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_영남무악(嶺南舞樂)
바람을 불어 넣은 관악기의 지속음이 춤의 현재진행형을 가능케 한다.
이 지속음을 좀 과장한다면, 지하철 환풍구 바람 같다.
훅하니 올라오는 바람에 치마를 쓸어내리면 ‘7년 만의 외출’의 매릴린 먼로가 되고, 저절로 팔이 들리면 승무의 명인이 되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게 만드는 게 삼현육각이다.
11대 무업을 잇는 정영만 일행이 마을에 들어가며 매구(풍물)를 울리고 있다.
꽹과리 정영만(인간문화재), 무녀 정은주(장녀), 장구 이현호(제자), 북 정승훈(막내), 태평소 정석진(장남)이다.
‘라운드테이블’ 이진환 제공
조선 시대 한양에서 부산포를 최단 거리로 가는 가장 높고 험한 고개는? 정답은 문경새재다.
이 고개를 굽이굽이 넘는 한양과 부산포 간 천릿길은 조선왕조가 의주로(義州路) 다음으로 중시했던 영남로(嶺南路)다.
왜(倭)로 내려가는 조선통신사의 길이었으며, 괴나리봇짐의 선비들이 오르던 과거길이었다.
당연지사 최단 거리가 필요했었다.
이 첩경을 막아선 험준한 백두대간, 그래서 일찍이 조령(鳥嶺, 문경새재)이 개척되었고, 조령 이남을
영남(嶺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즉 영남무(嶺南舞)란, 문경새재 아래 경상도 땅의 춤을 일컫는 말이다.
옛말로 ‘호남은 소리요, 영남은 춤’이라 했듯, 영남의 최고 명물 중 하나가 춤이다.
조령에서 조선 시대로 드론을 띄운다면, 영남로가 63읍을 통과할 때 고을고을에 춤판이 찍히고 있을 거다.
이 질펀한 길이 경상좌도(낙동강 동편, 한양에서 볼 때 좌측)의 종점에 밀양, 양산, 동래의 춤사위를 퇴적하였다.
또한 김천에서 3번 국도로 빠져나온 경상우도(낙동강 서편)의
아랫녘 진주, 사천, 고성, 통영에 장쾌한 춤이 비옥한 삼각주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영남은, 우도건 좌도건 춤이라면 “우(右)하니 몰려와 좌(左)하니 빠져나간다.
” 춤을 추기 위해 계(契)를 맺었고 봄이면 화톳불을 피우고 탈을 쓰고 뛰어나갔다.
가을이면 “덩!”하니 북을 울려놓고 그 동심원 속으로 솟구쳤다.
어디 춤꾼뿐인가. 구경꾼도 제 그림자까지 데리고 뛰어드니, 마침내 춤이 ‘천지빼까리’(온세상에 널려 있음)로 꽉 차는 땅, 그곳이 영남이다.
오늘도 영남 땅 곳곳에서 춤판이 설 것이다.
이쯤에서 한 문제를 더 내보자.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은? 내가 들은 정답은 “해삼에 맨 처음 입댄 놈”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문제 낸 이가 “쳐다봐라 처먹게 생겼는가”하며 해삼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지만, 생겨도 참 흉측하게 생겼다.
그러니 맨 처음 집어 먹은 자, 얼마나 간이 큰 사람인가. 30년 전, 통영 바다에 걸터앉아 정영만(1956년생)의 바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바다, 듣기만 해도 낭만적인 곳이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판자 한 장 밑이 지옥”이라 한다.
그 말도 부족하여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라고 말한다.
이 위태로운 삶을 위로하는 게 굿이고, 이를 주관하는 이들이 세습무였다.
‘찬물에 기름 돌 듯’ 따돌려졌지만, 비린내 나는 선창을 이해하는 실사구시의 지식 집단이요, 경건한 사제 집단, 대물린 음악 집단이었다.
정영만은 3살 때 강보에 싸여 굿을 교습하는 신청(神廳)에 건네졌다.
