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불가능한 믿음"을 말하는가?

 

by 김동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이 말에 많은 과학자들이 불편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 말은 한편으로 과학적 사유의 편파성과 맹목적인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편으로 진짜로 사유하는 일의 희귀함을 뜻한다.
후자의 맥락에서 나는 국내 철학자들의 사유를 의심한다.
과연 이 땅에 스스로 사유하는 철학자가 몇 명이나 될까? 유감스럽게도 극히 드물다는 게 나의 박한 평가다.
애통하게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는 자들 속에 나도 끼여있음을 밝힌다.
대부분 남(중국이든 유럽이든 소위 문명국 철학자들)의 철학에 기대어 생각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철학자 김상봉(출처:한레)
내가 김상봉 선생을 주목하는 까닭은 그가 "사유하는" 희귀한 소수에 들어간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의 주장이 과격하기도 모순된 생각이 거칠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스스로 사유한다는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그를 처음 만난 1991년에도 지금도 변함없다.
계간지 <철학과 현실> 2024년 여름호에 김상봉 선생의 글이 실렸다.
<불가능한 믿음에 대하여-시민은 없고, 거류민만 넘치는 시대에>라는 글이다.
볼만한 구석이 많고, 배울 게 있다.
한 번도 나는 그의 글에 실망한 적이 없다.
글 속에서 스스로 사유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다.
소소한 문제들이 있어도 그걸 시비 걸기보다 사유하는 태도를 배우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글도 대체로 그렇게 읽었지만, 몇 가지 시빗거리는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예언자, 선지자, 계몽주의자, 우환 의식의 선비, 지식인
글의 첫머리를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테이레시아스의 한탄으로 시작한다.
"아아,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도 없는 곳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인용문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철학자가 처한 상황을 대변해 준다.
철학자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 비판을 위해 인용되었다.
그런데 진정 누구 책임일까? 우둔하고 무식한 사람들 탓인가? 소통 불능은 누구 탓인가? 어쩌면 평생 전태일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나?
2. 까마득한 옛날 사람도 "요즘 젊은 것들이 참 문제야"라는 말을 즐겨 했다는 데, "지금 우리 사이에 전태일 같은 사람이 있는가? 그것도 스물두 살 청년들 사이에?"라는 말은 책임을 후속세대에 떠넘기는 꼰대적 화법으로 들린다.
이런 화법은 스테레오타입의 시대 비판, 현실 인식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3. 선생은 '전체의 상실'에서 자기 분열과 시민의 거류민 전락의 원인을 찾았다.
그렇다, 문제는 전체다.
아도르노를 비롯한 숱한 현대철학자들은 전체에서 '전체주의'로 이행되는 역사를 목도하고 '전체'를 비판해 왔다.
그런데 선생은 그런 논의는 무시한 채 전체에 대한(정확히는 나와 전체가 하나임) 동경을 피력한다.
과거엔 철학자로 쳐주지도 않았던 니체를 언급하면서도, 어떻게 전체에 대한 현대적 논의는 감쪽같이 생략할 수 있었을까? 기껏 몇만 명 수준의 아테네 시민들이 공동체와 하나임을 느끼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게 아닌가?
4.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면, 이성이 아닌 믿음에 근거해야 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다.
이성을 끔찍히 믿었던 분인데... 아마 <영성 없는 진보>라는 최신작에서 비슷한 논점을 제시한 듯하다.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은 "전체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자각을 통해서만 입증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믿음은 "불가능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전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제시되지 않았다.
예언자, 선지자로서의 탄식만 흐를 뿐이다.
짧은 지면에 모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었을 테다.
틀림없이 선생은 두툼한 책으로 앞선 내 질문을 해소해 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선생이 스스로 사유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을 소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김상봉 선생뿐이다.
정치는 주관적으로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활동이며,객관적으로는 인륜적 삶 속에서 전체를 형성하는 활동이다.
<철학과 현실> 2024년 여름호, 88쪽.
고통의 경계가 나의 경계이다.
그러므로내가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은 전체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것을 통해서만입증된다.
같은 책, 99쪽.
걱정을 의무인 양 해대는 사람

