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립박수를 쳐야 하는 이유

제는 가족들과 함께 울산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1부에서는 사라사테와 라벨의 집시 풍 음악을 요즘 왕성한 음악적 성과를 낸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씨가 협연을 했고, 2부에서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바탕으로 발레 음악으로 변신시킨 로디온 셰드린(Rodion Shchedrin)의 <카르멘 모음곡> 공연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만족했습니다.
지금 바이올린을 막 배우고 있는 아들, 피아노를 배운 적 있는 아내와 딸 모두가 즐거워했지요. 그런데 정작 공연이 끝날 때 기립박수를 보낸 건 음악 무학(無學)의 저 뿐이었습니다! 하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자기가 철학하는 것을 모르는 정신의 숨은 형이상학 연습"이라 말한 적이 있고 니체는 "음악 없는 삶은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고 했었죠. 그런 점에서 음악을 잘 모르는 저는 뭔가 모자란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제 주전공이 예술철학(미학)인데, 아쉽게도 음악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이 글 역시 연주된 음악에 대해서라기보다 공연문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니체

김계희 바이올리니스트가 울산시향과 협연한 두 곡도 좋았지만, 앙코르로 연주한 무반주 독주곡도 무척 좋았습니다(기억력이 나빠져서 제목은 모르겠군요). 그녀의 능숙하면서도 정열적인 연주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선지 위의 앙상한 음표 속에

저런 섬세하고 복잡하고 화려한 감정들이

들어 있다니...

음악은 최고의 추상적(수학적) 기표를 가지고

가장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구나!'

2부 공연도 훌륭했습니다.
<카르멘>의 줄거리를 중간중간 정아름씨(김수진 작가 대본)가 맛깔나게 낭독해 준 것도 흥미로웠고, 특별히 타악기 연주 부분이 원곡인 비제의 <카르멘>에 비해 많은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타악기의 비중이 높은 이유로, 처음에는 '쇼스타코비치 이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작품이어서, 즉 러시아 음악의 특징인가 추측해 보았는데, 나중에는 셰드린이 '발레음악'으로 만들었기에 타악기를 적극 사용한 것이라 보았습니다.
춤 동작을 위한 박자와 리듬에는 타악기만한 악기가 없기 때문이죠. 발레의 나라인 러시아의 음악에 타악기 사용빈도가 높은 것도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지요.

기대 이상의 공연이었고 배움의 즐거움도 컸던 공연이었습니다.
관객석의 분위기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음악에의 집단적 몰입도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몰입 실패는 관객석의 소음이나 공연 도중 퇴장하는 일 등으로 간단히 확인 가능하죠) 그런데 1부 공연이 끝나고 김계희씨의 인사가 있었는데, 아무도 기립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혼신의 힘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무대에서 펼쳐낸 예술가에게 조금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저만 홀로 기립박수를 치는 게 조금 어색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습니다.
2부 공연이 마음에 들면, 그땐 꼭 기립박수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김계희 바이올리니스트, 출처: 울산시향 홍보자료

그런데 2부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위기상 관객 만족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독일 음악홀과는 너무 달랐지요. 문화적 차이, 즉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서양과 소극적인 동양 문화의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서양 문화가 벌써 100년 넘게 뒤섞였습니다.
서양 클래식 음악 연주 부문에서 조성진, 임윤찬 같은 이들은 세계 정상에 올라와 있죠. 클래식 음악 공연 문화가 서양 것이라 하더라도, 벌써 관객 문화도 앞서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꼭 기립박수를 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무대에서 수고한 예술가에게 관객이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표현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매체 기술의 발달로 어릴 때부터 숱하게 서양 문화를 접하는 우리가 그 문화를 모를 리 없습니다.
다만 습관이 안 들어 어색한 것뿐이죠. 새로운 공연감상문화를 창작하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나서 박수를 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연 무대에서 애를 쓴 사람들이 버젓이 내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죠. 물론 최악의 공연이었으면, 박수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관객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웬만한 공연이라면 수고했다는 의미로 박수 치는 게 예의일 테지요. 더구나 감동이 있었거나 배움이 있었다면, 기립박수를 쳐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자신과의 약속대로 2부 공연이 끝났을 때, 몇백 명의 관중 가운데 '홀로'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무수한 타인의 시선이 강하게 의식되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무대에 올라 (철학) 강연을 해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약간의 용기가 요구되는 관객의 호응이 무대에서 용을 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을 불어넣는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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