스승들은 모두 친인척이지만, 언제나 회초리가 먼저였다.
통제영 악사의 후예인 스승들의 산수계(山水契)는 모이는 순간 축제가 되었다.
6살에 산수계에서 승무를 추었고, 8살 때는 이미 굿판의 피리로 소문이 났다.
충렬사나 제승당에서는 충무공 제례악을, 한산대첩제에서는 대취타를 연주했다.
밤이면 요릿집에서 춤 반주를 했고, 할아버지를 따라 마산과 부산까지 놀음을
나갔다.
도무지 학교에 다녀올 여가가 없었다.
어릴 땐 “새끼무당”, 커서는 “무당 새끼”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신청도 헐렸다.
무당이라고 몰매를 맞았고, 손가락질은 꿈속까지 쫓아왔다.
몸서리치며 버티다 굿을 떠났다.
점원, 선반공, 선원, 배 기관장, 택시기사로 전전했다.
개인택시로 기틀을 잡던 1987년, 가문의 굿이 국가무형유산 남해안별신굿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일부터 한 분씩 세상을 떠났고, 모두의 마지막 말은 “너밖에 없다”였다.
자신도 이명처럼
피리 소리가 귓전을 돌았다.
결국 유턴하여 개인택시를 판 종잣돈으로 굿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구음(口音)은 춤 길을 잘 인도한다.
구음은 “나르디 나니낫…”, 특정한 가사 없이 춤 반주에 얹는 소리다.
징소리로 춤꾼의 발밑에 장단을 고여주고 목소리로 춤의 각본을 그려낸다.
‘라운드테이블’ 이진환 제공
1993년 대전 엑스포 놀이마당 ‘열림굿’으로 굿의 현존을 알렸고, 갯마을을 설득해 다시 굿을 하게 했다.
그러나 악사가 없어 왼손은 징, 오른손은 피리를 불어야 했다.
“비디오 볼래?” 만화영화로 알고 달려온 삼 남매(은주·석진·승훈)에 굿 비디오를 보여줬다.
제자가 되겠다고 맹세한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손님처럼 떠나갔다.
아버지와 주소가 같아 달리 갈 곳 없는 삼 남매만 어쩔 수 없었다.
큰딸이 녹화해 애지중지하는
에이치오티(HOT) 비디오 10개에 모두 굿을 녹화해 닳도록 틀어줬다.
그렇게 일가족을 끼고 오로지 굿으로 직진하였다.
30년이 흘렀고, 주소가 달라진 삼 남매가 한 무대에 섰다.
2023년 8월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전’, 정은주는 해금, 정석진은 피리, 정승훈은 대금으로 나섰다.
첫 무대에서 산조, 삼현육각, 시나위까지 기악의 철인삼종을 단번에 통과했다.
그리고 누나가 일어서서 무가를 부르고 두 동생이 타악, 기악, 구음으로 바라지했다.
불행했던 ‘조상 찬스’를 놓치지 않고 단독 드리블과 삼각 패스로 판을 막았다.
조상들이 아버지의 잔소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삼 남매에 강림한 모양이었다.
2023년 12월, ‘넋 노래 정영만’이란 제목으로 ‘신청’과 ‘산수계’ 시디(CD) 2장에 무무악(舞巫樂) 10곡을 녹음하였다.
11대 무가를 잇는 정영만이 12대가 된 삼 남매, 그리고 진득한 제자들과 함께했다.
괄목할 곡이 영남의 ‘삼현육각’이었다.
좌고, 장고, 피리 2개, 대금, 해금으로 구성되는데, 악기가 모두 대나무여서 ‘대풍류’라고도 한다.
바람을 불어 넣은 관악기의 지속음이 춤의 현재진행형을 가능케 한다.
이 지속음을 좀
과장한다면, 지하철 환풍구 바람 같다.
훅하니 올라오는 바람에 치마를 쓸어내리면 ‘7년 만의 외출’의 매릴린 먼로가 되고, 저절로 팔이 들리면 승무의 명인이 되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게 만드는 게 삼현육각이다.
