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타운 갔던 ‘초보 노인’이 2년만에 도시로 빠져나온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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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탐나는 책

"남의 책이 더 커 보인다.
" 눈 밝은 출판사 편집자들이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혼자 읽기 아까운 책들을 추천합니다.

정소연

금융사에서 일하다가 늦깎이 책 편집자. 현 세종서적 편집주간.

실버타운 갔던 ‘초보 노인’이 2년만에 도시로 빠져나온 까닭

 

[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초보 노인입니다』, 김순옥 지음, 민음사, 2023

한국 중년의 미래 설계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독거 야생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자연인파와 삼시세끼 밥 나오는 실버타운파다.
‘파’는 조직폭력 세계 외엔 요즘 잘 안 쓰는 듯한데 카르텔로 바꿔도 상관없다.
이 분석은 철저히 나의 주관성에 기초하지만, 대체로 남자는 산이나 시골 폐가에서 물고기 잡고 버섯 캐서 살겠다는 자연인파가 많고, 여자는 혼자 살든 둘이 살든 밥 짓기에서 해방되는 실버타운을 선호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미래 설계라기보다 마음 속 깊이 희망하는 꿈에 가까운 것이다.
천국, 낙원이 종교적인 개념어라면, 그것을 한 문장으로 바꾸면 “나 시골 가서 전원생활 할래.” “밥 주고 청소 해주는 실버 아파트에 갈래.”가 되겠다.

The Cabin at Saint-Adresse, 클로드 모네, 1867 (출처: 위키아트)

『초보 노인입니다』의 저자는 교직 생활을 은퇴하며, 삼시세끼 밥을 제공하는 구내식당이 있고 집값도 적절해 보이는 실버 아파트를 큰 고민 없이 매입한다.
예순다섯이지만 버스에서 누가 자리를 비켜주면 민망해서 화를 불쑥 낼 정도로 아직은 노인으로 살아갈 마음의 준비는 안 되어 있었다.

“아유, 한창인데 여길 빨리 들어오셨네. 이제 60이나 되셨나?”

자세가 상당히 곧고 옅은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는 8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펌을 한 은갈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밝은 핑크빛의 두피가 살짝살짝 드러났다.

실버 아파트이니 당연히 앞집, 옆집, 뒷집도 모두 일흔, 여든 넘은 노인들이 산다.
자칭 ‘초보 노인’인 저자는 드디어 삼시세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평소 느슨한 타입의 남편을 뒤치다꺼리 할 일도 사라졌다.
기쁘기만 해야 할 텐데, 어째 기분이 개운치 않다.
이웃들이 자신의 일이십년 뒤 쇠약해진 자화상이라 해야 할까, 기력이 쇠한 노인들 속에 영 어울리지 못하는 예민한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한다.

물론 거기서도 입구 앞 화단을 가꾸며 즐거워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 김순옥 님은 솔직하게 토로한다.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가고, 내 노동을 쏟을 일이란 없고, 하루하루가 너무 고요한 그곳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다고. 결국 2년 남짓에 조금 손해를 보고 실버 아파트를 처분한 뒤 친구들이 있는 복잡한 도시로 나왔다.

출처: 『초보 노인입니다』 표지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대부분 본업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정년퇴직 후 제2의 직업을 준비하는 분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물론 나 역시 사십대 후반의 편집자에 언제고 일을 놓아도 별로 이상할 일이 없을 나이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어린 편에 속한다는 게 요즘 직장 현실에서 기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는데, 한편으로는 정년까지 일을 잘 마치신 그분들의 여유가 부럽기도 하면서도, 영 섞어들어지지 않았다.

무엇이었을까? 다 때가 있는 걸까? 내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건강한 컨디션을 위한 하루 30분 홈트’도 전혀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몇 달 전 다시 시작해 너무 즐기며 해오던 수영도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 쇠약해져 누가 차려주는 밥의 효용이 독립적인 삶의 가치보다 크게 느껴질 때도 찾아오겠지만, 그전까지는 번거롭고 복잡하고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조금 피로하고 남들과 얽힌 삶이 그럭저럭 지낼 만한 건지 모른다.

“자연인 될래.” “실버 아파트 간다.
” 주위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나 지금 힘들어” “숨고 싶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일. 섣불리 실행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인 옆집 고양이들처럼 살아보자. 밥을 챙겨주지 않고 예뻐해 주고 가끔 간식만 주면 된다.
어느 날, 초코와 늘 함께 놀던 우유가 혼자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옆집 사람인 나와 잘도 논다.
“우유야, 초코 어디 갔어?” 그제야 초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집 곳곳을 뛰어다니는 우유. 그렇게 우리 인간들도 고양이처럼 너무 앞서가며 먼 미래를 생각하진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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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인물 열전

뮤지컬에는 관객의 마음을 열고 공연에 집중시키는 인물들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뮤지컬의 ‘그’ 인물을 다룬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뮤지컬 작품과 관객의 중간쯤에 서 있다.