 

by 김동규

 

 

난 추석 제사상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음식들을 제사상 위에 순서에 따라 올려놓았다.
앞자리에 과일, 그다음은 나물, 전, 고기 등등. 얼추 준비된 음식을 모두 늘어놓고 뭔가 빠진 게 없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음식의 열과 행을 가지런히 맞추며 내게 핀잔을 준다.
"삐뚤빼뚤 놓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아 보이지?" 나는 웃으며 군대도 안 가본 당신이 각 잡는 건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한때 완벽주의자였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시험 완벽주의자였다.
한 문제라도 틀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번번이 100점 만점을 받았고 어쩌다 실수로 한 문제라도 틀릴 때에는 내 방에 처박혀 원통함에 대성통곡을 했다.
한 치의 오차, 한 번의 실수조차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임했다.
중학교에 가서도 한동안 그런 태도는 변치 않았는데, 그래서 한번은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 '우리 학교 역사상 이런 점수를 받은 학생은 너뿐이다'라는 칭찬도 들었다.

하지만 곧 중학교 시험에서 만점 받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해지려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억압한 결과,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상과 불완전한 내 몸에 살면서 완벽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불합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나는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지우기 시작했다.
많이 지웠다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다.
각 잡는 아내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아 빙그레 미소가 터졌던 것이다.
미국의 철학 상담가 엘리엇 D. 코헨에 따르면, 완벽주의자는 의무적으로 걱정을 한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걱정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빠지기까지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계속 걱정하면서 그 일에만 몰두하거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그 일에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인 거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해.

엘리엇 D. 코헨, <지금 나는 고민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전행선 옮김, 애플북스, 2012, 31쪽

이런 완벽주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행복해지려면, 한시라도 빨리 그로부터 떨어지는 게 좋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도구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우리를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나쁜 일은 언제나 '불행 중 다행'이었다

 

by 김동규

 

떤 안 좋은 일을 겪을 때, 종종 "불행 중 다행이야!"라는 말을 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 데 갑자기 인도로 자동차가 들어와 내 다리를 부러트렸다고 해 보죠. 왜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다가, 하필 졸음이 덮친 운전자의 습격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힘듭니다.
불운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불운이기만 한 걸까요? 그 우연적 사건이 더 심각하게 안 좋은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가능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었겠죠. 생각해 보면, 이건 특정한 사건에만 한정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나쁜 상황을 모든 사안마다 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쁜 상황이 언제나 가능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최악'이라고 부르는 건 실제 최악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라면, 불운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불행 중 다행이었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냥 위로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법적 표현이 아닙니다.
'더 나빴으면 어쩔 뻔했어!'라며 다행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행운과 불운을 공평하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철학상담가 엘리엇 D 코헨은 걱정에 쩔어사는 현대인들을 '의무적으로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걱정에 밤잠을 설칠 지경이죠.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어떡하지? 이번 자동차 사고 때문에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을 대폭 인상해버리면 어떡하지? 애가 자꾸 빗나가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거야? 이혼하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엘리엇 D 코헨, <지금 나는 고민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전행선 옮김, 애플북스, 2012. 128쪽

그런데 이런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들은 더 나빠질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지혜를 잃어버렸기에,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게 됩니다.
코헨은 그런 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넓게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글쎄, 회사에서 잘리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 파산자 명부에 오르거나 다시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그리고 보험료쯤이야 올라가도 상관없어. 사고에서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차라리 다행이지. 그리고 애가 좀 빗나가려 해서 힘들긴 해도 그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얼마나 많아? 애가 암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내 결혼 생활이 뭐 썩 잘 굴러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도 괜찮아. 나랑 이혼하는 대신에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달려드는 변태 살인마하고 결혼했다면 어쩔 뻔했어.

같은 책, 129쪽.

