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를 명품도시로 만든 예술…마이애미는 살아있는 캔버스다"


[세계 도시는 문화전쟁 중]①강대국의 조건, 컬처시티인터뷰 - 크레이그 로빈스 다크라 회장마이애미의 얼굴을 바꾼 '디자인 디스트릭트'도시 재생의 롤모델을 만든 기업가이자 후원가20대 때 예술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영감 얻어예술이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힘 실감"디자인과 문화는 정치와 경제의 경계도 허문다"

북미와 남미의 통로인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1990년대 마약과 총격이 빈번하던 범죄도시가 지금은 전 세계 부호들의 초호화 별장지이자 글로벌 기업 본사들이 몰려드는 명품과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지난 20년 간 마이애미의 얼굴을 바꾼 수 많은 조력자들 중 크레이그 로빈스 다크라 회장(61)이 그 중심에 있다.

크레이그 로빈스 Darca 회장 겸 CEO.

마이애미 노스이스트 42번가는 1920년대 파인애플 농장 지대였고, 2000년대 초까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마이애미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었던 이곳은 부동산 개발사 다크라가 2010년 부터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개발하면서 명품 숍과 디자인 가구 쇼룸, 고급 레스토랑, 130여 개 미술관과 갤러리가 한 데 모인 명품 지구가 됐다.
건축물과 간판에도 디자인 요소를 입혀 길을 걷는 누구나 예술적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공공예술의 명소가 된 것.앞서 1999년 그가 추진한 앨리스섬 재개발은 민간 주거 커뮤니티에 초대형 벽화를 내거는 등 디자인과 건축에 이르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도 도시 재생의 롤모델로 꼽힌다.
살바도르 달리 등 그림 7000여 점을 보유한 큰손 컬렉터이자 현대미술 작가들의 후원가로, 아트바젤 마이애미 기간 ‘디자인 마이애미’라는 아트페어를 만들어 파리로도 수출한 그를 인터뷰했다.

크레이그 로빈스 Darca 회장 겸 CEO.

부동산 개발에 예술을 어떻게 접목시켰나."198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대에서 잠시 유학을 했다.
그때 고야, 피카소, 미로, 달리 등 매혹적인 작품을 접하며 본격적으로 예술에 빠져들었다.
경이로운 건축물들 자체로 도시 전체가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다.
예술과 디자인, 문화적 경험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 깨닫고, 모든 기준이 바뀌었다.
부동산 개발의 접근법을 바꾸게 됐다.
"

Darca는 마이애미의 낙후 지역을 공공 예술과 디자인, 미술관으로 채운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탈바꿈 시켰다.

마이애미는 예술과 거리가 멀었던 도시다.
"마이애미에서 태어났다.
여러 문화가 뒤섞인 마이애미는 잠재력이 숨어있다고 확신했다.
마이애미는 전 세계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살아 숨쉬는 캔버스와도 같다.
나 혼자가 아니라 자선사업가들과 후원자들, 동료 수집가들이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 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에 지금의 마이애미가 예술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재개발 등의 이슈엔 항상 명암이 존재하는데?"도시 개발을 할 때 단순하게 상업적 측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예술과 디자인, 문화 프로그램에 대한 시장의 수요와 관심이 어느 정도인 지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강력한 예술과 디자인 프로그램, 이를 수용할 장소를 도입하는 게 먼저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동네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상업적인 성공의 수명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

Darca는 마이애미의 낙후 지역을 공공 예술과 디자인, 미술관으로 채운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탈바꿈 시켰다.

예술, 예술가란 당신에게 무엇인가."예술은 정치, 문화, 경제 등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힘이다.
인간이 가진 고유의 상상력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사람들을 연결하고, 함께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 측면에서 전 세계의 떠오르는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Darca는 마이애미의 낙후 지역을 공공 예술과 디자인, 미술관으로 채운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탈바꿈 시켰다.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시대를 뛰어넘어 (예술의)본질과 스타일, 그리고 혁신을 잘 결합해 오래 지속되는 커뮤니티를 만든 문화의 개척자로 남고 싶다.
"마이애미=김보라 기자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고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화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생전에는 가장 인정받지 못한 화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고흐의 그림과 삶을 따라가면서 삶의 고비마다 맞닥뜨렸던 갈등과 감정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심리학 개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동훈

인문학의 서사를 담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퓨라파케’ 대표. 그리스·로마 문학 및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리더의 언어사전>, <인공지능과 흙>, <브랜드 인문학> 등을 썼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욥의 노래>(<욥기> 원전) 등을 번역했다.
<제4의 벽: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철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미술 비평.

