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기 전 임 만나야 하는 가을꽃의 절박함!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벌개미취 가을 들판의 여러해살이풀

구절초. 노란 수술과 암술이 무성한 통꽃 다발,
그 주위를 빙둘러 나있는 하얀 설상화. 구절초의 꽃은 두상화서인 국화꽃의 진수를 보여 준다.

자연주의 정원을 꿈꾸는 정원사는 용담,
청하쑥부쟁이,
엉겅퀴를 화단에 심었다.
이웃 어른들은 이리 흔한 것을 돈 주고 사서 심느냐 한다.
아니나 다를까. 엉겅퀴는 심은 즉시 무럭무럭 자라 여름 내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날려 잔디밭이고 화단이고 나무 그늘이고 가리지 않고 피어난다.

청하쑥부쟁이는 해마다 씨앗으로,
뿌리로 화단 곳곳에 무성히 피어나 주인이 아끼는 화초 자리를 빼앗아버린다.
뽑아내도 어느새 싹을 내는 청하쑥부쟁이는 그 이름이 오히려 오싹하다.

애지중지 자리를 잡아 심어둔 용담은 이런 식물들의 위협에 해마다 그 꽃의 크기며 수가 줄어간다.
아무리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고 애정을 다해 이들을 공존시키려 애쓰지만,
엉겅퀴며 청하쑥부쟁이의 야생성을 억누를 수 없다.
정원사는 용담이 꽃을 피울,
딱 그 정도의 자리만 지켜주고 손을 놓는다.

정원사가 굳이 사다 심지 않아도 엉겅퀴며 쑥부쟁이는 가을 들판에 흔하디흔하다.
국화꽃 무리야 봄에도 있고,
여름에도 있지만,
가을이 제격이다.
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
벌개미취,
참취…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청량한 가을날,
산들산들한 '들국화' 무리다.
외래종인 개망초마저 우리의 가을 들국화가 되어가고 있다.

미역취 역시 국화과 식물로 국화꽃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야생의 들국화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엔 아쉬움이 있다.

들판에서 "국화 손들어봐! 들국화 손들어봐!"라고 한다면,
식물 스스로도 어리둥절할 것이다.
국화Chrysanthemum morifolium는 분명 고유한 종명을 가지고 있는 특정 종이지만,
우리에겐 '국화꽃' 모양의 꽃이면 모두 국화이고,
들판에 핀 국화꽃 모양의 꽃이면 쑥부쟁이(참취속,
 Aster)도 구절초(국화속,
 Chrysanthemum)도 모두 들국화이다.

들국화 무리가 속한 국화과Asteraceae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분포하고,
가장 많은 자연종을 가지고 있다.
쌍자엽식물 중 가장 큰 과科이다.
3,
000년 이상의 재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 종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화과만큼은 정말 다 아는 듯하지만,
정확한 이름과 계통을 맞히기가 어렵다.
들국화로 불리는 것들도 특정 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국화무리와 구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국화'라고 인식하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은 안쪽의 노란 다발과 그것을 둘러싼 꽃잎이다.
국화 무리에 속하는 식물들의 꽃은 기본적으로 꽃잎이 통으로 이루어진 통꽃(합판화)이다.
쑥부쟁이의 연보라 꽃잎 안쪽에 노란 다발처럼 보이는 것은 각각의 통꽃(국화꽃의 경우 관상화라 부른다)들과 그 속의 암술과 수술이 만들어내는 꽃의 다발이다.

미국쑥부쟁이. 외래종인 미국쑥부쟁이나 개망초 역시 국화꽃의 전형을 보여주며,
우리 주변의 흔한 들국화가 되어가고 있다.

푸른색 꽃 전체 식물의 10% 미만
가장자리에 빙 둘러나 있는 꽃잎은 통꽃의 한쪽 끝이 길게 늘어난 것으로,
혀 모양을 닮아 설상화라 부른다.
보통의 경우 이 설상화는 무성화이지만 종종 암술을 가지고 있으며,
수분매개자를 유혹하는 역할을 한다.

