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by 김동규 

칠 전 취업을 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는 슬쩍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픈 욕망을 내비쳤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높은 자리, 그건 그이만의 욕망의 대상은 아닐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르고픈 자리이겠지요. 직업에 귀천이 없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일반화된 지 오래입니다만, 여전히 사회는 권력이 집중된 피라미드적 위계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그 구조는 사회적 효율성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구조적 불합리성을 혁파하고픈 욕망을 갖기보다는 현 구조에서의 성공을 원합니다.
즉 낮은 자리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런 위계구조는 역사상 숱한 혁명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나 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두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는 미끼이고 다른 하나는 득위입니다.
살다 보면 성공을 보장할 것 같은 것들을 만납니다.
대개 미끼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 우리를 사로잡아 갈취하는 미끼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미끼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건 곧 욕망을 부추기는 누군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득위(得位)입니다.
이건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선생은 <주역>을 해설하면서 득위라는 용어를 우리 삶에 적용시켰던 적이 있지요. 삶에 적용된 득위의 의미는 앞서 언급한 '자리', 그것도 '자기에게 딱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30%의 여유',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유가 창조성으로, 예술성으로 나타납니다.
'70%의 자리가 득위다'라는 주장에 반론도 없지 않습니다.
학생들로부터 능력이 70%밖에 안 되더라도 100의 자리에 가면 그만한 능력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그것이 기회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2015, 63-64쪽.

신영복,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득위를 말하기 전에 우선 내 역량을 정확히 아는 게 필요할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런 다음 각각의 자리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필요로 하는지도 체크해야 할 겁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70% 정도의 힘을 써서 해낼 수 있는 자리가 '제 자리'일 뿐만 아니라, '행복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몰리고 치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0%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죠.

제가 만났던 그 친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 삼식이 삼촌의 명대사(스포 포함)

라마 <삼식이 삼촌>이 얼마 전에 종영했습니다.
주인공 삼식이 삼촌이 총살 당하는 비극적 결말이었죠. 저는 이 비극이 함축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인과응보로 주인공이 몰락하는 게 아니라, 성서의 욥처럼 '선한 사람도(물론 선하다는 평가에 물음표가 항상 붙기는 하지만) 불행해진다는 비극적 구조'를 선명히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K-드라마가 수준 높은 비극성을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자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우렁찬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미 8화에서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전 글에서 한번 인용했던 장면의 대사입니다.

삼식이 삼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관성.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유는 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천성과 관성.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천성과 관성을 알기만 하면,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천성과 관성은 인간 행위를 철저히 구속하는 필연의 법칙이라고 본 셈이지요. 드라마 내내 삼식이 삼촌은 자신의 뜻대로 정치, 경제, 언론, 군대 등 각종 분야에서 배후 조정을 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대사를 내뱉을 때까지만 해도, 삼식이 삼촌은 자신이 타인의 <천성과 관성>을 파악해 내는 자라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자기 자신의 천성과 관성을 알아차린 타인, 더 세고 '무서운 놈'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을 그대로 모방해 그것을 한발 앞서 실행에 옮긴 사람(드라마 속 안기철)이 세상엔 존재했던 겁니다.
지켜 보는 자는 반드시 보여진 대상이 되고, 사냥꾼은 예외없이 사냥감이 됩니다.
드라마의 막판에 승패의 저울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면서, 삼식이 삼촌은 안기철에게 이렇게 말하죠.

삼식이 삼촌:

이게 다 제 계획이었습니다.

삼식이가 하는 짓이 원래 다 그렇죠.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게

천성이고 관성입니다.

안기철:

어쩌나~~~

그 천성과 관성 때문에

죽게 생기셨네.

드라마의 마지막은 (삼식이 삼촌이 대신 죽어서 생존할 수 있었던) 김산의 회상으로 끝을 맺습니다.
회상을 통해 여전히 그는 삼식이 삼촌의 짙은 그림자를 느낍니다.
조금씩 자기 꿈(피자pizza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 만들기)을 실현하고 있는 김산은 삼식이 삼촌과 나누었던 과거의 대화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삼식이 삼촌: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아십니까?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

김산:

지구의 자전과 공전

말씀하시는 거예요?

삼식이 삼촌:

그렇죠,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근데 지금 느껴져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예,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

해가 뜨고 지는 건 지구의 자전 때문이고, 봄이 오고 겨울이 가는 건 공전 때문입니다.
지상의 변화란 변화는 모두 자전과 공전이라는 천문학적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죠.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짧고 가까운 것만 볼 수 있는 근시이기 때문이죠. 지구 바깥까지 시점을 이동시켜 자전과 공전을 보기는 힘들지요.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다는 태양도 실은 은하계 중심 주변을 돌고 있답니다.
아마 은하계도 더 큰 우주의 중심 주변을 돌고 있겠지요. 세상 돌아가는 '진짜' 원리는 끝내 알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중심이라고 판단하자마자, 이내 우리의 시선은 부단히 더 큰 중심으로 옮아가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세계 내에서 삼식이 삼촌은 세계를 부리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더 큰 세계에서는 그 역시 부려진 자에 불과했죠. 이것이 유한한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삼식이 삼촌은 그런 인간의 운명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비극적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연민은 바로 여기에서 발원합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공감!

전쟁 중에도 식구들에게 삼시세끼를 먹였다는 삼식이 삼촌

마찬가지로 삼식이 삼촌이 놓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천성과 관성이라는 두 가지 인간 이해의 틀 가운데, 그는 천성을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본 점입니다.
전통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뜻을 여간해서는 알기 어려우며, 현대 생물학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수십억 년의 생명의 역사가 내장된 유전자의 의미를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삼식이 삼촌은 안기철의 천성을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관성으로 천성을 대충 짐작하였기에, 오판했던 겁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세 가지 종류의 성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지적 성격, 경험적 성격, 획득 성격이 그것이죠. 예지적 성격은 날 때부터 제 몫으로 부여받은 본래 성격입니다.
바로 천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후에 짐작할 수만 있죠. 그 예지적 성격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이 바로 경험적 성격입니다.
이 경험적 성격을 삼식이 삼촌은 천성으로 이해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획득 성격이란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관습에 따라 얻어지는 성격입니다.
세상과의 접촉 속에서 후천적으로 만들어가는 자기인식에 해당합니다.
곧 삼식이 삼촌의 관성에 해당하죠. 드라마 속 주인공은 천성을 먼저 예지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으로 나누고,
천성의 미지적 특성에 더욱 더 주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어빈 얄롬은 자기와 타인, 앎과 모름을 기준으로 자아에 대한 아래의 분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

자신이 모르는 부분

남들이 알고 있는 부분

1. 공개 영역 – 공개 자아

2. 눈먼 영역 – 눈먼 자아

남들이 모르는 부분

3. 은폐 영역 – 은폐 자아

4. 미지 영역 – 미지 자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 자아와 눈먼 자아로 살고 있습니다.
안기철 같은 소수의 인물들은 강력한 은폐 자아를 가지고 있죠. 삼식이 삼촌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네 번째 영역인 미지 자아를 미처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미지 자아가 예지적 성격 혹은 진짜 천성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모른다는 핑계로 그걸 관심 밖에 내팽개쳐 두죠. 이
무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도시 아테네 시민들이 2500년 전에 이미 최고 수준의 비극을 즐겼던 겁니다.

김산과 삼식이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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