“영남무란 무엇인가?” 시디를 듣다 자문했다.
사실은 여태 제대로 된 춤 음악이 없었다.
동래와 진주의 삼현육각이 오래전에 그쳤기 때문이다.
결국 호남과 경기의 음악에 맞추면서, 영남무라 말하길 서슴지 않았던 거다.
이런 석연치 않은 때, 산수계의 음악이 되살아났다.
1932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산 동래, 마산, 진주, 고성, 통영 등 기타 각지를 망라한” 음악이다.
정영만 일가가 30년 수공으로 찌릿찌릿한 소리를 내니,
영남무에 눈부신 축복 아닌가. 헤드폰을 벗고 부산의 영남춤축제에 판을 제안하였다.
2024년 8월3일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영남무악’을 올렸고, 9월11일 남산국악당에서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작으로 공연했다.
삼현육각과 더불어 정영만의 ‘구음 시나위’가 압권이었다.
구음(口音)은 “나르디 나니낫…”, 특정한 가사 없이 춤 반주에 얹는 소리다.
구음이 좋으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춘다” 했다.
정영만의 묵직한 남 저음의 목청으로 춤을 감싸는 구음은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소리다.
이내 청을 올리면, 빠져나가지
못한 슬픔이 희게 번져 마블링된 음의 육질이 드러난다.
그 흰 소금기가 삼투압처럼 관객의 심금을 심하게 끌어당겼다.
행여 이 말을 의심커든 ‘2024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에 오시라. 10월5일 ‘영남무악’이 공식 초청작으로 해외 마케터 앞에서 공연된다.
안다고 고개 들면 안 되는 것처럼, 그간의 갈채에 자만하지 않겠다.
전통 춤판의 성패는 당일 추임새 좋은 관객을 만나는 게 관건이다.
춤의 시간을 영원한 현재로 고정하는 “얼씨구!”가 폭죽처럼 터지게 하소서.
옛적 영남 선비들은 과거 보러 갈 때 꼭 조령(문경새재)을 넘었다.
같은 고개라도, 죽령을 넘지 않았다.
죽죽 미끄러지니까. 추풍령은 더욱더 피했다.
추풍의 낙엽이 되니까. 그들은 문경(聞慶)을 지나 새재를 넘었다.
‘들을 문(聞)’, ‘경사 경(慶)’, 급제라는 경사스러운 소리를 듣기 위한 기원이었다.
영남무악을 위해 문경을 거쳐 내려가야겠다.
가다가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에서 정영만이 펼칠 선율의 그물을 헤아리리라. “털 하나 안 빠지게 꽉 찬 소리”, 거기에 얹힐 찰진 구음을 기원하리라.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학대 피해 여성들 위로한 말리, ‘올해의 고양이’ 되다
[애니멀피플]
쉼터 여성들 치유 도운 7살 턱시도 고양이
고양이보호협회 유튜브 갈무리
“‘고양이 ‘말리’는 학대 받은 여성들의 얼굴을 미소 짓게 합니다.
말리는 작은 기적이에요.”
학대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에서 생활하며 여성들을 위로한 고양이가 수천 마리 경쟁자를 제치고 영국 ‘2024 올해의 고양이’(National Cat of the Year 2024)에 선정됐다.
18일(현지시각) 영국 가디언은 인신매매 등 다양한 학대 피해를 겪은 여성들을 위로한 고양이 ‘말리’가 “공감의 재능”을 인정 받아 영국 ‘고양이보호협회’(Cats Protection)가 선정한 올해의 고양이에 오르게 됐다고 보도했다.
고양이보호협회는 1927년 세워진 영국 최대 고양이 보호단체로 해마다 올해의 고양이를 선정하고 있는데, 시상식에는 수천 마리의 고양이들이 수상을 위해 응모하고 있다.
