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구간별 자랑거리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련성 기자

누구는 발설하기만 해도 꿈이 이뤄진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아무튼,
주말’에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희망 편지를 띄우자 벌어진 일이다.
등단시켜 드리겠다는 연락이 쇄도했다.
“원고 주시면 3월호 권두시로 싣겠습니다”(월간 문학세계) “여자 친구 구인 광고를 내겠다는 교수님을 시인의 전당에 모십니다”(서울문학광장)....

저출생·고령화가 맞물리면서 인구 통계는 점점 드라마틱해진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70대 이상 인구가 631만여 명으로 20대 인구(619만여 명)를 처음 추월했다.
한국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늙어가는 중이다.
희망 편지 글감도 1회는 저출생(춘천 칠남매 아빠),
2회는 고령화(104세 철학자 김형석)와 얽혀 있었다.

세 자리 숫자가 입력되지 않는 바람에 102세 노인을 2세 아이로 착각한 항공사 시스템이 고마웠다.
김 교수도 한바탕 웃고 백세 젊어진 기분으로 강연하고 원고를 썼을 것이다.
이 독거노인은 미국에 사는 손녀가 전화로 걱정할 때 “그런 소리 마라. 얼마 전 너희가 와 있던 열흘 동안 여자 친구를 못 만났다”고 농담할 줄 아는 우리 시대의 어른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소설 ‘웃음’에서 인생의 구간별 자랑거리를 꼽은 적이 있다.
2세 때는 똥오줌을 가리는 게 자랑거리다.
3세 때는 치아가 나는 게 자랑거리,
12세 때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
18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20세 때는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다.

그런데 인생이 반환점을 돌면 자랑거리가 뒤집힌다.
60세 때는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0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0세 때는 치아가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5세 때는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똥오줌 가리는 것부터 배우고 인생의 마디마디를 통과하다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는 다시 똥오줌 가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비관할 일은 아니다.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마라톤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늙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시인이다.
백세 너머의 삶에 대해 소슬하고 위트 있는 글을 다른 누가 쓰겠는가.



1920년생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내 정신이 내 신체를 업고 간다”고 말하는 철학자다.

/박상훈 기자

성난 사람들



'성난 사람들'에서 대니를 연기한 배우 스티븐 연 /넷플릭스

운전은 머지않아 심리학의 한 분야가 될지도 모른다.
이름 붙이자면 운전심리학이다.
법 없이도 산다는 착한 사람,
과묵하고 독실한 신자,
순한 양 같은 사람이 운전석에만 앉으면 달라진다.
“어지간한 일은 다 참는데,
운전할 때 누가 위험하게 끼어들면 욕이 나온다”고 배우 안성기도 고백했다.
아이슬란드 화산처럼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미국 에미상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8관왕에 올랐다.
이 복수극은 ‘로드레이지(road rage)’,
즉 난폭 운전으로 시작된다.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가 경적을 울리며 화를 돋울 때,
분노를 누르지 않고 응징에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녀 주인공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엘리 웡)는 끝까지 간다.

도급업자 대니는 성실하지만 어리숙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다.
에이미는 악착같이 일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을 누릴 시간이 부족하다.
두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익명의 존재로 부딪치는 순간,
저마다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버린다.
난폭 운전과 보복 운전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쾌감과 고통을 맛본다.
뭔가를 잃으면서 내면을 탐구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어제까지의 세계’를 쓴 문화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동차 선팅과도 같은 현대의 익명성은 경이로우면서도 끔찍한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미국 촌구석에서 두 농부가 주먹다짐을 했다고 치자. 그들은 경찰을 부르지 않고 소송을 제기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합의한다.
앞으로 수십 년 얼굴 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도시에서는 접촉 사고만 나도 경찰을 부른다.

인류가 익명의 세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고립감이 커지고 보복 운전이 늘어났다.
‘성난 사람들’을 쓰고 연출한 이성진 감독은 로드레이지의 불쾌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계 이민자들의 삶과 정서,
가족과 감정에 대한 통찰을 담아냈다.
흥미롭고 보편적인 이야기라서 인기를 얻었고 골든글로브에 이어 에미상까지 석권했다.

분노는 사회문제다.
온라인에 달리는 댓글들에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운전석에서 보는 세상은 더 흉흉하다.
저마다 분노의 화약고를 가슴에 쟁여두었다가 도로 위에서 탕탕 쏘아대는 것 같다.
선팅이 진해서 운전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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