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영남루를 휘감고 의열은 강물처럼 흐르네, 밀양

 

아리랑은 영남루를 휘감고 의열은 강물처럼 흐르네,
밀양

[마음속에 담아둔 절]



밀양 만어사 만어석(萬魚石) 너덜지대

사명대사,
사명대사여!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경쾌하고 빠른 <밀양아리랑>의 첫대목이다.
밀양 땅에 들어서면 노랫말처럼 외치지 않아도 우리가 자연히 알게 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사명대사(1544~1610)다.
임진왜란 당시 불경을 덮고 칼을 잡고 일어서 나라와 백성을 구한 승군 대장이다.

사명대사는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던 중 부모가 연이어 죽자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해 신묵화상의 제자가 됐다.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뒷날 법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四溟堂)이라 했지만 세간에서는 존경의 의미로 사명대사라 부르게 됐다.



표충비각,
사진 문화재청



표충비,
사진 문화재청

땀 흘리는 표충비

완주 송광사에 땀 흘리는 부처님이 있다면 밀양에는 땀 흘리는 비석이 있다.
바로 사명대사의 표충비(表忠碑)다.
그것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어린 이적이라고 하는데 한편에선 결로 현상이라고 한다.
과학적으로 결론이 난 것도 아니니 더욱 신비하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지 8년 후인 1618년 사명대사 문도들의 요청에 따라 조정에서는 백하암 옆에 표충사(表忠社) 사당을 짓고 사명대사 영정을 봉안한 후 봄,
가을로 제사를 모시게 했다.
제수는 관가에서 지급했다.
국가에서 인정한 사당이 되자 사적비와 행적비를 표충사에서 십 리 아래에 있는 삼강동(지금 밀양시 무안면 면소재지)에 세우게 된다.

이 불사는 남붕대사(?~1777)가 도맡아 이뤄지는데,
이 비가 바로 땀 흘리는 표충비다.
이 비는 세 개의 비문을 하나의 몸돌에 새겼기에 삼비(三碑)라고도 부른다.
곧 비의 정면은 ‘송운대사(사명대사)비명’ 뒷면에는 ‘서산대사비명’ 측면에는 ‘표충사사적비’를 함께 새겨넣은 특이한 비다.
이 해가 1742년(영조 18)이다.

연초대사와 남붕대사는 표충사를 서원 형태로 유지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수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표충사의 제사를 일체 유교식으로 지냈으며,
유생들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이곳에 들어와 수학하는 것도 장려하면서 점차 서원 형태로 가꿔 나가게 된다.
이후 100여 년 간 사명대사의 고향에 있던 표충사는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로 옮기게 된다.
표충사 사당이 옮겨오면서 영정사는 표충사(表忠寺)로 절 이름이 바뀌게 된다.



표충사 사천왕문

옛 자취는 간 곳 없고

표충사(表忠寺) 큰 절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대화재를 만나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해부터 소진된 전각들을 복원하기 시작해 1929년에는 대광전을 세움으로써 중건불사를 마쳤다.
대광전과 나란히 있던 표충사,
표충서원도 1929년에 다시 지었는데,
여러 스님이 법당 옆에 유교의 서원이 나란히 있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1971년 사천왕문 바깥으로 옮기고,
그 대신 표충사 사당은 팔상전으로 바뀌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표충서원이 있음으로 해서 사찰이 조정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시대가 바뀌어 서원이 밖으로 밀려난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길가에 영사각(永思閣)이 있다.
잊지 않고 길이 생각하겠다는 뜻이니 당연히 표충사에 공헌한 고승들과 인물들의 비석을 모셔놓은 곳이다.
그런데 비석이 독특하다.
석비도 아니고 철로 만든 철비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목비(木碑)다.
6개의 비가 전부 그렇다.
야외에 세워진 비각에 이렇게 목비가 6점이나 남아 있는 곳은 없다.
목비는 불이나 물에 취약해 보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표충사 가람각

영사각을 지나 표충서원의 정문인 수충루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쪽에는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작고 앙증맞은 한 칸짜리 전각이 하나 서 있다.
가람각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모셔지는 공간으로 이곳에서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
순천 송광사 입구에 있는 척주각·세월각과 같은 용도의 건물이다.
이 두 사찰 외에는 다른 곳에서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표충사 서래각

표충사 마당에서 동쪽으로 높은 계단 위에 사천왕문이 우뚝 서 있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서 마주 보이는 탑이 표충사 삼층석탑(보물)이다.
신라 말의 작품으로 기단부가 단층이고 탑 가까이에는 동시대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석등이 바투 서 있다.
석탑 왼쪽으로는 담장이 둘러쳐진 특이한 건물이 있다.
공식 명칭은 만일루이지만 보통 서래각(西來閣)이라 부른다.
‘H’ 자형 건물로 철종 11년(1860)에 지었지만 불에 탄 후 다시 지었다.
근세의 고승 효봉 스님(1888~1966)이 이곳에 계시다가 입적하셨다.