동생을 향한 ‘모방 욕망’이 만든 반 고흐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노

[arte]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파리를 방문한 다음 해부터 고흐는 유화로 여러 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풍경화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 보인다.
총 서른여섯 점의 자화상 중 오늘 보게 되는 이 작품은 '밀짚모자를 쓴 고흐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왔다.
파리에서 그려졌으며 밀짚모자와 불그스름한 머리, 파란 배경에 파란 정장 상의, 하늘색의 빳빳한 나비넥타이를 한 신사가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그림이 테오의 초상화인지 아니면 고흐의 자화상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공식적으로 2011년 이후부터는 ‘고흐의 자화상 또는 테오의 초상화(Self-Portrait or Portrait of Theo van Gogh)’라는 두 개의 제목을 갖게 되었다.
고흐 형제는 성격은 달랐지만 외모는 매우 닮았다.
더욱이 두 형제 모두 삶에 서려 있는 슬픈 녹색 눈을 지니고 있어, 이 점이 그림 속 인물이 고흐인지 테오인지 그 정체성을 더욱 모호하게 했다.

고흐의 자화상 또는 테오의 초상화(1887년)

형제들의 ‘모방 욕망’

1886년 2월 말에 시작한 두 형제의 동거는 1888년 2월 고흐가 갑자기 파리를 떠남으로써 끝을 맺었다.
고흐가 파리를 떠난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직은 없지만, 2년간 파리에서의 다양한 사건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중 하나는 전시회를 둘러싼 석연치 않은 형제 관계다.
이번 글에서는 형제 관계를 20세기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짝패(double)’ 개념으로 살필 것이다.
‘짝패’란 서로를 모방하고 경쟁하는 두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모방하다가도 상대방을 제외시키고 희생시키는 이중적 감정을 가진다.
그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고흐 형제간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다.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대신 '짝패'라 여기는 상대가 가진 것에 대해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을 갖는다.
특히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분야의 능력을 부러워하면서 상대를 향한 시기와 질투, 분노, 모함을 동반한다.
고흐와 테오의 경우에도 테오는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욕망하고, 고흐 또한 테오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인 직업을 욕망했다.
하지만 상대를 향한 부러움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열등감이 작동하면서 끝내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이 그 능력을 차지하려고 한다.
동생 테오는 고흐의 재능을 통해 성공하는가 싶더니 형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래서 테오가 욕망했던 고흐의 예술적 재능이 무엇인지, 또한 고흐는 테오의 어떤 점을 부러워했는지를 살펴본다면 고흐가 갑작스럽게 파리를 떠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테오는 구필 화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회사는 새로운 화가를 발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마침 책임자 중 한 명이 은퇴하게 되면서 테오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화랑을 만들고 싶었다.
전통적인 작품부터 현대적인 작품까지, 그러니까 고전주의, 사실주의 작가들부터 인상파와 젊은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까지 전시하였다.
그런 중에도 상사들을 의식해 1층에는 전통적인 작품을, 2층에는 현대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하지만 테오는 미술과 화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는 그들이 매우 다양하며 거의 매일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에게는 고흐의 예리한 시각과 방대한 지식, 그리고 작품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절실했다.
특히 고흐는 테오가 신진 작품들을 선별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얻게 된 모네 그림에 대한 테오의 성공은 미술계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이익도 상당했다.
당시 테오는 여동생에게 “2년 전 형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질 줄 몰랐어.”라는 말로 형 덕분에 얻은 성공은 감추고 친밀감만을 과시했다.