보도를 보면, 7살 수컷 ‘턱시도 고양이’(흑백 털을 지닌 고양이) 말리는 지난 2020년부터 런던의 ‘카리타스 바키타 하우스’에서 여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카리타스 바키타 하우스에는 11개 나라에서 온 11명의 여성이 생활하고 있는데, 말리는 이곳에서 지내며 여성들의 심리적인 안정을 돕고 있다.
쉼터에 오기 전 말리는 한 가정에서 지냈는데 함께 생활하는 고양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고양이보호협회 유튜브 갈무리
고양이보호협회 유튜브 갈무리
쉼터 대표인 캐런 앤스티스는 “이곳에 오기 전 말리도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알아차리는 것 같다”며 “여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며 조심히 다가와서는 사람의 무릎에 앞발을 부드럽게 올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한 피해자는 말리와 소통하면서 점차 우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올해의 고양이상은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시민들의 공개 투표로 4마리의 최종 후보를 선발하는데, 말리는 ‘놀라운 고양이’ 부문에 꼽혔다.
이 부문은 인간과의 유대감으로 ‘특별한 사랑’을 보여준 고양이를 선정한다.
이후 말리는 유명인사와 수의사,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통해 최종 수상자로 정해졌다.
말리에게는 올해의 고양이 상패와 200파운드(약 35만원) 상당의 반려동물용품 상품권이 주어진다.
앤스티스는 “말리는 공감이라는 놀라운 재능으로 수많은 여성들의 심리적 회복을 도왔다”며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청각 장애를 가진 보호자에게 집 주변의 소리를 알려준 고양이 ‘제비’가 올해의 고양이에 뽑힌 바 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우리 엄마가 ‘백종원’으로 변했어요~
“엄마 손맛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엄마의 손맛을 보고 싶다고~”
작은 언니가 추석 음식을 먹다가 말했다.
환갑 된 딸이 팔순을 넘어 구순으로 치닫고 있는 엄마의 음식 타박이라니, 웬 ‘후레자식’인가, 싶지만 엄마의 손맛은 확실히 변했다.
장금이에서 백종원으로.
사실 장금이는 뻥이다.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요리 실력은 어린 내가 봐도 그냥 보통이었다.
특별히 게으르거나 요리에 무관심한 엄마도 아니었지만 요리를 전업주부의 괴로운 숙명으로 받아들였음은 틀림없다.
성의 없어 보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담긴 내 도시락을 볼 때마다 느꼈다.
이해한다.
이번 연휴에 가정 경제와 건강 관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외식과 배달식과 집밥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주부로서 충분히 힘들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엄마는 나이 들어 기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요리에서 점점 손을 뗐다.
가끔 엄마가 어린 시절 해줬던 음식이 그립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메뉴도 안떠오르는 거 보니 엄마의 필살 요리들은 맛본 지 오래된 것 같다.
다만, 엄마가 지금까지도 열의를 불태우는 음식이 있으니 김치다.
불면 날아갈 듯 깡 마른 데다 양쪽 고관절에 철심을 박은 엄마는 보행보조기가 필요한 처지가 됐음에도 지금도 동네 슈퍼에서 배추나 무를 할인 판매하면 갑자기 천하장사로 변신한다.
보행보조기의 장바구니 같은 데 배추 두세 포기를 담아서 끙끙대며 집으로 돌아와 맹렬해진다.
또 다치면 어떡하냐고 딸들이 걱정을 하고 화를 내도 소용 없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물김치, 오이소박이, 동치미 등등 철마다 나오는 재료로 김치를 하고 어김없이 그 다음 날은 몸살이 난다.
그리고 며칠 뒤 김치를 가져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때? 맛없지? 이번에는 망친 거 같아”라고 던지면 “아냐. 엄마 엄청 맛있어, 00이가 맛있다고 난리야”라는 답변을 끝으로 엄마의 김치 제작 전 공정이 마무리된다.
문제는 상큼하고 깔끔했던 엄마의 김치 맛이 사 먹는 김치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들면 둔해진다는 미각 탓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사는 큰언니가 진단하는 문제의 원인은 유튜브였다.