달에 가는 게 꿈이었던 늙은 아내에게 '우주 연구원 옷' 지어준 남편

렛미플라이 무대 / 사진출처 = 프로스랩

누구에게든 ‘선택’의 순간은 어렵고 두렵다.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까봐, 이후의 삶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를까봐 무섭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내가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다.
선택의 결과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져 후회와 회한의 삶을 살게 될까봐, 그런 자신을 마주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를 구한다.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혹시 모를 후회와 회한에 빠지지 않을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지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지혜는 수행된 것에 대한 사후적 해석을 통해 비로소 하나씩 쌓여 간다.
헤겔의 이야기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이 저물어야 날아오를 뿐이다.
그런데 여기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선희다.
선희는 백발로 뒤덮인 머리카락에 연약한 체구를 지닌 70대 할머니다.
선희는 갑자기 기억을 잃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남원과 함께 살고 있다.
멀쩡한 선희는 동갑내기 남원과의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지만 남원은 그렇지 못하다.
남원의 기억은 열아홉 살에 멈춰져 있어 늙어버린 자기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선희는 이런 남원을 위해 의사를 물색하고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하지만 남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19세의 정분만 찾는다.
그녀의 노년은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렛미플라이 무대 / 사진출처 = 프로스랩

하지만 선희는 슬퍼하지도, 낙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원의 기억이 19살, 그 중요한 ‘선택’을 했던 시기에 멈춰져 있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때 꿈을 꾸었다.
남원은 서울에 가서 의상디자이너로 성공하기를, 선희 그러니까 정분은 나사에 들어가 달에 가기를 꿈꿨다.

정분은 1969년 한국의 시골에서 포부가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원에게 언제나 생각하는 걸 믿으라고, 불가능한 건 없다고 외쳤다.
정분은 중고 라디오를 고쳐 공중에서 전파를 잡아 틀 줄 알았다.
그리고 아폴로 11호 발사 기념 연설을 들으며 “We choose to go to the moon(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이라는 문장을 마음 깊이 새겼다.
남원은 유명한 의상디자이너가 되어 정분의 꿈을 이뤄 주리라 다짐했다.
이들은 가난했지만 찬란했고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선희는 남원이 왜 ‘그 이후’를 기억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먼저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은 남원이었다.
그는 국제복장학원에서 기다리던 합격 통지서를 받아 서울로 날아가기만 하면 됐었다.
정분 역시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정분은 때맞춰 아픈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고, 남원은 이런 정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들의 이 ‘선택’은 이후의 삶을 꿈과 멀어지게 만든다.
둘은 결혼했으나 남원은 동네 수선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선희는 달 탐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창고에 쳐 박아둔 ‘현실적인’ 할머니가 되었다.
선희는 남원의 바늘이 이들의 현실과 사랑을 지켜낸 ‘검’이라 믿고 평범해졌지만, 남원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선희는 남원에게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그 때’의 기억을 좌충우돌 꺼내놓는 것을 크게 말리지 않는다.
남원은 망원경을 가져오고 그 중고 라디오도 찾아온다.
그리고 정분이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나사 티셔츠도 찾는다.
마지막으로 남원은 선희를 모델로 삼아 하얀 날개처럼 생긴 나사 연구원 복장을 만든다.
이 순간 남원의 꿈은 자신의 옷을 입은 선희에게 흔적처럼 남는다.
그렇게 남원은 기억을 전부 찾는다.
이들이 50년 동안 함께 찍은 사진들과 선희 집에 스며들어 있었던 정분이의 자취들은 끊어진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렛미플라이 무대 / 사진출처 = 프로스랩

그런데 복원되는 것은 남원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선희 역시 꿈을 꿀 수 있었던 ‘자신’을 기억해낸다.
사실 선희에게 그 기억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선희가 ‘그 때’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었던 건 다소 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사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남원에 대한 미안함을 잊지 않고, 평범하지 않아 힘들었던 자신의 꿈을 잊는 것이 선희가 내린 ‘그 다음’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계는 과거의 선택과 현재의 결과가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완성을 향해 간다.
그들의 행성은 궤도를 돌며 빛을 발한다.
비로소 선희는 언제나 좋은 일 기쁜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 자신을 선희로 호명하던 정분이가 되어, 남원과 함께 달에 간다.
뮤지컬 <렛미플라이>는 가장 찬란했던 시절 가장 어려운 선택을 했던 희와 남원이 한결같이 살아온 모습 안에 지혜를 담는다.
그 지혜는 소박하지만 한결같이 지켜진 것이기에 쉽지 않고, 평범한 것이기에 더욱 어렵다.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함께’ 불을 밝히는 그들이 참 아름다운 이유다.

렛미플라이 무대 / 사진출처 = 프로스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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