운(運)이란 행운과 불운 절반씩 공평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운 뒤에는 행운이 숨어있고, 행운 뒤에는 불운이 숨어있죠. 행운이 찾아왔다고 기뻐 날뛸 일은 못 되며, 불운이 찾아왔다고 울며불며 비탄에 잠길 일도 못 됩니다.
더구나 행운과 불운을 자랑삼아 떠벌려서는 안 되겠죠.

"결국 우리는 자신이 만든 인간(AI)에게 끌려다니는 꼴이 되는군."

 

by 김동규

 

그말리온 신화를 어떤 현대적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을까요? 서양 문명, 특히 과학기술문명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피그말리온의 후예들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Idea), 곧 수학적 질서로 표상되는 세계의 설계도면을 집요하게 추구했고 동시에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보다 자신이 창작한 인공품을 더 사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더 잘 비추고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인공품, 그것은 자연의 산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를 보다 또렷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이유로 헤겔은 인공미를 자연미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헤겔이 보기에, 예술작품이 정신 자신을 되비치는 매끈한 거울이라면, 자연물은 정신의 왜곡상만을 보여주는 울퉁불퉁한 거울입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이 만든 창조물, 그것도 타자성이 거부된 동종교배의 산물이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피그말리온 신화는 끝까지 그런 사랑의 산물을 아름답다고 주장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상아 소녀에서 부녀가 낳은 아도니스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현대로 접어들수록, 서양인들도 이것이 아름답기는커녕 끔찍한 괴물일 수 있다는 점을 점차 확인하게 됩니다.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처음 그런 착상을 했던 소설가 중 한 명이죠. 『프랑켄슈타인』에서 그녀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과 닮은 피조물이 탄생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메리 셸리 (출처: 위키백과)
고통스러울 정도의 불안감을 느끼면 나는 생명 창조 도구들을 그러모았다.
이제 내 발밑에 놓인 생명이 없는 물체에 전기 자극을 가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반쯤 꺼진 촛불의 불빛 사이로 나는 피조물이 초점이 없는 누런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무한한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서 창조했던 결과가 이 괴물이라니.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김종갑 옮김(지만지, 2008), 58쪽.
보리스 칼로프의 프랑켄슈타인 괴물 역할 사진. 출처: 위키백과

이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피조물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으로서 ‘전기 자극 요법galvanism’이 등장합니다.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베누스 신이 해준 일을 과학이 담당하고 있는 셈이죠.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여 포스트 게놈 시대를 열고 있는 현대인에게 “눈처럼 흰 상아”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induced Pluripotent Stem Cell)’가 되고, 장인의 “놀라운 솜씨”와 “기술”은 과학자의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되었습니다.

《가타카》(Gattaca)는 1997년에 개봉한 앤드루 니콜 감독 작품

영화 <가타카>는 피그말리온이 꿈꾸던 세계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세계에서는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인간을 쉽게 제조해 내죠. 물론 다수의 SF 영화가 보여주듯이, 인간이 만든 제작물이(클론이든 기계이든) 원래의 의도와 목적을 배반하고 인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이미 괴테의 시적 직관이 이 점을 간파한 바 있죠.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조인간, 호문쿨루스가 등장합니다.
그의 맹랑한 모습을 보고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끌려다니는 꼴이 되는군.
괴테, 『파우스트』, 정서웅 옮김(민음사, 1997), 331쪽.

이 말은 우리 시대의 AI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서양인들은 피그말리온 신화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만 읽어왔습니다.
하지만 나르키소스와 짝패인 피그말리온 후손들의 파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냥도구로 무장하고서 의기양양하게 자연을 정복하려던 아도니스는 무지막지한 자연의 예상치 못한 역습으로 한순간 격파됩니다.
“살아남아 산 자들을 모욕하고, 죽어서 죽은 자들을 모욕”하는 뮈르라는 “살지도 죽지도 않게” 만드는 몰약으로 변신했죠. 곧
자기 복제를 통해 불멸에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방부처리’ 된 미라로 변신했던 겁니다.
진정 우리는 이런 운명을 소망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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