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

내 모습이 낯설 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생기는 의심이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 건가?', '이걸 왜 하고 있었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뭐지?'와 같은 생각들. 예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일임에도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마음에 드는 답이 생각날 때까지 방황하기도 한다.
근데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타인에게서 비롯한 질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낸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음표 하나가 발목을 잡는데, 그 힘이 어찌나 괴물 같은 지 모른다.

저마다의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다.
나를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진 탓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나에 대해 표현할 기회가 없다.
학생 때는 매 학년 올라갈 때마다 자기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취업해야 하는 시기엔 면접을 위해 1분 스피치를 준비하기도 했다.
물론 내 모습이 온전히 녹아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표현도 연습하지 않으면 퇴화하는 법이다.

압박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굳이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매일 똑같은 사람만 만나기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연을 이어나가는 일도 없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며 철석같이 달라붙어 물음표를 휘두르는 사람도 없다.
적극적으로 자기소개하며 나를 어필해야 할 자리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명목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나를 잃어간다.

사람은 명목이 있어야 움직인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명목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었다.
자기소개할 기회가 없는 탓에,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줄어든 탓에, 그 대체재를 만든 것이다.
심리 테스트나 유형 테스트를 통해서 말이다.
예전엔 혈액형 테스트가 한참 유행이었다.
혈액형에 따라 소심한 사람, 활발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별난 사람을 분류하곤 했다.
나와 비슷한 특징을 발견하는 날엔 주변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다.
사람을 4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순 없지만, 그 숫자마저 귀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요즘엔 MBTI 테스트가 유행인 듯하다.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미래를 그리며 사는 사람과 눈앞에 놓인 게 더 중요한 사람. 감정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혹시 몰라 모든 걸 준비해 놓는 사람과 필요성이 느껴질 때 준비를 시작하는 사람. 총 16개의 유형으로 사람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혈액형 테스트보다 더 정확한 듯하다.
같은 유형의 사람끼리 모여서 공감을 나누는 모임도 생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너무 극단적이다.
사람을 어떻게 16개로 나눌 수 있겠는가.

테스트에 몰입하다 보면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게 보인다.
분명 나를 나타낸 유형임에도 유심히 살펴보면 나와 다른 부분이 꽤 많다.
똑같은 유형의 사람끼리 모였는데도 나와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리고 나면 이번 테스트가 정확하지 않다며 또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행성 테스트, 꽃 테스트, 동물 테스트 등. 이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다.
나를 표현할 연습을 해야 하는데, 어딘가에 끼워 맞추려고만 한다.

내 모습은 내가 정의해야 한다.

연습을 동반한 표현이 가장 나다운 법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새로운 학년이 되던 날, 혹은 면접을 준비하던 날. 이런 날에 준비한 자기소개가 그 시절의 내 모습을 표현하는 가장 가까운 문장이었다.
물론 그 시절 자기소개의 목적은 지금 필요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를 알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자기소개가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었음은 반박할 수 없다.
연습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습이 필요하다.
내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생의 모든 건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결과도 없는 법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효과 좋은 방법은 30초 안에 자기소개 하기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장점, 단점,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사람 등. 대여섯 개쯤을 추려 문장을 만든다.
그 문장을 30초 안에 내뱉을 수 있도록 여러 번 반복한다.
언제 어디서든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문장이 아닌, 나를 위한 문장을 가공하는 것이다.

30초가 나를 지킨다.
내가 하는 일에 의심이 들 때, 누군가에 의해 기준이 흔들릴 때, 삶의 모든 게 허망한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런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
스스로를 견고하게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도 평탄하게 흘러간다고 믿는다.
흔들리지 않는 삶.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이 모든 건 나를 소홀히 대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잃지 않는 일이다.

나 없는 곳엔 아무것도 없다.

『 일간 윤설 』 언어에 관하여

관계 망치는 사람, 말할 때 '이것' 없다.

 

정직하지 못한 말을 최악으로 여긴다.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매우 솔직한 듯 당당한 자세를 취하며 말하지만 그 속에는 온갖 거짓이 담겨 있다.
실제 속마음은 그러지 않으면서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문장으로 말을 장식한다.
비상식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있으면서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인 듯 행세한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말. 은연중 본질을 왜곡하는 말. 그런 위선적인 말이 싫다.

여기에 삐뚤어진 태도를 더하는 사람은 더욱더 싫다.
상대방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배운 티를 내면서 눈앞에 놓인 사람을 은근히 하대하는 사람. 조언이라며, 이 모든 게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행세를 한다.
나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말. 듣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부끄럽다.
그 말이 망언이라는 걸 왜 본인만 모르는지.

평범한 사람보다 적당한 명예를 손에 쥔 사람이 이런 말을 더 많이 한다.
스스로가 그런 말을 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식으로 범벅된 말일지언정 자신을 믿고 따라오면 비슷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쉽지만 가르치려 드는 말은 갈등의 씨앗이 될 뿐이다.
아무리 좋은 말처럼 포장해도 속이 텅 빈 상자일뿐이다.
말 한마디에 더 큰 무게를 실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말을 더 가볍게 한다.