대광전과 나란히 있는 팔상전 자리는 원래 표충사 사당이 있던 자리다.
팔상전 내부의 벽화를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그림들이 있어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다.
어느 면에는 맥주와 맥주잔이 그려진 곳도 있고 어느 면에는 그릇에 담긴 과일과 화병에 꽂힌 꽃이 그려진 것도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세간의 그림과 풍속들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대광전 편액은 일제강점기의 명필 해강 김규진이 썼다.
대광전 동쪽 외부 벽화에도 그림 중에 자동차가 보인다.
역시 시대가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그림이다.

만어사에서 돌종 소리를 듣다

밀양에는 세 가지 신비함이 있다.
앞에서 말한 땀 흘리는 표충비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이다.
얼음골은 『소설 동의보감』에서 명의 허준(1539~1615)이 그의 스승 유의태의 부름을 받고 밀양 얼음골 동굴에서 스승의 시신을 해부한 곳으로 그려진 곳이다.
뜨거운 여름에도 결빙지 근처의 기온이 6~7도에 머무르는 특이한 곳이다.

마지막 하나는 만어사의 만어석(萬魚石)이다.
만어산(669m)의 8부 능선상에 펼쳐진 거대한 바위 너덜지대로 폭 100m,
길이 500m에 이른다.
어느 천신이 하늘에서 쏟아부어 놓은 것일까? 볼수록 기이하고 신비한 풍경이다.
더구나 작은 돌을 손에 잡고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
돌의 종소리가 다 다르다.
그렇다고 모든 돌이 종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더욱 신기하다.

이곳에서는 때에 따라 아래쪽 산야에 구름의 바다가 펼쳐진다.
장관이다.
밀양8경에 ‘만어사 운해(雲海)’가 들어가는 이유다.
이 신기한 너덜지대는 2011년 ‘밀양 만어산 암괴류’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이 됐다.

“가야국 수로왕의 영토 안 옥지(玉池) 연못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녀가 5명이나 있었다.
독룡과 나찰녀들이 서로 오가며 사귀니 수시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여물지 않았다.
수로왕이 주술을 이용해 물리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결국 부처님을 모셔 오게 됐다.
부처님이 와서 설법하니 나찰녀들도 오계를 받았고 그 후로 재해가 없어졌다.
동해의 용이 물고기들을 거느리고 와서 마침내 돌로 변하여 골짜기에 가득 차게 됐다.

『삼국유사』 「탑상」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실린 내용이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경전의 내용을 실은 후 경전의 내용대로 만어산의 돌들이 금(金)과 옥의 소리를 내고 멀리서 보면 (부처님의) 형상이 보이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곧 경전의 내용이 이곳을 말한 것이 아니냐는 뜻도 담고 있고 수로왕의 전설도 이 경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도 비춘 것이다.



만어사 미륵전 안에 있는 물고기 모양의 바위

이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바위가 바로 미륵바위다.
지금은 미륵전 건물 안에 들어가 있지만 전에는 너덜지대 맨 위 노천에 마치 물고기의 우두머리인 용왕처럼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높이가 5m가량 되는 선바위가 수많은 물고기 바위를 거느린 풍경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묘한 모습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미륵바위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제각각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니 일연 스님이 기록한 대로 부처님 그림자가 깃든 바위인 것이다.
‘어산불영’은 바로 ‘만어산에 깃든 부처님의 그림자’라는 뜻이 아닌가? 『관불삼매경』 제7권에는 범천이 중생들을 위해 바위 속에 부처님의 그림자를 남기신 뜻을 찬탄하는 글귀가 있다.

“여래께서 석굴 안에 계시더니
몸을 날려 바위 속으로 들어가셨네
해와 같아 걸림이 없으시고
금빛 광명 두루 갖추시니
저는 지금 머리를 조아려
세상을 구제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경합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저서로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사찰에 가면 문득 보이는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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