‘그놈의 스마트폰’이 문제인 건 애나 노인이나 다 똑같은 것이다.
아빠와 달리 신문물 따위 멀리하고 살던 엄마는 동년배 중에서도 거의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쓰기 시작한 동시에 24시간 활용 체제가 됐다.
외롭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거동도 불편한 노인들에게야 말로 스마트폰은 삶의 동반자라는 걸 엄마를 보고 알게 됐다.
입문은 예의 유튜브 가짜뉴스였다.
동년배 친구들이나 이모가 보내준 가짜뉴스의 신세계를 발견한 엄마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랍 통치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더라” 따위의 충격 뉴스들을 딸들에게 전하다가 미동도 안 하는 딸들을 보며 이내 시들해지더니 트로트에 심취했다.
손주와 누가 더 좋냐고 하면 분명 고민에 빠졌을 정동원 칭찬에 입 마를 날이 없던 트로트 사랑도 식을 무렵 엄마가 옮겨간 게 요리 유튜브였다.
특정 유튜브를 구독하거나 즐겨보는 게 아니라 김치와 갈비 같은 명절 음식을 검색해 각종 레시피 유튜브들을 섭렵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엄마는 나이 들면서 요리하기를 귀찮아하기도 했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뇌리에 새겨져 있던 레시피가 희미해졌고, 둔해지는 미각에 대해서도 불안감이 생겼기 때문일 터이다.
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엄마는 김치를 하거나, 자식들 손에만 맡겨두고 싶지 않은 음식을 해야 할 때면 하루 종일 관련 레시피 유튜브를 수십 개씩 찾아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음식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레시피를
습득하게 되고, 요즘 선호되는 단 맛, 우리 식구들 기준으로는 이전의 엄마 음식에 없던 들쩍지근한 맛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백종원 프랜차이즈 식당의 음식과 비슷해지는 ‘고향의 맛’은 서운하다.
김장을 할 때마다 엄마가 더 늙기 전에 엄마의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받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냥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전수받았다가는 백종원 식당에 납품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고 허약해진 엄마가 자식들 걱정을 무릅쓰고 해주는 김치를 아직 먹을 수 있다니, 복 받은 딸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유튜브로 가짜뉴스도, 트로트도 아닌 요리 레시피를 뒤지는 80대 중반의 엄마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써놓고 보니 지상 최고의 엄마인데 왜 나는 전화를 안 해서 늘 엄마를 열 받게 하는가.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를 쓴 우에노 치즈코는 부모가 죽을 때 옆에서 사랑한다고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 부모 생전에 사랑과 감사를 충분히 전하라고 강조한다.
늙은 엄마한테 자주 전화합시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늙는 속도 늦추기, 나이 상관없다…저속노화 식단에 빠진 2030
이예림 제공.
프라이팬에 식용유 대신 올리브유를 살짝 두른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가지와 닭가슴살을 가지 겉이 그을릴 정도로 중불에 볶는다.
굴소스로 간을 맞추고 설탕 대신 알룰로스를 넣으면, 직장인 이예림(25)씨의 저속노화 음식, ‘가지 닭가슴살 볶음’이 완성된다.
중화요리에 가까운 맛을 느낄 수 있어 병아리콩밥이나 잡곡밥을 먹을 때 반찬으로 곁들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저속노화 식단’ 유행이 거세다.
노년 내과 의사인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지난해 초 엑스(X·옛 트위터)에 렌틸콩과 귀리, 현미로 만든 밥을 저속노화 식사법이라며 소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정 교수가 지난달 만든 저속노화 식단 커뮤니티에는 두 달 새 2만5천여명이 참여했다.
커뮤니티 멤버들은 각자가 만든 저속노화 식단 사진을 찍고, 들어간 식재료 목록을 공유한다.
이씨는 “건강한 식단 하면 예전에는 중년·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종합편성채널 먹거리 프로그램이 떠올랐는데, 최근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저속노화 식단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올 법한 사진이 많아 트렌디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밋밋한 ‘건강식’이, 자랑 삼고 싶은 2030의 ‘힙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저속노화 식단은 노화를 촉진하는 음식을 ‘줄이는’ 데서 시작한다.
