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표는
준엄했다.
108 대 192. 보수여당이 대참패했다.
1988년 ‘1노3김’이 겨룬 13대 총선 이래 여당 지역구 의석이 처음 두 자릿수(90석)로 쪼그라들고, 그 의석마저 셋 중 둘은 영남(59석)이었다.
2년 전 대선에서 이긴 한강·금강에서 완패하고, 낙동강과 서울 강남에서 명줄만 부여잡았다.
중대선거구제와 비례제 확대를 반대한 여당은 누굴 탓할 것도 없다.
윷 던지듯 한 소선거구 진검승부에서 ‘모 아닌 도’를 잡았다.
그 투표함이 까진 4월10일 밤, 한국 정치는 또 한 번 개벽했다.
“왜 저리 막 던질까.” 대통령이
총선용 감세·토건 공약을 나날이 쏟아낼 때다.
“질 거니까.” 이 문답에 술자리에선 실소(失笑)가 터졌다.
정권심판론이 그리 컸고 이심전심으로 굴렀다.
허겁지겁 용쓰다 만 여당은 논외로 두고 그 심판의 시작과 끝, 오롯이 ‘윤석열’이다.
집권 2년 패인이 ‘디올백·런종섭’뿐일 리 없다.
검사 정치, 입틀막 정치, 이념 정치, 야당·비판언론만 수사·감사·검열한 권력사유화, 편 가른 인사, 사과 없는 만기친람 국정의 울화와 냉소가 ‘윤석열’로 집약됐다.
대통령은 굳이 비쌀 땐 국과
계란찜에 넣어 먹지 않는 게 대파란 것도, 그래서 그 소동에 서민들이 더 서러웠던 것도 몰랐을 게다.
귀 닫고 기세등등 폭주하던 윤석열차를 총선이 세웠다.
민심의 철퇴였다.
힘 빠진 대통령은 외롭다.
격전지에서 생환한 안철수·나경원·이준석은 그가 내친 이들이다.
2028년까지 대통령보다 임기 긴 여당 의원들도 호락호락할 리 없다.
보수언론도 싹 걷으라니, 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온갖 카르텔로 옥죄던 ‘줄푸세’ 입법과 ‘메가서울’은 길을 잃었다.
그렇잖아도 사후 시비 될 정책의 ‘용산 보고·결재’를
사린다는 공직사회는 국회와 여론을 더 살필 게다.
고립무원(孤立無援)과 무신불립(無信不立)과 복지안동(伏地眼動), 이 열두 글자는 레임덕 경고장이다.
눈 익은 사극에 빗대면, 사면초가가 높아 용산궁의 밤을 덮고, 넋 잃은 혼군(昏君)은 술잔만 비우고, 그 옆에서 궁 밖 나들이도 접은 중전이 한숨짓는 장면 아닐까. 지지자들까지 부끄럽게 한 2년의 자업자득이다.
대한민국엔 두 절대권력이 있다.
7000여 고위직을 임명해 국정을 총괄하고 형사소추도 불가한 ‘대통령’과 그를 탄핵하고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개헌도 할 수 있는 ‘국회
200석’이다.
총선은 그 대통령의 힘을 빼고, 야권엔 200석까지 8석을 채워주지 않았다.
서로에게 부족한 2%는 최후통첩이다.
패장 대통령은 마지막 기회이고, 국회 리더 이재명은 경세의 전략·정책·지혜를 구할 시간이다.
대통령은 비상구가 있을까. 이재명은 ‘새 이재명’으로 거듭날까. 앞으로 1~2년, 새 국회 전반기(2024~2026년)에 판가름난다.
한데, 총선 당선증 잉크도 마르기 전, 또다시 거국내각이니 개헌이니 대연정이니 말이 앞선다.
선후가 바뀌었다.
총선 표심은 이 국정 난맥의 진상을 밝히고,
검찰권·감사권·방송심의 전횡을 바로잡고, 무능한 민생 출구를 열라는 것이다.
