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날 무시해!”


 기사원문

[132 신화편. 트로이 전쟁①]세기의 결혼식 불청객이 굴린 황금사과‘불화 여신’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세 여신, 황금 사과 놓고 아름다움 경쟁‘가장 잘 생긴 인간’에게 심판 맡겼는데이 결정이 트로이 전쟁 부르게 될 줄은<동행하는 화가>에블린 드 모건벤저민 웨스트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일부 확대), 1638~1639, 패널에 유채, 199x381cm, 프라도 미술관

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나눠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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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알로 인한 재앙

<코르넬리스 판 하를럼,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 1592, 캔버스에 유채, 246x419cm, 네덜란드 문화유산청>. ‘바다의 노인’으로 불린 마당발 네레우스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는 만큼, 이날 행사에는 올림포스의 거의 모든 신이 총출동했다.
부정적 관념 또는 의미를 관장하는 신들만 빼고. 아울러 물과 나무의 요정, 현실 세계를 사는 인간들도 구경차 모습을 보였다.
그림 오른편을 보면 날개 달린 모자를 쓴 헤르메스를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여러 여인이 땅바닥의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혹시 에리스의 사과가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

통통한 황금 사과 한 알이 멈출 듯 말 듯 계속 굴렀다.
가정의 여신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때마침 이를 보고 있었다.
 
동그란 녀석은 얄궂게도 세 명의 여신 앞에서 탁 멈췄다.
세 쌍의 눈은 이제 사과에 쓰인 글씨를 읽고 있었다.
 “이 사과를 가장 아름다운(최고의, 가장 올바른, 제일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칩니다.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 바다를 수호하는 신 네레우스의 딸 테티스의 결혼식이 치러진 펠리온산.하객으로 온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 사이 정다운 대화는 뜬금없이 등장한 이 사과 탓에 뚝 끊겼다.
 어느덧 어색한 침묵만 밀려왔다.
일찌감치 눈치 싸움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디르크 데 쿠아데 반 라베스테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 16~17세기경

“누군가 내게 선물을 줬군요.”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내가 최고의 여신이지요. 최고의 신인 제우스를 남편으로 두기도 했으니.” 그녀가 허리를 숙여 사과를 집어 들려고 하자….“잠깐만요! 가장 올바른 여신은 당연히 저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지혜와 지식, 정의의 상징인걸요.” 아테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할 말은 있어요. 저는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여신이니까요.” 아프로디테 또한 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세 여신은 누구도 떨어진 사과를 쥐지 못한 채 설전만 이어갔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신과 요정, 인간 등 모든 손님이 불안에 떨 지경에 이르렀다.

요아킴 브테바엘,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 1612, 캔버스에 유채 등, 36.5x42cm, 클라크 미술관

이런 가운데, 또 다른 여신이 구름 틈에서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화와 다툼, 이간질의 여신 에리스였다.
 에리스는 이날 청첩장을 받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갈등과 충돌을 몰고 다니는 그녀가 오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하지만 에리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스의 어머니는 제우스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밤의 여신 닉스였다.
이런 고귀한 혈통을 쥔 본인이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함정을 심었다.
그게 사과였다.
 모호한 문장을 휘갈긴 뒤 땅으로 흘렸다.
굴러가던 녀석이 세 여신 앞에서 오뚜기처럼 서게끔 했다.
그 결과, 세기의 대결을 부추길 수 있었다.
불화의 여신, 이 이름값을 제대로 한 격이었다.

한스 폰 아헨, 아테나, 아프로디테, 그리고 헤라. 1593, 캔버스에 유채, 54x67cm, 보스턴 미술관

에리스의 농간에 휘말린 세 여신은 제우스를 불렀다.
“당신이 직접 가려보세요!” 헤라가 도끼눈을 뜬 채 말했다.
주먹을 쥔 아테나, 팔짱을 낀 아프로디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는 난감했다.
헤라는 아내, 아테나는 딸, 아프로디테는 오랜 기간 연심을 품은 상대였다.
누구를 뽑아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이 문제는 신들과는 아무 인연 없는 인간에게 맡기는 게 좋겠소.”제우스가 제안했다.
 “아, 인간 중 가장 잘생긴 남자에게 물어보는 건 어떻소?” 그는 세 여신이 반발도 하기 전에 하늘 위로 껑충 올랐다.
몇 곳의 구름을 갈라보던 그는, 이데산의 한 기슭에서 양과 함께 낮잠을 즐기는 사내를 봤다.
금발에 가까운 연한 갈색 머리, 큰 눈과 날렵한 턱선, 부드러운 인상…. 그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였다.
 
역시 제우스의 눈썰미는 좋았다.
이 남자의 외모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인간 남자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아보였다.