식단에서 줄여야 할 음식은 설탕과 같은 단순당, 흰 쌀밥과 빵 등으로 대표되는 정제 곡물, 붉은 고기와 동물성 단백질 등이다.
튀김류, 버터, 마가린, 치즈 등도 줄여야 할 식단이다.
대신 푸른 잎 채소와 통곡물, 콩류, 견과류, 베리류 등을 더 섭취할 것을 권한다.
다만 저속노화식단에 꼭 이런 재료만 써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건 아니다.
‘덜 엄격하다’는 점은 건강한 식사에 들어서는 문턱을 낮춘다.
저속노화 식단을 실천 중인 이들은 흰 쌀밥을 콩이 들어간 잡곡밥으로 바꾸거나, 당이 적은 그릭 요거트와 견과류 등을 함께 먹는 식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5월부터 저속노화 식단에 합류한 직장인 박상진(32)씨는 “흰 쌀밥 대신 잡곡밥을 먹게 된 게 제일 큰 변화”라며
“잡곡밥에 상추와 오이, 두부, 적양배추 등을 넣고 간장과 섞어 먹으면 편하다”고 했다.
이예림 제공
저속노화 식단을 시작한 20∼30대들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다.
직장인 지현주(26)씨는 “7월 건강검진 결과를 보니, 공복 혈당이 약간 높게 나와 식단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요즘 20대도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이전 세대보다 높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주변에서도 혈당 조절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20∼30대 만성질환 환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2022년 20대 당뇨
환자가 2018년보다 47.7% 늘어 전체 연령대에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지씨는 아침에는 그릭요거트에 시중에서 파는 견과류 한 봉을 잘게 부숴 섞어 먹는다.
점심과 저녁은 양배추 안에 주먹밥과 쌈장을 넣은 ‘양배추 참치 쌈밥’, 잡곡밥에 야채와 오리고기 정도를 넣는 ‘오리고기 포케’ 등을 주로 먹는다.
채소는 ‘어글리 어스’라는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업체가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못난이 채소 목록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받아 보는 서비스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못생겼지만 건강한 채소를 구할 수 있다.
박상진 제공
식단을 바꾼 이후 몸에 변화가 나타났다.
직장인 최재훈(37)씨도 음료수나 빵 등 가공식품과 흰 쌀밥을 줄이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저속노화식단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몸의 변화는 컸다.
최씨는 “가족력으로 당뇨가 있어 혈당 조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미국과 한국 의사들 영상을 보고 (저속노화 식단을) 시작하게 됐다”며 “흰 쌀밥을 안 먹으면서 낮 시간대 식곤증이 사라졌다.
저속노화
식사를 멈췄다가 해보니 그 차이를 더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간의 여러 건강 식사법에 견줘서도 저속노화 식단이 특히 인기를 끄는 배경엔 ‘공유’가 있다.
이예림씨는 친구와 ‘원물(가공을 많이 거치지 않은 음식) 모임’을 꾸려 서로 식재료를 선물하거나 새로운 조리법을 시험해 본다고 했다.
박상진씨는 블로그에 식단 일기를 올린다.
“다른 사람이 뭘 먹는지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데, 내가 먹고 맛있었던 걸 다른 사람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이렇게 한
달 동안 뭘 먹었는지 기록하고 공유해두면 추억하기도 좋은 것 같고요.”
박상진 제공
비교적 간단한 조리법에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저속노화식단에도 벽은 있다.
각자의 저속노화 레시피를 소개한 청년들이 전한 가장 큰 어려움은 ‘현실’이다.
일과 약속에 쫓기다 보면 식재료를 사서 조리하거나 끼니를 챙기는 행위 자체가 쉽잖다.
“최대한 애쓰고 있긴 한데 매번 지키지는 못해요. 약속 있으면 술과 고기도 먹고요.” 박씨가 말했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통계를 보면,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결식률은
2013년 23.9%에서 2022년 34%까지 올라갔다.