그 결과표를 놓고 정치·헌법·대선을 논해도 늦지 않다.
잘해서 모아준 표가 아니다.
힘 받더니, 또 나무에 올라 물고기부터 찾는 야당이 될 건가. 승장 이재명은 현충원에 ‘함께 사는 세상’과 ‘민생정치’를 적고, 검찰개혁과 사회권 확장을 외친 조국은 ‘사즉생’을 다짐했다.
그것부터다.
야권은 이 의석이라면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뭘 하고 싶었을까, 이 의석으로도 문재인 정부는 뭘 왜 못했을까 반추할 때다.
거야는 어깨 힘들어가고 정당민주주의와 언로가 막히지 않게 경계할 때다.
겸손한 권력, 답 내놓는 정당만이 수권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은 하산길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더라”(노무현)던 그 길이다.
16일 윤 대통령이 ‘하나마나한 총선평’을 내놨다.
대통령은 잘못한 게 없고, 새 얘기가 없고, 협치 의지가 없었다.
더 낮게 소통·경청하자며 국무회의로 퉁치니, 기자회견을 강권한 보수논객도 손들었다.
가던 길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일 격랑이 한둘인가. 맨 앞에 ‘채 상병 특검’이
있다.
다수가 원하고, 거야는 벼르고, 여당 찬성표도 느는데, 대통령은 거부할 건가. 이 국회든 새 국회든, 화난 민심과 200석이 모이면, 윤석열의 정치는 파국이다.
선거는 세상을 당겼다 놓는다.
그새 벚꽃이 졌다.
2년 만에 권력 누수된 대통령과 화려하고 짧게 폈다 지는 벚꽃은 닮았다.
대통령은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식물대통령일까, 부부의 안위일까, 영수회담일까. 춘삼월에 벚꽃은 다시 피지만, 윤석열 정치엔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은 3년 그의 운명, 참회의 질과 속도가 가른다.
한국의 보수, 길을 잃다
한국의 보수가 갈 길을 잃었다.
보수의 이념은 실종되고, 보수적 정책은 효율성을 상실하고, 무엇이 보수 집단의 정체성인지 모호하다.
기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을 보유하였음에도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한 것은 한국의 보수가 정치적 나침반을 잃어버렸다는 분명한 징후이다.
이런 징후는 이미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집회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지만, 보수 세력은 당내 민주화를 통해 정치문화를 혁신하는 대신 과거 권위주의적 행태를
답습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거리낌 없이 거론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지금의 모습은 보수의 혼돈과 종말을 보여준다.
보수가 패배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 정당하게 경쟁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 패배는 결코 몰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해 패했다면,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성찰과 혁신을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보수가 길을 잃었다는 것은 이들에게 성찰과 혁신의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험난한 탄핵 정국의 위기에도 변하지 않은 보수가 과연 총선 실패로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만약 이번에도 서로 책임을 돌리다가 혁신의 기회를 놓친다면, 보수는 영원히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보수가 스스로 못 변한 게 큰 이유보수의 실패가 한 정당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보수의 실패는 외견상 진보의 승리처럼 보인다.
승자독식 소선거구제에서 한 정당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정당의 패배이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의 약 45%가 국민의힘 후보에게 투표했음에도 두
정당의 지역구 의석수 차이는 약 1.8배에 달한다.
국민의 의사가 기형적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제도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진영정치는 선거를 ‘제로섬게임’으로 만든다.
한쪽이 이겨도 다른 쪽에 치명적 손해가 생기지 않거나 선거 결과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한다면 패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로섬게임은 패자뿐만 아니라 승자에게도 이롭지 않다.
승자는 타협과 협력을 추구하는 대신 배제와 분열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용의 여유가 없는 것은 패자나 승자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저울질하고 균형을 맞추며 합의점을 찾아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여론을 중시하고 국민의 다양성을 높이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여러 정당 간 경쟁이 공공선을 증대한다.
정치는 결코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양극화가 심화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이익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실이라는 ‘제로섬 사고’가 대중 담론에서 점점 더 자리를 잡게 된 데 있다.
