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라는 리셋 버튼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을 만날 때,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를 고집했다.
마크 주커버그의 후드티나 버락 오바마의 셔츠(회색과 푸른색 셔츠) 역시 그랬다.
중요한 건 특정 옷차림이 아니라 이들이 왜 같은 옷을 고집했는가이다.
의지력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밝힌 사람은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인데 그의 이론은 우리가 왜 강한 결심에도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늦은 밤 술을 마시는지 보여준다.

세상 모든 선택은 심리적 비용을 요구한다.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고를지 선택하는 사소한 일조차 그렇다.
선택과 판단의 심리적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은 아침이 아닌 늦은 오후다.
상쾌한 아침과 피곤한 오후, 판사의 재소자 가석방 비율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콜롬비아 대학팀의 실험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하루를 시작할 때보다 마칠 때 정크 푸드를 선택하고, 충동 구매가 잦은 이유다.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의도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되는 대로 행동하는 모드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중요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아침에 하는 공통점이 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결정의 숫자를 줄인다는 점도 그렇다.
내 경우 중요한 원고는 일어나자마자 쓰고, 허기가 질 때는 아몬드와 삶은 달걀 2개를 먹는다.
선택의 피로와 비용을 줄여 원고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

충실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특히 아침을 ‘재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아침을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정의하거나, ‘리셋 버튼’이라고 상상하면 매번 초심자의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몇 시에 일어나는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의지력 충만한 아침에 몇 분이라도 ‘정말 중요하지만 하기 싫은 그것’을 하라는 것이다.
그 하루가 쌓여 한 달, 일 년이 되면 삶이 되고 곧 태도가 된다.
좋은 선택이 좋은 삶이고, 좋은 태도가 좋은 길로 내 삶을 이끈다.

친밀한 타인이 되는 법

어떻게 하면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오롯이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나를 지키는 힘은 나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와 남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 양방향 에너지의 조화에서 나온다.
상대방에게 “오늘 뭐 먹을 거야?”라는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관계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타인에게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선 긋기’다.
미셸 엘먼은 저서 ‘가끔은 이기적이어도 괜찮아’에서 선 긋기에 대해 신발을 신고 내 침대에 올라오거나, 꽃병을 던지는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중요한 건 어떤 집에선 신발을 신고 거실에 들어와도 되지만, 안 되는 집이 있듯 ‘선 긋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다.
선 긋기는 내가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고, 없는지를 타인에게 밝히는 행위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외모 비하나 거짓말이 마지노선인 사람이 있고, 예의 없음이나 시간 엄수가 그 선인 경우도 있다.

사람들에겐 사랑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욕망, 즉 칭찬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이타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타성이 종종 ‘서운함’을 남기는 건 내 욕구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살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이타성의 이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 긋는 것’을 이기적인 것, 나만 아는 것이라는 편견을 바꿔야 한다.
선 긋기는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타인’이 아닌 ‘나’로 삶의 순서를 바꾸겠다는 자기 선언이자, 타인에게 나를 알리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너와 나는 ‘우리’로 공존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이 내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것’을 남에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쌓아온 숱한 오해를 작은 이해들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남이다.
가까울수록 ‘남’이라는 것을 때론 서늘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거리 안에서 ‘친밀한 타인’이 된다.

 ‘싫어’의 심리학

두 돌이 지난 아기가 어떤 말에도 “싫어!”를 외치는 탓에 난감하다고 말하는 하소연을 들었다.
밥을 먹으라고 해도 ‘싫어’라고 말하고, ‘그럼 먹지 마!’라고 해도 ‘싫어!’를 외치니 난감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두세 살 아이들의 ‘싫어!’는 첫 번째 자아 표현이며 호불호가 생겼다는 뜻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즈미아 간지에 의하면 아이들의 ‘싫어!’에는 나에게 지시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자아를 표현하는 일은 그것이 양육자라고 해도 타인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해야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저서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에서 아이 입장에서 ‘싫어’는 자기 영토 확보를 위한 독립 전쟁이라고 정의한다.
자아 발달의 순서상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좋아한다거나, 장래에 어떻게 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은 ‘싫어!’가 성립되고 나서야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문제는 부모가 이 시기에 “이게 좋은 거야!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고 자기 가치를 앞세우며 아이에게 ‘아니요’를 허용하지 않을 때 생긴다.
부모에게 모든 걸 의존해야 하는 어린아이 입장에서 생존과 적응을 위해 점점 주체성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다소 방임적으로 키워져 선택할 자유가 많았던 이전 세대에 비해, 요즘 아이들의 고민이 ‘왜 사는지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흐르는 것도 그런 맥락 안에 있다.