자크 클레망 와그레즈, 파리스의 심판, 1886

“셋 모두 저 사내에게 물어보게. 본인이 가진 모든 덕목을 활용해 답을 내릴 수 있을 테니.”제우스는 이런 말을 남긴 뒤 구름 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씩씩대는 세 여신 모두 이제는 파리스, 이 남자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한낱 인간이 뭘 알기나 하겠어?” 세 여신은 이데산으로 향해가며 투덜거렸다.
 “여신님들. 한 가지 귀띔을 드리자면, 저 사내도 평범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파리스의 ‘심판’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2~1635, 참나무에 유채, 144.8x193.7cm, 내셔널 갤러리>. 세 여신이 사과를 든 파리스 앞에서 유혹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헤라는 공작새를 거느리고 있다.
녀석은 빨리 결정하라는 듯 파리스의 발목을 쫄 기세다.
나무에 기대다시피한 아테나는 메두사의 머리가 담긴 방패 아이기스를 챙겨왔다.
한가운데 있는 아프로디테 뒤에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장비를 다듬고 있다.
하늘에선 또 다른 여신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파리스는 오직 한 여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

“…그러니까, 너는 세 여신 중 한 분에게 사과를 건네기만 하면 돼.”헤르메스가 파리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파리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여신들을 심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들의 왕, 제우스의 명령이다.
” 갑자기 정색하는 헤르메스 앞에서 파리스는 끝내 수긍의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리스의 심판, 1908~1910, 캔버스에 유채, 73x92.5cm, 히로시마 미술관

“어이, 인간.”세 여신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옷부터 스르르 벗었다.
어느덧 자존심 싸움이 된 사과 쟁탈전 앞에서 있는 힘껏 이 사내를 홀릴 요량이었다.
“나에게 사과를 주면 커다란 국가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주지.” 이번에도 헤라가 먼저 입을 뗐다.
 “나는 어떤 전쟁에서든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안길 수 있어.” 아테나도 기다렸다는 듯 조건을 걸었다.
 “그 사과를 준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줄게.”
 아프로디테도 파리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제이콥 드 바커, 파리스의 심판, 16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파리스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냥 사과를 셋으로 쪼개 모두에게 나눠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신도 아닌 이상 어떻게 사과를 똑같이 셋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파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신을 우롱한다는 말만 들을 게 뻔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헤라에게 주는 게 안전할까. 다만, 헤라는 부와 권력을 준다고 했을 뿐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테나에게 기대 용기와 지혜를 받는 게 좋을까. 다만, 신들의 변덕은 갈대와 같으니 이 또한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마음이 변했다며 모른 척한다면, 잘 나가다가도 곧장 범부가 돼 몰락할 것이다.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파리스의 심판, 1889,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그렇다면…. 그저 딱 한 번의 이행으로 끝낼 수 있는 일.뒤끝도, 후폭풍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그것은 한순간 찌릿하는 마음이 이끌 사랑의 성사일 터였다.
신의 도움 없이 부와 권력, 용기와 지혜를 지킬 자신은 없지만… 시작된 사랑을 이어가는 일만큼은 자신 있다.

파리스는 반짝이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생각까지 들자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신들이시여. 인간이 어떻게 사랑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파리스는 사과를 쥐었다.
 “아름다운 사랑의 여신에게 이 사과를 바칩니다.
” 그는 아프로디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믿으며. 빠져나갈 길이 없던 파리스의 심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에두아르트 바이트, 파리스의 심판, 카드보드에 유채, 60.5x81cm, 도로테움

파리스는 몰랐다.
이날, 이 순간이 한 왕국, 날고 기는 수십 명의 영웅, 수십만 병사가 소멸하는 전쟁을 부를 줄은. “두고 보자.” 얼굴이 시뻘게진 헤라와 아테나는 곧장 모습을 감췄다.
“파리스. 보는 눈이 있군. 약속은 꼭 지키마.” 아프로디테는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정체

<에블린 드 모건, 트로이의 헬레네, 1898, 캔버스에 유채, 124x73.8cm, 드 모건 센터>. 헬레네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꽃과 새에 둘러싸인 그녀는 분홍색 천을 두른 채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그녀 뒤에는 고요한 성이 있고, 잔잔한 산과 바다가 있다.
다만, 우중충한 하늘 탓인지 분위기가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아보인다.
그러고 보면 그녀 발밑에선 시든 꽃잎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복선일까.