수분매개자란 수정에 필요한 꽃가루를 전달해 주는 새나 곤충을 말한다.
사람은 설상화의 색을 통해 국화꽃 색을 구분한다.
결국 '수백 개의 관상화(통꽃송이)와 그 주위를 빙둘러 나있는 수십 개의 설상화' 형상을 우리는 국화꽃 모양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런 국화꽃의 꽃차례(화서,
꽃이 피어 있는 모양)를 두상화서頭狀花序라 하는데,
두상화서에서 만들어지는 씨앗은 통꽃의 수만큼 엄청나다.
민들레의 하얀 씨앗다발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씨앗들은 매우 가볍고,
날개나 솜털이 달려 있어 바람을 타고,
물을 따라 어디든 이동해서 싹을 내고 자리를 잡는다.
어찌 보면 들국화 한 무리는 초원 그 자체다.

노란색 감국은 보라색 들국화가 가지지 못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산의 가장자리에 노랗게 번지고 있는 산국과 감국 역시 우리 가을의 소중한 들국화 무리다.

꽃잎의 형태나 구조를 보면 식물계통의 발달과정을 가늠할 수 있다.
백악기 말 초록 무성한 숲에서 전문적인 꽃잎이 만들어지면서 지구는 아름다운 꽃식물(현화식물)시대를 맞이했다.

꽃들은 꽃잎의 변형을 통해 좀더 나은 수분전략을 구사했는데,
우선 벚꽃이나 배추꽃과 같이 똑같은 모양의 꽃잎 여러 장이 모여 있는 꽃(갈래꽃)이 만들어졌다.
이후 꽃잎의 모양이 서로 다른 갈래꽃이 만들어졌는데,
제비꽃이나 물봉선화,
강낭콩꽃 등은 꽃잎을 하나하나 분리하면 낱장으로 뜯어지지만 그 모양이 서로 다르다.

이후에 만들어진 꽃들은 개나리나 수수꽃다리와 같이 꽃잎들이 붙은 통꽃이었다.
이는 수분매개자를 오랫동안 꽃 속에 머물게 하는 장치로 이해된다.
통꽃이 변형되는 방식은 통꽃 가장자리의 갈라짐이다.
가장자리가 얕게 갈라져 쉽게 통꽃임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인동덩굴의 꽃처럼 극단적으로 깊게 갈라져 통꽃인지 알기가 어렵기도 하다.

가을 들판과 숲 속,
고산 초원에서 자라는 구절초는 하얀 꽃잎 속에 겨울을 앞둔 벌이나 나비 등과 같은 곤충을 불러들이는 비밀무늬뿐 아니라 은근한 향기도 가지고 있으며,
매년 그 자리에서 피고 진다.

통상적으로 국화과는 식물도감의 가장 뒷부분(외떡잎식물 제외)에 나온다.
짧은 통꽃잎 위로 솟아나온 무수한 수술과 암술다발,
바깥 꽃의 설상화로의 변신은 아주 효과적인 꽃-곤충 관계를 완성했다.
국화꽃 다음의 꽃 모양이 궁금하다.
꽃의 특징만으로 이미 두꺼운 식물도감의 상당 부분을 건너뛸 수 있다.

가을 들판의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가을 하늘을 닮은 푸른색이 필요하다.
노란색 미역취,
곰취,
마타리도 있고,
분홍색 범꼬리도 있지만,
용담,
쑥부쟁이,
도라지,
층꽃,
이질풀꽃,
투구꽃,
모싯대,
꼬리풀… 가을 들판에는 유난히 푸른색 꽃이 많다.
청색 계열의 꽃을 피우는 식물은 전체 꽃식물의 10% 미만으로,
흔하다고 볼 수 없다.