나를 사랑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싫어하는 열 가지를 적어보라고 조언한다.
자기표현의 첫 발화가 ‘좋아!’가 아닌 ‘싫어!’인 이유가 있다.
‘좋아!’보다 ‘싫어!’가 더 명료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선 몸에 좋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건강한 몸이 싫어하는 술과 담배를 끊는 게 더 중요하고, 좋은 인간 관계를 위해선 상대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게 더 현명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일단 내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싫어’는 ‘좋아’보다 온도가 높다.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법

요즘 부음 메시지를 종종 받는다.
아마 내 또래 지인들의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장례식장 앞에서 빨간색 신호등에도 태연히 건널목을 걷는 노인을 봤다.
최근 히라마쓰 루이의 책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을 읽다가 노년이 되면 눈꺼풀이 처지고 허리가 굽어 신호등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신호등은 1초에 1m로 설계돼, 넘어질까 봐 주로 발밑을 보고 걷는 노인의 걸음이 감당하기엔 짧다.

내 친구는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비해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자주 화를 냈던 노모를 치매로 의심했다.
하지만 치매가 아닌 청력 저하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보청기 착용 후, 노모의 상태가 한결 좋아졌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나이가 들어서 성격이 나빠졌다고들 하는데, 나빠진 것은 성격이 아니라 청력”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60세 이상의 노인은 높은음의 경우, 낮은음의 1.5배 이상의 음량이 아니면 잘 듣지 못한다.

노인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역시 뇌의 노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고령자는 ‘여러 번 말한 내용’은 장기기억이라고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걸 ‘최근에 말했다’는 사실은 단기기억이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노화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걸까.
우리가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실은 고령자에겐 ‘잘 들리지 않은 것’이었을지 모르다.

최근 고령의 어르신과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자신의 몸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 무릎이 있고요, 허리도 있어요. 그리고 침침해진 눈도 있어요”라고 자신의 몸들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해지지 않았을 때이다.
노인이 되어 꽃무늬 옷에 관심이 가는 것은 이미 꽃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은 이제 건강이 자신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너무 애쓰지 마라

첫째니까 무조건 잘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동생들이 보고 배운단 뜻이었다.
노력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도 너를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으니 더 분발하라는 징표였다.
그 사랑과 관심에 벅차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키웠다는 그 말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죽어라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되는 게 많다는 걸 배운 상처투성이의 성장기였다.

그런 내게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라고 말하는 문제적 어른이 나타났다.
나의 시어머니였다.
평생 ‘열심’과 ‘최선’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란 내게 그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더 놀란 건 그 말에 터진 내 눈물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거대한 안심이었다.
12월의 크리스마스는 늘 불행했다.
크리스마스에도 당선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해의 신춘문예는 또 낙방이었다.
10년째 낙방하던 신춘문예, 갚을 길이 멀어 보이는 대출금, 자주 반려되던 기획서에 짓눌려 언제든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던 내게 “너무 잘하려고, 너무 다 하려고 애쓰다 마음 다치지 마라”는 그 말은 큰 나무 밑의 그늘처럼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전판 같았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는 치열한 교육관을 가진 부모님과 달리 “그려, 안뒤야, 뒤얏어, 몰러, 워쩌” 같은 순하고 단순한 할머니의 말을 곁에 두고 산 소설가의 유년기가 등장한다.
이 아름다운 책에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20년 넘게 아흔의 시어머니에게 배웠다.
때로 격려와 기대가 자식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부담과 죄책감이 될 수 있다는 걸 통달한 어른이 주는 그 무심한 다정을 원 없이 받은 것이다.
비싸고 좋은 물건이니 아껴서 조심히 쓰라는 말보다, 깨져도 괜찮으니 마음껏 쓰라고 말하는 어른은 얼마나 희귀한가. 알아도 모르는 척, 묻지 않는 배려는 또 얼마나 귀한가.

예측 가능한 사람

반전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연애할 때 ‘반전 매력’이 있는 상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뜻밖의 매력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드러난다.
작가들 역시 극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반전 카드를 쓴다.
이때 중요한 원칙은 주인공에게 더 큰 고난과 실패를 주는 것이다.
반전은 ‘낙차’가 클수록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결코 몇 시간짜리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함’이고, 우리를 고통에서 지켜주는 것은 ‘예측 가능성’이다.
통증이 있을 때마다 환자 스스로 소량의 진통제를 투여하는 방법을 PCA(patient controlled analgesia)라고 한다.
언뜻 자유롭게 진통제를 맞게 하면 환자들이 더 많은 진통제를 찾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료진의 통제를 받으면 통증이 생긴 후에야 진통제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운이 떨어질까 봐 오히려 불안해져서 약을 더 많이 찾거나, 미리 받아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을 때 심리가 안정돼 통증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불안정한 세상의 가장 큰 안전지대는 ‘예측 가능성’이다.
엄마가 돌아올 걸 아는 아이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실패가 최종 결말이 아닌 성공의 과정이라는 걸 배운 아이는 도전을 덜 두려워한다.
이것이 안정형 애착의 첫 걸음이다.
이렇게 자란 성인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
떨어져 있어도 결국 돌아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서로 노력할 걸 알기에 인내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본 안정적인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커플들의 특징이다.
대부분 상대의 반전이 매력이 되는 시기는 관계의 초입일 때다.