‘모방 욕망’에 따른 양가적 감정

고흐와 테오는 함께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그랑부이용 레스토랑 뒤 샬레’라는 곳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도 있었다.
조르주 쇠라와 폴 고갱도 이 전시회를 보러 왔고, 테오는 고갱의 작품 몇 개를 팔 기회도 얻었다.
그 후에도 고흐와 테오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계획했다.
전시회가 끝나면 몽마르트 근처 카페에서 다른 화가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가 고흐의 전체 인생 중에 가장 활기찬 시기였다.
테오는 단박에 파리 미술계에서 큰 권력을 누리며 많은 화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구필 화랑에 전시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겼고, 그 대가로 작품들을 테오에게 헐값으로 팔거나 선물로 주는 일도 많았다.
테오의 작업실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그의 조언을 구하고, 서로들 예술적 영감을 나누었기에 늘 많은 사람들로 부쩍거렸다.
이런 테오의 사회적 지위를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고흐였다.
하지만 동생을 흉내 내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고흐는 테오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한마음이 되었고 자신도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이 자화상(1887년)을 보면, 그림 속 고흐는 중절모자를 쓰고 실크 스카프를 두른 근사한 정장 차림이다.
고흐의 자화상들이 주로 낡은 작업복을 입고 치아가 상해서 두 뺨은 푹 꺼져 있으며 시선은 창백하고 멍하고 냉담한 모습이 대부분임에 반해, 이 그림은 마치 자신이 테오인 듯 말쑥한 사업가의 모습이기에 낯설기까지 하다.

자화상(1887년)

만약 앞에서 언급한 자화상을 테오의 초상화라 친다면, 테오는 밀짚모자를, 고흐는 중절모를 쓴 것이다.
우연히도 고흐의 그림은 두 형제 관계의 ‘모방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흐가 파리에서 겪은 변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1887년 10월, 고흐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첫 번째 전시회를 기획했다.
새로운 화파를 대표하는 전시회로 준비하고자 했다.
우선 예술적으로, 다음은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 믿으며 자신의 예술성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전시회를 구필 화랑에서 열 수 없게 되었다.
테오가 상사들을 핑계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시회는 작은 규모로 알려졌고 참여 작가가 없어서 50여 점의 고흐 작품만으로 채워졌다.
전시회는 며칠 만에 실패로 끝났다.
급기야 고흐의 ‘모방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비난과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고흐는 구필 화랑에 발길을 끊었고, 화랑과 미술 시장의 부패에 대해 비난하면서 테오와 자주 말다툼을 벌였다.
반면 테오는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격정적인 형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형에게 계속 지원하기가 싫어졌다.
그 후 테오는 예술성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색채가 풍부하고 힘이 넘치는 그림, 주제가 유쾌하고 눈을 만족시키는 그림을 좋은 작품이라 여겼다.
이런 기준은 고흐가 오랫동안 싫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형에게 보란 듯이 그런 그림들로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으며, 형의 예술적 가치관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들

한편 고흐는 동생처럼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었지만 동생의 소극적 태도와 상업성에 몹시 슬퍼했다.
또한 자신의 사업성과 예술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다.
하필 그때 엄마와 동생들에게 두었던 자신의 작품들과 그림 도구들이 경매에 넘겨졌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이에 그는 자신의 불운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압생트라는 술로 잊으려 했다.

이들 형제가 아직 엄마 품에 있던 때, 테오는 엄마에게 안겨 젖을 먹고 있었다.
그것을 본 네 살 많은 형은 젖을 먹듯 입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은 파랗게 질려 형이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게 손을 내둘렀다.
젖을 두고 경쟁하는 유아들처럼 두 형제가 서로를 향해 갖고 있었던 ‘모방 욕망’은 서로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경쟁심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경쟁심은 때로는 상대를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상대의 재능을 따라갈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제발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줘.” 테오가 고흐에게 반복했던 부탁이다.
1887년에서 188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고흐는 동생과의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테오는 형과 따로 살기를 간청했고, 고흐는 그동안 동생에게 퍼부었던 비난과 분노에 죄책감을 느끼고 급기야 파리를 떠났다.

