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정원은 낭만 넘치는 시·소설 무대
버넷은 '시크릿 가든'에서 치유와 회복,
셰익스피어는 정원에서 초자연 세계를 연결
회전 작업실에서 종일 정원 바라본 버나드 쇼
'죽란시사' 모임서 계절마다 꽃 즐긴 정약용
정원과 스토리들은 삶의 가치 일깨워주는 명약
정원은 현실에서 맞닥트리는 온갖 감정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며 정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다양한 식물의 모양과 색깔, 질감이 날씨와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은 우리 안에 무수히 피어오르는 섬세한 감정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평소에는 감춰져 있어 잘 살피지 못한 마음과 기억들을 정원의 식물들에게 투영하면서 하나하나 꺼내 어루만지다 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치유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정원은 철학과 사색의 장소이면서, 그 자체가 비일상적 실감 콘텐츠로서 오감을 자극하는 이야기 보물 창고이기도 하다.
미국 영문학자 존 닐이 ‘호모 내렌스’라는 개념으로 소개했듯,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소통하며 발전해 왔다.
정원은 특정 인물과 사건에 얽힌 서사뿐 아니라 시와 소설처럼 특별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된다.
전 세계의 많은 역사적인 정원이 세계사와 인문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특히 정원에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공중 정원은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멀리 고향을 떠나온 아내의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영국의 해링턴 백작은 엘바스턴 캐슬 정원에 온갖 크기와 종류의 침엽수를 수집해 일련의 연극 무대와 같은 환상적인 극장식 정원을 만들었다.
배우였던 연인과의 결혼을 위해 상류 사회로부터 쫓겨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기사도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원의 변화무쌍한 상징성은 수많은 명작 속에서도 두드러진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 메리의 이모부 아치볼드가 만든 정원은 원래 이 가족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하지만 아치볼드의 아내가 그네를 타다 떨어지는 사고로 죽게 돼 봉쇄되면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정원이 되었다.
훗날 그 집에 얹혀살게 된 메리가 우연히 열쇠를 발견해 정원을 되살리면서, 이 공간은 병약한 사촌 콜린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장소로 변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다양한 이야기의 배경으로서 정원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한 극작가다.
희극 ‘헛소동’에서는 정원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엿듣는 장소로 중요한 사건 발단의 무대가 되는가 하면, ‘한여름 밤의 꿈’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현실과 초자연적 세계가 연결되는 경계에서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경험하는 흥미진진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정원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
영국의 시싱허스트 정원은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와 해럴드 니콜슨 부부가 만든 예술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정원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 비타와 버지니아 울프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버지니아는 비타를 생각하며 소설 ‘올랜도’를 쓰기도 했다.
정원은 ‘야외의 방’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펼칠 수도 있다.
단편 모음집, 혹은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하나하나 음미하는 즐거움이 크다.
로런스 존스턴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흥미로운 식물들로 만든
히드코트 매너 가든이 대표적이다.
생울타리 혹은 벽돌 담장으로 나뉜 서른 개의 테마 정원은 작은 출입구로 이어져 있다.
마치 앨리스가 커다란 나무 밑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관람객은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문을 통과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주제와 스타일의 정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생과 회복의 의미를 담아 달리아, 칸나, 샐비어 등 붉은색 꽃 테마 정원으로 만들어진 ‘레드 보더’를 지나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 굵직한 외줄기 기둥 위에
박스 형태로 다듬어진 유럽서어나무들이 열 맞추어 자라는 ‘스틸트 가든’이 등장하는 식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야기가 깃든 전통 정원이 많다.
다산 정약용은 한양 명례방에서 ‘죽란시사’라는 모임을 가지며 계절마다 꽃을 즐겼다.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는 다산초당에 기거하면서 정원 철학을 정립했다.
다산은 당시 백운동 정원의 아름다움을 열두 가지 시와 그림으로 구성한 ‘백운첩’을 남겼다.
여기에는 담장을 뚫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을 보며 손님들과 함께 술잔을 띄우는 풍류를 소개하는 ’유상곡수’, 바람이 도끼가 되어 깎은 틈으로 이끼가 스며든 바위에 붉은 빛깔의 큰 글자를 써두었다는 ‘창하벽’ 등과 같은 스토리텔링이 포함돼 있다.
다산은 정원으로 들어가는 어귀는 좁아야 하고 높은 암벽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확 트여 눈이 즐거워야 한다고도 했다.
서양 정원에서 좁은 출입구를 통해 다른 차원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정원 개념이 우리 전통 정원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정원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하지만,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아서 밀러, 딜런 토머스, 조지 버나드 쇼를 비롯한 많은 유명 작가들이 정원 안에 집필 작업실을 두고 글쓰기에
몰입했다.
‘피그말리온’ 등 희곡의 저자로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한 조지 버나드 쇼는 집필 작업실을 회전할 수 있게 만들어 하루 종일 정원이 바라다보이는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도록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렇다면 현대 도시에서 정원을 통해 풀어가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 과거의 정원사들이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아름다움과 낭만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우리와 공존하는 지구 생명체들의 이야기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정원은 자연의 경이로운 이야기와 치유의 에너지를 더 풍부하게 전해줄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정원과 서재를 가지고 있다면 원하는 전부를 가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정원과 빛나는 이야기들은 삶의 가장 소중하면서도 궁극적인 가치를 일깨워 주는 명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