“파리스여. 떠날 준비를 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았으니.”“그녀는 누구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헬레네. 제우스를 아버지로, 인간 여성 레다를 어머니로 둔 여인이야. 지금은 스파르타의 왕비로 있어.”아프로디테의 음성을 잠자코 듣고 있던 파리스는 순간 멈칫했다.
헬레네가 이미 유부녀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의 여신이 점 찍은 외모라면 대체 얼마나 예쁠까. 그런 이를 아내로 데려올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자랑일까. 욕망도, 욕심도 화산처럼 들끓었다.
파리스는 하늘에 대고 모른 척 말했다.
“신이시여. 제가 스파르타로 가서 뭘 하면 되겠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에블린 드 모건, 카산드라, 1898년경>.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주였다.
파리스의 누이이기도 한 그녀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프리아모스 왕의 딸 중 가장 예쁘다’는 말을 듣고 컸다.
태양과 궁술, 음악, 그리고 예언과 관련한 일까지 두루 관장하는 신 아폴론이 그런 카산드라를 사랑했다.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까지 전수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이 호의를 외려 부담스러워하며 선을 그었다.
그녀 또한 아폴론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신의 변덕을 두려워해 일부러 벽을 쌓았다는 말도 있다.
아폴론은 이미 준 능력을 도로 빼앗을 수는 없었다.
아폴론은 그녀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는 척 작별의 키스를 청했다.
카산드라가 이를 허락해 입을 맞추는 순간, 그녀 혀에 담긴 설득의 힘을 잘라 먹었다.
그날 이후 그녀가 아무리 예언한들,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고 한다.

“내 아들아. 아무리 아프로디테 여신이 곁을 지킨다고 한들….”파리스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파리스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명백히 범죄였다.
수가 틀리면 국가 사이 분쟁도 벌어질 일이었다.
신중한 성격의 프리아모스는 이 둘째 아들이 몰고 올 재앙을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만 50명, 딸만 12명을 둔(!) 프리아모스는 유독 파리스에게 약했다.
평생의 빚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참 전 과거의 일이었다.

위베르 로베르, 로마 대화재(그림과 기사 내용은 관련 없음), 1785, 캔버스에 유채, 76X93cm

파리스는 왕 프리아모스, 왕비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카베는 그 무렵 찝찝한 꿈을 꿨다.
파리스가 아닌 웬 나무토막을 낳는 꿈이었다.
끝단에 갑자기 불이 화르르 붙고, 그 열기가 도시 전체를 태워버리는 장면까지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트로이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이런 섬뜩한 신탁까지 들었다.
두 사람은 걸음마도 못 뗀 파리스를 산에 버렸다.
얼어 죽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양치기가 파리스를 기적적으로 봤다.
파리스는 이 덕에 양치기의 자식으로 클 수 있었다.
그 사이 유약한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지난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십여년 뒤, 파리스가 건장한 청년이 돼 살아있다는 걸 알고선 곧장 다시 거둬들였다.
“우리가 네게 몹쓸 짓을 했다”는 사과와 함께였다.
프리아모스가 파리스에게만은 더더욱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피테르 라스트만, 파리스와 오이노네, 1619, 패널에 유채, 48.9x71.4cm, 워체스터 미술관

파리스는 그때부터 트로이의 둘째 왕자로 살아갈 수 있었다.
큰형 헥토르가 왕세자로 정해진 만큼, 그는 취미 삼아 양치기 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느 때와 같던 어느 날, 헤르메스와 세 여신이 내려온 후부터는 삶이 통째로 요동치긴 했지만.“아버지.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입니다.
신들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 
이미 붕 떠버린 파리스는 더는 앞뒤 따져보지 않을 모습이었다.
이때 한 사람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녀는 프리아모스 왕의 딸이자 파리스의 누이, 카산드라였다.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배운 자였다.
그러나 아폴론을 등졌다는 이유로 말의 설득력을 잃는 저주에도 걸린 여성이었다.
즉, 늘 맞는 말만 하지만 매번 아무도 이를 믿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여인이었다.
“아버지. 파리스를 막아야 해요. 파리스를 스파르타로 보내면 참혹한 전쟁이 벌어질 거예요!” 카산드라가 말했다.
진심을 담아 악쓰듯 소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의 말은 먹히지 않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끝내 파리스에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갈 건가요?”파리스가 배를 타기 전날, 이번에는 아내인 오이노네가 그를 붙잡았다(파리스에게도 이미 아내가 있었다!).오이노네는 산의 님프였다.
 그녀 또한 예지력이 있어, 트로이로 헬레네만큼은 데려오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왕가도 누르지 못한 파리스의 마음을 오이노네가 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잊지 말고, 나를 버리지도 마세요. 그리고, 상처를 입으면 찾아오세요. 약초를 잘 아는 제가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파리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다음 날, 한껏 차려입은 채 스파르타로 향하는 배 위에 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벤자민 웨스트, 파리스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는 헬레네, 1776, 캔버스에 유채, 143.3x198.3cm,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아프로디테가 헬레네를 구슬린다.
그러는 동안 에로스는 헬레네의 팔을 힘껏 이끈다.
바로 파리스에게로. 아프로디테에게 홀린 헬레네는 이제 곧 파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이다.
진작에 황금 화살을 맞았을 그녀는 곧장 파리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파리스는 눈부신 헬레네의 외모에 이미 넋을 놓았다.
볼만 새빨갛게 붉어지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그렇게 약속을 지켰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물 건너온 트로이의 둘째 왕자, 파리스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트로이 왕족은 모두가 미남미녀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이제 알겠소.”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왕비 헬레네 또한 그 말을 듣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는 파리스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개빈 해밀턴, 헬레네를 파리스로 데려가는 아프로디테, 1756~1759, 캔버스에 유채, 243.8x304.8cm, 내셔널 트러스트