말의 무게는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모른다.

내 입이 두려울 때가 있다.
말의 무게를 스스로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그렇다.
농담으로 내뱉은 말 한마디에 대화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누구나 공감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 말 한마디에 분노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판단한 말이 기분 나쁜 충고가 되기도 한다.
분명 깊게 생각한 뒤에 꺼낸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동일한 속도와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거친 말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게 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그렇다.
말을 하다 보면 가끔 탄력이 붙는 순간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백과사전처럼 체계적으로 튀어나올 때,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 옛 시절을 되새김질할 때, 어려운 일을 극복했던 뿌듯한 순간이 떠오를 때가 그렇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재밌다는 느낌이 든다.
재밌어서 계속 떠들게 된다.
상대방이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말이다.
대개 망언은 이럴 때 튀어나오지 싶다.

너무 많이 말한 것 같다 싶은 날엔 집에 돌아와 하루를 곱씹어 본다.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의 조각을 다시 끼워 맞춰 본다.
완성된 조각을 심히 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너무나도 많다.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표현을 과장하기도 했다.
내 입장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약간의 거짓말을 첨가하기도 했다.
내가 내뱉은 말이 되려 나를 겨누는 총구가 된 것이다.
모든 말을 되돌리고 싶다.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어떤 말은 침묵보다 못하다.

말하는 게 재밌어질 때면 침묵하기 위해 노력한다.
억지로라도 입을 틀어막는다.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 조용히 있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망언을 재료 삼아 으리으리한 성을 짓는 것보다, 정직한 돗자리를 펼쳐 얌전히 땅 위에 앉아 있는 게 마음 편하다.
미래의 나를 위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관계를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
섣부른 조언과 위로는 독이 될 뿐이니까 말이다.
때론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된다.

굳이 말을 해야 할 때면, 혹은 반드시 꺼내야 할 말이 있으면 자세를 낮추고 말을 시작한다.
신체의 위치가 아니라 정신의 위치를 낮게 유지한다는 뜻이다.
하고 싶은 말 앞에는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공감 가는 말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같은 수식어를 붙인다.
서로의 관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자세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소 자신감 없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런 배려가 마음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다.
물론 침묵보다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든 말에는 적당한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말은 투명한 흉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
말을 내뱉기 전부터 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책임감이 생긴다.
여기서 생기는 책임감이 솔직함과 정직함을 만날 때 비로소 기회가 생긴다.
서로를 빛내는 등대가 되어줄 소중한 기회 말이다.
이런 기회를 쥘 줄 아는 사람이 관계를 한 층 더 견고히 만든다.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관계를 진심으로 대한다.


부동산 아파트는 집이 아니다

랑을 언어로써 보호하고 지키는 집,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이것이 소위 민중해방을 위한 참여시를 써온 정희성이 평생의 공력을 쏟아 내린 신중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달랐던 순수시의 거장 서정주는 어떨까요? 그에게 시는 무엇일까요? 그의「시론(詩論)」이란 작품을 읽어봅시다.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시론(詩論)」, 전문)

서정주, 『미당 시전집 1』, 민음사, 2002. 406쪽.

사랑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고서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시입니다.
미당에게도 시는 역시 사랑의 집이었던 것이죠.

우린 이런 집에서 산 적이 있던가?요 경기 동향에 따른 자산 가치 현황에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는 어른들에게는 어림없는 집입니다.
하지만 어른들도 어렸을 때는 그런 집에 살았습니다.
불운한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조차 엄마의 자궁을 집으로 삼을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만나 옹알이 사랑 언어를 익히던 곳, 그 집이 시적 언어가 거주하는 장소입니다.

한국인들의 집, 아파트 (출처: iMBC연예)

아이들은 처음 부모에게 말을 배웁니다.
아니, 존재에 반응하는 웃음, 울음, 몸짓조차도 일종의 ‘침묵의 언어’라면, 아이는 먼저 존재로부터 언어를 배우는 게 맞습니다.
아이가 처음 만난 존재는 엄마입니다.
눈도 못 뜬 상태까지 고려한다면, 처음 만난 ‘존재’는 엄마의 ‘사랑’이었습니다.
아이는 사랑으로부터 말을 배웁니다.
더듬거리며 태초의 언어를 습득합니다.

반면 시인은 이미 인간의 언어를 배운 상태입니다.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에서 탈피하여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 합니다.
그때 그가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동심입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언어 습득 이전의 상태로 퇴행해서 어린아이처럼 옹알대며 태초의 말을 따라 말합니다.
에로스의 사원에 들어가서, 가닿을 수 없는 사랑이 새겨진 (불가능한) 언어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이상한 낱말을 내뱉죠. ‘입김으로 피어나는 겨울 향기’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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