특히, 2022년 조사에서 20대(19∼29살)는 10명 중 6명(59.2%)이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그나마 꾸준히 건강한 밥을 챙길 수 있는 각자의 비법은 뭘까. 박씨는 “직장과 집이 가깝고 퇴근이 늦지 않다”는 ‘축복 같은 상황’을 전제로, 냉장고에 1주일 치의 식재료만 넣어두는 것을 추천했다.
“냉장고에 일주일 치 식재료만 넣어두고 오늘은 뭘 해먹고 내일은 뭘 해먹고 하는 계획이 머릿속에 들어오게 한다.
이렇게 먹어서 냉장고 식재료를 다 소진해야겠다고 계획을 짠다”며 “그렇게 일주일 치 식재료를
딱 해치우면 미션을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지현주씨에게도 식단의 단위는 일주일이다.
“일주일 치 먹을 양을 준비해 소분해 놓고 (2가지 메뉴를) 월·수·금과 화·목 식으로 번갈아 가며 식단을 짜는 게 식단을 지속하는 데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임재희 기자 limj@hani.co.kr 고나린 기자 me@hani.co.kr
꼬마물떼새, 호랑지빠귀, 등포풀…‘이젠 우리도 서울 시민’
[애니멀피플]
서울시, 16년 만에 보호 야생생물 55종으로 재지정
위키피디아 코먼스
서울 영등포에서 처음 발견돼 지명과 연관된 이름이 붙은 ‘등포풀’, 서울 내 도시공원에서 종종 발견되는 겨울철새 ‘홍여새’ 등이 서울시 보호 야생생물에 새로 포함됐다.
서울시는 기후와 서식 환경 변화를 고려해 야생생물 55종을 ‘서울시 보호 야생생물’로 지정한다고 18일 밝혔다.
서울시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야생생물법)과 ‘서울시 야생생물 보호 밎 관리에 관한 조례’에 근거해, 멸종위기에 있거나 개체 수가 감조하는 종, 일정 지역에 국한하여 서식하는 종, 학술적·경제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종 등을 보호 야생생물로 지정하고 있다.
서울시는 2000년 서울오갈피 등 35종, 2007년 한국꼬리치레도롱뇽 등 14종을 지정해 지금까지 총 49종을 지정·관리해왔는데, 이번에 그간의 기후 및 서식환경 변화 등을 고려해 재지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서울시 보호 야생생물 서식실태 조사 및 재지정 연구’를 실시했고, 서울지역에 출현했던 생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분석해 지정기준 및 원칙을 마련했다.
이번에 새로 지정된 야생생물은 총 14종(식물 3종, 조류 3종, 양서파충류 4종, 곤충 1종, 어류 3종)으로, 식물로는 청계산에서 드물게 보이는 개감수와 여로, 밤섬에서 관찰되는 등포풀이 선정됐다.
등포풀은 영등포에서 처음 발견돼 지명과 관련한 이름이 붙었다.
한강 밤섬에 드물게 분포한다.
조류는 서울의 하천 건강성을 나타내는 꼬마물떼새, 산림생태계 다양성을 대표하는 호랑지빠귀, 서울 내에서 개체 수가 줄고 있는 홍여새가 포함됐다.
양서·파충류는 서식지 파괴 또는 기후변화로 개체 수 감소 가능성이 큰 참개구리, 청개구리, 한국산 개구리와 아무르장지뱀이 선정됐다.
어류는 서울이 모식산지(처음 표본을 채집한 지역)인 각시붕어, 한강에서만 제한적으로 서식하는 두우쟁이, 서울이 분포 최북단인
좀구굴치가 선정됐고, 곤충은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이 감소하며 개체 수가 감소 중인 꼬리명주나비가 선정됐다.
기존에 서울시 보호 야생생물이었으나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한 청호반새, 더는 서울에 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실뱀 등 8종은 보호 야생생물에서 해제됐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