돈에 집착하기는 싫지만 돈을 벌고 싶은 욕망, 상업적 그림이 싫지만 사교계에서 멋지게 활동하는 테오를 부러워하던 고흐는 어설프게 테오를 따라 했던 것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후 동생 테오의 성과를 남겨둔 채 자신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파리를 떠났다.
고흐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또 하나의 ‘형제의 난’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2년 후 고흐는 사망하기 직전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자신이 파리를 떠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밝혔다.

테오는 형의 장례식을 치른 후 6개월 만에 죽었다.
형이 더 오래 살았다면 동생도 더 오래 살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형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구석에 또 부러움과 속상함이 같이 존재하는 이런 슬픈 형제애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을까? 어찌 보면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놓인 운명 같은 것이다.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

만약에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한 그 사람이 있다면, 짝패가 되어도 좋으니 그런 양가적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면 어떨까? 형제가 나를 떠나기 전에 터놓고 말해 볼 수 있는 용기가 더 큰 형제애로 나아갈 기회를 선사하니 말이다.


고흐의 그림은 파리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히스테리를 이겨냈던 것 같다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고흐의 히스테리적 흔적에 관하여파리에서 고흐의 화풍이 바뀐 것은라캉식 '히스테리' 개념으로 볼 수 있어"고흐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새로운 전환을 경험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적 태도와 강박적인 성향으로주변 환경을 조절하려 했지만이제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1886년 2월의 마지막 날, 학적을 두고 있었던 앤트워프의 왕립미술원을 뒤로한 채 고흐는 파리로 향했다.
몽마르트에 있는 동생 테오의 집에 머무는 동안 줄곧 밝은 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를 그렸다.
같은 제목으로 세 편이나 작업했다.
언뜻 보아서는 마치 인상파 작품 같다.

고흐의 그림은 파리 생활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진다.
전에는 주로 어두운 색감과 두꺼운 붓질이 주된 특징이었다면, 파리 생활을 시작하면서 밝고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 찼다.
전반적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활기찬 느낌을 준다.
'물랑 들 라 갈레트' 세 편은 모두가 가벼운 색채와 함께 자유로운 고흐를 느끼게 한다.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1886년)

반 고흐 「물랑 들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1886년)

물랭 드 라 갈레트(1887년)

강박에서 히스테리로, 몸의 감각을 겪다

파리로 온 뒤로 고흐는 얽매이던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 가지 방식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강박증과 관련이 깊다.
강박증은 개인이 특정 행동이나 자기주장에 신경을 쓰되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반복적인 손 씻기나 세수, 과도한 정리 및 청소를 한다든지 특정 원칙과 습관이 고착되어 거의 탈진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고흐는 그동안 어둡고 두꺼운 붓질이라는 강박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흐가 강박증에서 벗어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의 히스테리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교롭게도 고흐가 파리에 도착한 날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트가 남성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파리를 떠났다.
같은 날 파리 기차역에서 한편에는 29세의 프로이트가, 한편에는 32세의 고흐가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상상의 고리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 바로 히스테리로 보는 고흐의 파리 생활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무의식 개념을 발견하고, 그것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성별에 관계없이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여 심리학 및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히스테리는 원인 불명의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억압하면 무의식에 남아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은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히스테리를 건강한 인간의 특징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히스테리적 인간은 우선 자기 주체성이 타인을 향한 욕망을 억압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 그 주체의 자리에 타자가 다시 들어오게 한다.
억압으로 상실된 욕망을 보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억압된 욕망의 결과 신체에 드러난 증상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라캉은 주체의 자리에 주체와 타자가 순환하면서 욕망의 억압과 해소가 반복된다고 보았다.
이런 히스테리적 인간이 솔직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파리에서 고흐의 화풍이 바뀐 것은 라캉식 히스테리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흐가 다양한 화가들의 기법을 탐구함은 그들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발전시킴은 타인에 대한 욕망을 억압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흐의 독자적인 화풍은 파리에서 갖게 된 라캉식 히스테리의 흔적이다.
고흐는 앤트워프에서 독한 수은제 치료를 받고 치아의 3분의 1을 마취도 없이 발치하고 난 후 자신을 해골의 모습으로 그렸었다.
그때까지 두꺼운 색으로 묵직하게 칠해야 한다는 강박은 그의 대인관계를 왜곡시키고 행동양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다.
파리에 있는 화가 페르낭 코르몽(1845~1924)에게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고흐가 당시 파리 예술가들을 열망한 것은 라캉이 말하는 히스테리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나서야 그 현상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고흐의 고흐들

