘클리: 처벌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거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어.
연서 요원:대법원이 갑작스럽게 죄의 범위를 넓힌 건 아니야.
재판 실무에서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거지.
휘클리: 그런 의견을 이번에 5명의 대법관이 이야기 했더라고.
신체접촉 부위를 보고 강제추행죄를 판단해야 한다고.
미국은 성기, 사타구니, 유방 등을 성적 신체접촉 대상이라 보고 있다며.
연서 요원:그 주장은정조 관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옛날 논리야.
그리고 접촉 부위를 얘기할 땐 흔히 어깨를 예로 많이 들잖아.
근데, 직장 상사가 어깨를 주무른 경우 강제추행을 인정한 판례가 있을 만큼 신체접촉에 대해선 이미 판례가 정립돼 있어.
신체를 접촉하지 않아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하기도
하고.
예를 들어 성기만 보여줬어도 죄가 되거든.
휘클리: 피해자에 저항의 책임을 묻는 건
강간죄도 마찬가자잖아.
강간죄도 이 저항 곤란을 따지던 관례가 없어진 거야?
연서 요원:그건 별개야.
그건 또 그것대로 기다려야 하겠지.
휘클리: 언제까지?
연서 요원:기다려 보자고.
하급심은 예전엔 피해자 어깨나 몸을 누르는 정도로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어.
근데 요즘엔 이 경우도 저항이 현저하게 곤란한 정도로 판단하고 있어.
강간죄를 더 엄하게 처벌하는 분위기지.
결국 바뀌지 않을까. 시간은 걸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