불안한 아이를 만드는 지름길은 부모가 사랑을 일관성 없이 불규칙적으로 주는 것이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SNS의 ‘좋아요’처럼 언제 그것이 올지 몰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초초해지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 일관성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다.

행복의 조건

새해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이다.
개인적으로 “해피 뉴 이어”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복’이 물질적 만족에 가깝게 느껴지는 반면 ‘행복’은 좀 더 심리적 만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근거는 없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2022년을 돌이켜보면 마음이 고달팠다.
직접 불행을 당한 건 아니지만 가족과 친구의 불행과 생로병사에 괴로웠다.
친밀한 사람의 불행은 침습적이라 우리들의 행복은 나뿐만 아니라 친밀한 타인들의 행복에 철저히 빚지고 있다.
게다가 행복은 바랄수록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행복을 ‘다행’이라 바꿔 불렀고, 행복한 삶의 조건을 걱정이 적은 삶이라 정의했다.
‘좋은 일’이 많은 삶보다는 ‘나쁜 일’이 적은 삶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담담한 말 중에 ‘낫 배드(not bad)’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불행이다.
행복은 불행과 멀리 동떨어진 것 같지만 실은 짝패처럼 붙어 찾아올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골몰한다.
술과 담배를 피하고 운동을 하며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다.
행복학의 대가 조지 베일런트 박사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조건 중 으뜸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다.
시인 잭 길버트는 이 지혜를 자신의 시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회화는 ‘창작의 예술’이고, 사진은 ‘발견의 예술’에 가깝다.
흰 캔버스에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넣는 창작이 회화 작업이라면,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해 프레임에 담는 것이다.
행복은 사진 작업과 닮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이미 우리 주위에 있는 행복을 발견해 내 프레임에 담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기다리는 한 시간이 불행이 될지 행복이 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는 서류상 나이를 고쳐주지 않는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건 69세 네덜란드인이 등장한다.
자신이 느끼는 나이는 49세인데 법적 나이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이유였다.
올해부터 한국인의 법적, 사회적 나이는 ‘만 나이’로 통일된다.
사람들이 대체로 이 변화에 긍정적인 건 젊음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개인 차가 있지만 나이가 들면 체력도 기억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노인의 기억이 반짝일 때가 있다.
바로 과거를 이야기할 때다.
72년간 하버드 입학생들의 생애를 추적한 ‘그랜트 연구’에 관한 글을 읽다가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대하는 것처럼 과거를 대한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미래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처럼 노인은 과거의 불가피성을 밝혀내려 애쓰며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는 과거를 곱씹는 ‘반추’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에게 기쁨이 될 때만 과거를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회고적’이 된다는 건 멈춰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의 시간에 이르면 과거는 미래처럼 역동적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특히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 과거의 시행착오와 통찰을 보존해 젊은이의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는 미래적 욕구를 느낀다.
50대에 급격히 낮아졌던 행복도가 70대에 높아지는 것도 이런 맥락 안에 있다.

일본에는 적추(赤秋)라는 말이 있다.
붉은 가을이라는 말로, 푸른 봄을 뜻하는 청춘과 비교해 노년의 청춘을 뜻한다.
꽃이 아름다운 건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일찍 지기 때문이라는 지혜는 적추의 시절에 찾아온다.
황인숙의 ‘송년회’는 이때, 곁에 두고 보면 좋을 시다.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그게 내가 살아본/가장 많은 나이라서’

나이듦의 기술

어릴 때, 이웃집 할머니 자매 두 분 중 일곱 살 연상의 언니가 훨씬 더 젊어 보이는 게 늘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분은 자전거를 탈 정도로 건강했고, 다른 분은 기운이 없어 늘 집에 누워 계셨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엘렌 랭어의 책 ‘늙는다는 착각’에는 ‘시간 거꾸로 돌리기 연구’라는 실험이 등장한다.
이것은 70~80대의 노인들을 20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일주일간 독립적으로 생활하도록 한 실험이다.
그 시절의 뉴스와 영화를 보고, 그때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놀라운 결과가 도출됐다.
실험 전까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포기했던 독서나 관절이 아파서 하지 않았던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까지 노인들은 ‘스스로’ 그 모든 일을 해냈다.
청력, 기억력, 악력, 유연성, 자세나 걸음걸이까지 현저히 ‘젊어진 것’이다.
저자는 “노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신체가 아닌 신체적 한계를 믿는 사고방식”이라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건 아이를 늦게 낳은 여성이 아이를 일찍 낳은 여성보다 평균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이와 생활하며 젊고 건강한 신호에 더 자주 노출되기 때문이다.
연상 연하의 배우자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무의식중에 내뱉는 “아이고, 허리야~” “이제 늙었나봐!” 같은 말 역시 우리 뇌에 쌓여 고스란히 각인된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한 탓에 20대에는 취업, 30대에는 결혼,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한다.
하지만 신체 나이에 맞는 올바른 생활방식과 태도가 있다고 믿으면 60대와 70대에 남는 건 은퇴와 노화뿐이다.
그러나 노화와 퇴화는 다르다.
기억력 퇴화 역시 그동안 쌓인 데이터가 젊은 시절에 비해 많아서 생긴 정체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태도다.
노년의 기억력이 좋아지려면 늘 먹던 것, 가던 곳을 갈 때가 아니라 새로운 음식을 먹고, 가보지 않은 곳을 갈 때다.
구부정해지려는 마음을 한 번 더 펴는 것 말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하여