고흐는 1886년 4월부터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퀘탱, 툴루즈 로트레크, 호주 출신의 화가 존 피터 러셀과 친분을 쌓았다.
로트레크와 러셀은 각각 고흐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들은 ‘페레’ 탕기가 운영하던 화구상점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세잔의 그림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점묘파와 신인상파가 나타나면서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냑의 대규모 전시회에도 참석했다.

고흐가 파리의 다양한 화가들과 교제하고 수많은 전시회를 찾으면서 그들의 화풍을 모방한 것은 분명히 그들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모방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물랑 들 라 갈레트' 세 편과, 또 이미 10년 전부터 인상파의 걸작으로 유명했었던 동일한 제목을 가진 르누아르의 작품을 비교해 봐도, 르누아르는 활기찬 무도회를 묘사했지만 고흐는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풍경을 표현했다.
이는 다른 화가들을 욕망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잃지 않으려는 히스테리적 흔적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고전의 거장들로부터 배웠지만, 이제는 동시대(contemporary) 작가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 고흐가 거장에게 배우던 지식은 이제 친구들에게서 얻는 지식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대 유행하던 인상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화풍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욕망하는 그 대상을 찾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는 일을 반복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좋은 모습은 다양한 화풍을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능력이다.
현재의 예술적 트렌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우물’에 빠져 동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외곬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다양한 화풍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넓은 관점을 소유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지 못할 때 타자를 욕망하여 어떤 유행을 수동적으로 맹종하거나, 아니면 주체에 대한 강박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다.
고흐의 경우 이제까지 따랐던 방식은 낯선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흐는 앤트워프에서 잠시 맹종적인 삶을 살았지만 대부분은 욕망하는 대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 욕망을 억압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이 강박 때문에 늘 혼자라 외로웠고 우울과 불안까지 느꼈다.
때론 시골 사람들에게 과격하게 힘을 과시기도 했다.
그나마 드러낼 만한 힘마저 없다면 생색내기에 빠져서 ‘위하는 척’ 하다가도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상처를 받았다.
어찌 됐든 그런 상태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점점 더 외골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족과 사랑하던 여인들, 동네 사람들마저 숱한 충돌과 갈등으로 고흐를 외면했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는 유별난 자존심과 강박이 사라지자 놀랄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말은 유연하지만 그동안 사고가 경직됐던 고흐에게 침착과 여유가 생겼다.
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욕망하는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고, 그것은 여유롭게 다른 사람의 생각에 유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고흐의 캔버스에는 고흐의 또 다른 고흐들, 그러니까 ‘고흐의 세잔’, ‘고흐의 로트레크’, ‘고흐의 쇠라’, ‘고흐의 시냑’이 표현되고 있었다.

물랭드라칼레트(블루트핀)의 테라스에서(1887년)

히스테리의 필연적 흔적 ‘실재의 표현’

고흐는 줄곧 색채와 대상, 그림의 완성과 관련하여 ‘실재’를 표현하는 정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흐는 이미 밀레 등을 통해 리얼리즘(realism) 화가들이 생각했던 그 ‘실재(reality)’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이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림으로 실재를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어려웠다.
특히 색채에 관한 한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서 거의 준전문가였던 고흐는 어떤 색을 사용하더라도 실재를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흐는 색채나 대상, 도구보다는 '실재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인상파나 점묘파의 방식 등 어떤 화풍을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실험적인 정신이 돋보인 「물랑 들 라 갈레트」를 시작으로 그의 화풍이 변화한 것은 이러한 고민과 관련이 있다.
파리에서의 고흐는 자신의 화풍을 내려놓고 동료들의 화풍을 모방하고 흉내 내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그동안 어둡고 무겁게, 덧칠로 표현했던 그의 화풍이 밝고 가볍고, 빠른 붓질로 변했다.
하지만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일한 느낌을 전하는 대신, 고흐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새로운 전환을 경험했다.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적 태도와 강박적인 성향으로 주변 환경을 조절하려 했지만, 이제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자신이 사실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점묘파 등 모든 영역에서 인정받는 ‘관종’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랬더니 자신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고흐의 그림은 거북함과 폭력적인 강렬함이 사라졌다.
'물랑 들 라 갈레트'에서는 풍차 근처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가 보인다.
이제는 그 시절이 지난 고흐가 상상 속에 있는 아이들의 행복한 ‘실재’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이 엿보인다.