파리스는 매일 밤 심장이 터질 듯했다.
과연 헬레네는 예뻤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은 처음이었다.
감히 판단하건대, 그녀는 아프로디테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녀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헬레네 또한 파리스만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것은 몽글몽글한 감정이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마음이었다.
이게 진짜 사랑인가. 이제 헬레네는 파리스만 보고 싶었다.
 
남편 메넬라오스는 떼어둔 채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젤리카 카우프만, 헬레네가 사랑에 빠지게끔 이끄는 아프로디테, 1790, 캔버스에 유채, 102x127.5cm, 예르미타주 미술관

전해지는 몇몇 설에 따르면, 헬레네는 에로스의 황금 화살을 맞은 상태였다고 한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자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다.
그가 쏜 황금 화살은 맞은 직후 처음 보는 이를 깊이 사랑하게 하는 마법이 서려 있었다.
모습을 감춘 에로스가 헬레네의 눈이 파리스로 향하는 순간 황금 화살을 쐈고, 그 결과 사랑의 포로가 됐다는 이야기다.

제이콥 드 바커, 헬레네의 침실로 들어가는 파리스, 1585~1590년경, 캔버스에 유채, 119.4x171.5cm, 게티 센터

파리스가 스파르타에 머문 지 열흘째가 된 날.메넬라오스는 갑작스럽게 숨진 외조부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가야 했다.
때가 왔다.
 사랑에 홀린 헬레네는 파리스와 함께 그날 배를 타고 트로이로 야반도주했다.
 남편도, 아홉 살 난 딸 헤르미오네도 모두 버린 채. 물론 파리스도 누나 카산드라, 아내 오이노네의 경고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돌아온 메넬라오스를 기다리는 건 텅 빈 침실이었다.
극도의 배신감에 휩싸인 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안젤리카 카우프만, 메넬라오스의 궁전에서 도망치는 파리스와 헬레네

그가 입을 열고 한 말은 간결했다.
“그리스 전역에 있는 왕과 왕자, 영웅들에게 전하라. 맹세를 행할 때가 됐다고.” 맹세.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연재될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에블린 드 모건(Evelyn De Morgan·1855. 8. 30.~1919. 5. 2.)

라파엘전파 성향을 지닌 영국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존 에버렛 밀레이 등 라파엘전파의 선배 화가들처럼 영적, 신화적, 문학적 주제로 그림을 즐겨 그렸다.
기술적으로는 여성의 신체를 우아하게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제2차 보어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이를 평화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등 언어 재능도 뛰어났다고 한다.
대표작은 <적십자>, <죽음의 천사> 등.

벤저민 웨스트(Benjamin West·1738. 10. 10.~1820. 3. 11.)

주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의 화가. 영국 조지 3세 체제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한 적도 있다.
신화화부터 역사화, 초상화 등 다룰 수 있는 그림 영역이 넓었으며, 이 덕에 왕립 예술원의 회장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미국 화가로는 사실상 최초로 이탈리아 회화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예술가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 산치오와 티치아노 베셀리오다.
대표작은 <인디언들과 교섭하는 펜>, <하늘에서 전기를 끌어들이는 프랭클린> 등.

참고자료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디스 해밀턴, 현대지성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 트로이 전쟁, 스티븐 프라이, 현암사일리아스, 호메로스, 숲일리아스, 호메로스, 아카넷일리아스, 호메로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시즌 1 : 프로메테우스>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시즌 2 : 헤라클레스>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시즌 3 : 테세우스>8)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9)‘소 머리-사람 몸뚱이’ 아기 태어났다…‘폭풍성장’ 거듭, 끝내 최후는<특별 기획 : 트로이 전쟁>10)“감히 날 무시해!” 홧김에 파놓은 함정 때문에…결국 온세상 난리났다
<단편>■“제가 봤어요” 女납치 순간 밀고했다가…이렇게까지 ‘보복’ 당할줄은(시시포스)■“죽은 아내 돌려주세요” 꽃미남의 눈물 호소…‘비장의 무기’ 꺼낸 사연(오르페우스)■“父는 죽고, 친모와 결혼하고” 재앙같은 예언…당사자 아들의 기구한 사연(오이디푸스)

클로드 로랭, 파리스의 심판, 1645~1646, 캔버스에 유채, 112.3x149.5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이원율 기자

이원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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