‘이제는 계란부터 먹으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냉면 안의 계란, 튀김 세트 속에 새우튀김처럼 좋아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었던 내가 이제 그 순간의 행복을 미루지 않고 살겠다는 이야기였다.
“모둠 초밥을 먹는다면 이제 참치 뱃살부터 먹으리~”라는 선언으로 끝나는 이 칼럼을 읽은 친구에게 “그냥 섞어 먹어! 배고플 땐 노른자, 배부를 땐 흰자랑~!”이라는 메시지가 와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문요한의 책 ‘오티움’에는 심리학자 대니얼 네틀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등장한다.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건강이나 가족 관계, 돈, 지위가 아니라 ‘현재의 행복 지수’라는 것이다.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가 미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저자의 따르면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 역시 녹슬며 행복은 우리가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행복이 ‘세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심리학의 지혜를 담은 좋은 처방이다.
하지만 요즘의 소확행은 자칫 광고업계의 천재적인 마케팅 용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긴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과 쾌락은 분명 다르다.
사랑하는 아이와 실컷 놀아주고 찍은 사진은 언제 봐도 즐겁다.
하지만 한밤의 라면과 치킨은 그 순간 짜릿하지만 아침에 부은 얼굴이 보여주듯 지속 가능하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해로운 행복은 손쉽게 얻는 특징이 있다.

계란부터 먹겠다는 말을 선언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친구의 말에 웃었지만 나는 행복이 일종의 ‘자기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닌, 지금 당장 행복해지겠다는 결심 말이다.
지금 손에 쥔 커피 한 잔에서 느끼는 따스함과 향기에 행복해지는 건, 곧 봄이 올 거란 예감 때문이다.
아직 피지 않았어도 곧 꽃이 필 것을 기대하는 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

유모차와 개모차

아픈 아버지를 더 잘 돌보기 위해 동생이 운영하는 소아과 근처의 요양원을 선택했다는 편집자가 얼마 전 아버지를 보살피러 근처에 갔다가 본 풍경을 말했다.
동생의 소아과 앞으로 석 대의 유모차가 지나가길래 살펴보니 그 안에 아기가 아닌 강아지가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줄어든 어린이 환자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동생 얘길 하다가 그녀는 10년간 폐업한 동네 소아과가 여럿인데 그 자리마다 요양원이 들어섰다고 말하며 허탈해했다.
애견박람회장에서 “개 같이 벌어서 개한테 쓴다!”는 플래카드를 보고 애완의 시대에서 반려의 시대로 변했다는 걸 실감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엔 24시간 애견 편의점에 이어 강아지 모발건강까지 챙기는 토털 애견 뷰티숍이 생겼다.
‘우리 집 막내’라는 키워드를 치면 아기보다 강아지가 더 많이 나온다는 빅 데이터 전문가의 말에 놀란 게 3년 전이다.
며칠 전에는 유모차보다 개모차 판매율이 더 높다는 기사를 읽었다.
강아지는 마음으로 낳아 지갑으로 키운다는 우스갯소리 뒤에는 아이를 낳아 학원 뺑뺑이를 돌며 맘고생 하느니 반려동물과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이제 아이가 채워야 할 정서적 공간은 강아지가, 아이가 사라진 물리적 공간은 아픈 노인의 요양원이 채운다.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의협 회장이 요즘 노인은 건강해서 의사가 많이 필요 없고, 지역에는 오히려 환자가 없다고 설득하는 기사를 봤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지역에 환자가 없는 게 아니라 많은 환자들이 KTX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것이고, 노인이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진료를 받아서 만성질환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는 동네 가정의학과에 갔다가 “요즘에는 절대 아프면 안 됩니다!”라는 위로와 충고 사이의 말을 들었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간만에 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발견했다.
강아지일 줄 알았는데 아기가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는 걸 보며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생각했다.
분명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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