몽마르트 거리 풍경(1887년)

그렇다면 우리가 강박증에 빠진 이유도 알 것 같다.
우리에게 ‘실재’의 것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한다.
누구에게는 시기심으로, 누구에게는 열등감으로, 또 누구에게는 괜한 ‘갑질’로 표출되지만, 억압한 욕망 때문에 일평생 결핍(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실재만 있다면 그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블로그, 유튜브, 책,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오히려 적극 활용할 것이다.
표현할 실재만 있다면 표현할 것만 있다면 인상파이든 초현실주의이든 다다이든 추상표현주의이든 미니멀니즘이든 개념미술이든 그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을 고집하는 강박의 자식들이다.
고흐가 그랬듯이 실재를 고민하며 자기애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둡고 칙칙한, 마음 아팠을 감정의 찌꺼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렇다.
자유로운 영혼은 강박이 없다.
강박이 없는 그림은 보는 자를 자유롭게 한다.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워진 여성들의 이야기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도난당한 여성(Beklaute Frauen)>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레오니 쇨러“위대한 업적 남긴 여성들 역사에서 지워져”

Getty Images Banks

역사는 늘 강자의 관점에서 쓰였고, 약자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놀라운 업적과 성과를 이뤘음에도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여성이 있다.
여성들이 아무리 위대한 발명과 발견을 했더라도, 남성들이 손쉽게 그 공로를 가로챘다.
여성들의 이름이 역사에 남았을지라도, 그들은 ‘뮤즈’, ‘비서’, ‘아내’ 또는 ‘연인’으로 기록될 뿐이었다.
오랫동안 이렇게 여성들의 업적과 영향력은 빼았기거나 무시당했다.
최근 독일에서 출간된 <도난당한 여성(Beklaute Frauen)>이란 책이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주목받고 있다.
역사학자이면서 저널리스트인 레오니 쇨러(Leonie Schöler)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 많은 남성은 그들의 아내, 연인 또는 딸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라며, 안타깝게도 위대한 업적을 탄생시킨 여성들의 이름이 교묘하게 역사에서 지워졌다고 고발한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20만 명 이상의 팔로워와 소통하면서 역사와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저자는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 위대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심지어 천재 과학자라고 불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조차도, 여성의 도움 없이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소개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모두 여성들의 업적을 가로챈 사람들이었다.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은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제임스 D.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위대한 발견에 결정적인 증거를 처음으로 찾아낸 인물은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었다.

1958년 난소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그녀는 안타깝게도 노벨상 수상자의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생존한 사람만이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노벨상 위원회가 분야당 수상자를 3명으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구조를 확인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과학자를 향한 무시와 편견 때문에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DNA의 다크레이디’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Getty Images Banks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화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Otto Hahn)과 함께 원자핵이 중성자의 충돌로 분열되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의 연구는 2차 세계대전 독일과 미국의 핵폭탄 개발 경쟁에 불을 지폈고, 1944년 오토 한은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수상자 명단에 리제 마이트너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남성 중심의 과학자 세계에서 리제 마이트너는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 외에도 책에는 비범한 능력과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세계에 팽배한 ‘유리 천장’ 때문에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여성 지식인들이 소개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남성들은 여성 작가가 쓴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남성 작가의 책은 여성과 남성이 거의 동등하게 구매하는 반면, 여성 작가 책의 독자층은 85%가 여성입니다.
그래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남성 이름으로 또는 가명으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 지식의 권력이나 지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아주 따끔한 지적이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