경제적 양극화, 기후변화, 인공지능(AI), 젠더 갈등, 난민 문제 등 오늘날 우리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너무도 복잡해서 어느 것도 단기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합리적 토론과 장기적 계획을 요구한다.
분열과 증오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합리적 문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특정 계층과 집단의 이해충돌과 반대의견 때문에 문제 해결 자체가 곤란해진 사회를 ‘제로섬사회’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여야가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가길 기대하는 것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보수가 길을 잃으면, 진보도
길을 잃는다.
결국 사회 전체가 길을 잃을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우선 보수가 왜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
정치평론가와 정치학자들이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겠지만, 나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했는데도 보수가 스스로 변하지 못한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한다.
변화된 상황에서 스스로 변하지 않는 가치는 타당성이 없다.
가치의 지향성을 잃어버린 보수는 단순한 이해집단으로 전락한다.
무엇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인지가 불분명하다면, 누가 보수라고 자처하겠는가? 보수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몇몇 수식어를 첨가함으로써 외관을 바꿔왔다.
‘합리적 보수’ 또는 ‘따뜻한 보수’로 변신하다가 ‘진보적 보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얼굴에 쓰는 가면이 바뀌면 인격도 달라져야 하는데, 보수의 얼굴은 언제나 구태의연했다.
제로섬 사회서 보수가 변할까?그렇다면 우리는 보수를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는가? 보수는 본래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보수는 어떤 가치를 보존하려고 하는가? 보수는 전통적으로 ‘권위주의’
‘자유주의’ ‘실용주의’로 대표된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판하며 현대적 보수주의를 정립한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게 정치는 권위이다.
버크에 의하면 국가는 결코 도덕적 청산, 국가 혁신, 급진적 혁명을 통하여 쉽게 분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 레고 블록 구조물이 아니다.
국가는 역사와 전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와 같아서 한 가닥의 당겨진 실이 전체 패턴을 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한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따라서 보수는 급진적 변화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시대가 변하면 가치와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보수는 차별금지법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변화 자체를 반대하는 듯하다.
유가적 가치가 완전히 해체된 지금 보수는, 물론 이 점에서는 진보도 다를 바 없지만, ‘권위주의’만을 답습하는 것 같다.
이준석, 나경원, 김기현처럼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가차 없이 내치는 윤석열 대통령의 태도에서 일반 국민은 권위주의의 왜곡된 실상을 본 것이다.
22대 총선 결과는 국민이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반권위주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데 권위는 없으면서 권위주의만 고집하는 보수당은 그저 ‘꼰대당’으로 각인될 뿐이다.
제로섬사회에서 한쪽이 권위주의적이면 마치 다른 쪽은 덜 권위주의적인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수의 이미지는 ‘자유주의’로 대변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윤 대통령은 가장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어떤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틈만 나면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시장경제에 기반해 성장의 기틀을 세운 어르신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 시장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국가가 자원 재분배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양극화가 일어나면서 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이롭다는 확신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차별을 경험한 사람, 교육이나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거의 없는 사람, 소수민족에 속하거나 구조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제로섬 사고가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로섬 사고는 실패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다.
보수는 언제나 실용적인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념은 설령 선명하지 않더라도 경제는 훨씬 더 잘 운용하는 집단이라고 여겨졌다.
독일 보수당인 기민당의 총리였던 메르켈은 여러 사회문제에 실용적인 정책을 통해 유연하게 대처할 때는 성공하였지만, 난민 문제를 도덕적·이념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정권을 잃었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녹색당의 정책을 과감히 수용하고, 새로운 빈곤이 출현하면 진보당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실행하고,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자유방임 경제 노선을 버리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탄력성과 유연성을 보인 것이 보수였다.
22대 총선은 이런 확신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실용주의와 거리가 멀다.
한국의 보수는 변화된 사회에서 변하지 않아 갈 길을 잃었다.
다시 길을 찾으려면 보수가 철저하게 환골탈태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제로섬사회에서 보수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