꽃들이 저마다 고유한 꽃색을 가지게 된 것은 수분매개자들의 종류나 온도,
토양,
그늘,
빛 특성 등에 따라 선택압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가을의 주요 꽃가루받이 동물은 벌과 나비,
파리와 같은 곤충 종류이다.
꽃들은 곤충이 선호하는 신호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알린다.

용담.

꽃잎의 청색은,
산수국에서 살짝 엿보았듯이,
안토시아닌 가운데 델피니딘 계열의 색소가 나타낸다.
꽃잎의 푸른색은 자외선을 차단해서 세포를 보호하기도 하고,
곤충에게 가장 잘 보이는 색이기에 1석 2조의 효과를 가진다.
경우에 따라 꽃 내부 온도를 주변보다 높여 수정과정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흰색 꽃 역시 흰색이 아닌 것이,
자외선 필터를 통해 보는 흰색 꽃들 대부분이 곤충을 위한 파란색 안내지도를 새겨놓았다.

가을의 필연,
들국화


가을에 유독 푸른색 꽃이 눈에 띄는 것은 곧 닥쳐올 겨울 전에 수분을 이루고 씨앗을 만들어야 하는 가을꽃의 절박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곤충에게도 가을의 꽃 잔치는 겨울 준비를 위한 소중한 기회다.
비슷한 크기,
비슷한 색상의 꽃들이 어우러진 초원에서 윙윙거리는 벌떼 소리와 나비들의 부지런한 날갯짓. 서로를 위한 치열한 전략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들국화 무리가 나무라면,
감흥이 가을 단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들판의 생명들이기에 벌떼 소리와,
나비 날갯짓과 가을바람과 잘 어울린다.
국화과 식물은 대부분이 여러해살이풀(다년생초본perennial plant)로 어디에서나 풀밭을 이룬다.
여러해살이풀이란 씨앗에서 한번 만들어진 뿌리가 계속 살아 있으면서,
매년 새로운 싹을 내는 식물이다.
원추리,
백합,
국화,
잔디,
엉겅퀴 등도 여러해살이풀이다.

청하쑥부쟁이.

초본 중에 한해살이풀(1년생 초본annual plant)과 두해살이풀(2년생 초본 biennial plant)은 매번 새로운 씨앗으로부터 싹을 내고,
꽃을 피워 씨앗을 만든 후 생을 마감한다.
두해살이풀은 흔히 가을에 싹을 내고 로제트Rosette라 불리는 근생엽根生葉으로 겨울을 보낸 뒤,
봄에 꽃을 피우고 죽는다.
만 나이로 따지면 역시 1년생이다! 이에 비해 나무(목본식물)는 땅속의 뿌리뿐 아니라 지상의 줄기도 해를 넘기고 살아남아,
그 줄기 끝에 새로운 가지를 만드는 식물이다.
씨앗으로만 싹을 내거나(1년생 초본과 2년생 초본),
씨앗과 뿌리에서 싹을 내거나(다년생 초본),
씨앗과 뿌리와 지상의 가지에서 싹을 내거나(목본식물)!

국화(품종). 짧은 계절,
가을 동안 피어나는 야생화들은 수분(꽃가루받이)을 성공시키기 위해 벌이나 나비와 같은 곤충을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색이나 향기,
비밀지도를 꽃에 새겨 넣어야 한다.

들국화 초원은 빛과 곤충과 식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다.
최근엔 산과 들이 만나는 경계에서,
도로와 산이 만나는 경계에서,
쑥부쟁이에 비해 작고 단단한 노란 산국과 감국무리가 흔한 광경이 되었다.
보라색 들국화뿐 아니라 노란 산국의 향기 강한 정서도 곧 가을을 대표하게 될 것 같다.

쑥부쟁이든 구절초든 산국이든,
마당의 국화든,
꽃송이가 누렇게라도 있는 한,
겨울은 유예된다.
쑥부쟁이의 하늘거림이 쓰러지고 나면,
추운 겨울바람에 맞서 춤출 들판의 꽃은 더 이상 없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