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라,
덜어내라,
과감하게 제거하라 -
토르소의 미학
예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든 너무 늘리지만 말고 줄이기도 하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늘리는 것 못지않게 줄임으로써 얻게 될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창조함에 있어서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꼭 진리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것에 관심을 쏟다가 결정적인 것 하나 제대로 건져 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더하는 능력 못지않게
덜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위대한
창조자들 가운데는 무언가를
덜어내거나 떼어냄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길을 연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의
덜어냄은 때로 섬뜩할 정도로 과감하다.
대문호 헤밍웨이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원고의 분량을 반으로 줄였을 것”이라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정보화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정보가 넘쳐나니 판단과 결정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나치게 넘치는 정보로 오히려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과도한 정보량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취해야 할지 판단
마비의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아주 단순한
성공 법칙>을 쓴 기업가 보 피버디는 비즈니스맨이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며,
그 핵심은 가능한 한 적은 양의 정보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여되고 파괴되어 오히려 아름다운
토르소
의도적으로
덜어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
덜어냄의 미학’을 우리에게 제대로 일깨워준 대표적인 미술 양식이
토르소다.
토르소란 머리와 팔,
다리를 잘라내 몸통만을 보여주는 조각을 말한다.
실제 인체가 이렇게 잘려 있다면 참혹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조각가들은 인체를 결코
토르소 형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소중한 인체를 어느 한 부분 소홀히 하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표현하는 게 도리요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대가 지나가고 중세도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렀을
무렵,
세월의 무게를
못 견뎌
팔 다리 등이 떨어져
나간 고대 로마 시대의 조각들이 다량으로 발굴되자 이것들이 예술가들의 눈에 새로운 빛을 비추었다.
예술가들은 이
토르소들을 통해 형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모두가 다 흉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린 신체 형상도 하나의 조형물로서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온전한 인체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신체의 미학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후 이에 자극을 받은 로댕과 부르델 등 근대의 조각가들은 의도적으로
토르소 혹은
토르소에 준할 만큼 신체 일부를 제거한
조각을
만들어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시도했다.
이
토르소 조각이
미술가들에게 가르쳐 준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인간도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물 가운데 하나,
수많은 형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늘 우월한 존재로 생각해왔다.
다른 동물이나 사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만물의 지배자’요 ‘만물의 척도’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인간을 조각으로 표현할 때 그 신체의 일부를 제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깨지고 망가진 조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을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간을 표현한 조각상에서 인간을 제하여 버림으로써 조각상 자체,
형상 자체에 주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남은 형상을 더욱 집중해 보게 만들었고,
그로부터 형태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지닌 사람과 사물,
세상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때 더욱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조형의 요소는 줄일수록 빈곤해지는 게 아니라 이처럼 줄일수록 풍요로워진다.
진정한 예술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파괴하고
제거함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것,
외양이 아니라 본질로 나아가게 하는 것,
핵심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거장 미켈란젤로도 흥분시킨 벨베데레의
토르소
고대의 유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토르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벨베데레의 토르소>일 것이다.
대단한 근육질의 남자가 동물 가죽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예전에는 헤라클레스로 여겨졌었다.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고 그 가죽을 걸치고 다니던 헤라클레스가 이를 깔고 앉아 쉬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각의 가죽이 사자 가죽이 아니라 표범 가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와의
논쟁에서 지고
자살을 결심한 그리스의 또 다른 영웅 아이아스를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인물이 누구이든 이 작품은 파괴되어 오히려 더욱 강렬하고 영웅적인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서양 조각사의 최고봉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엄청난 흥분과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역동적으로 뒤틀린 이 조각상의 자세와 선명한 근육 구조는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뒤이어 등장한 수많은 서양의 대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조각에 반해 미켈란젤로에게 사라지고 없는 얼굴과 지체를
새로 만들어 멋지게
보완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요청을 미켈란젤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는 파손된 조각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완벽해 거기에 무언가를 더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조각을 보완하는 일은 거부했지만,
이 조각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일에는 적극 나섰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걸작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통과 예수의 제자 바르톨로메오의 몸통 이미지를 바로 이 조각에서 따왔다.
토르소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동체,
몸통을 뜻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머리와 팔,
다리 모두를 제한 게
토르소다.
그러나 파손된 채 발굴된 고대의 조각이 모두 ‘완벽한’
토르소의 형태로 발견된 것은 아니다.
조각에 따라 머리만 떨어져 나간 것도 있고 머리는 남아 있는데,
팔 다리만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혹은 머리와 다리는 있는데 팔만 떨어져 나가거나,
다리는 온전한데 머리와 팔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이런 까닭에
토르소의 엄밀한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아도 머리나 지체 부분에 상당한
파손이 있으면
관행적으로
토르소라고 부르곤 한다.
그 정의의 경계선 안에 있든 그렇지 않든 이렇듯 여기저기 파손되어 우리에게 ‘
덜어냄의 미학’을 가르쳐 주는
토르소 형태의 조각은 매우 많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밀로의 비너스>와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를 꼽을 수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비록 양팔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고대의 서양 조각이자 가장 아름다운 비너스 이미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조각이 정말로 비너스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820년 멜로스 섬에서 출토되었을 때 분명한 근거는 없었으나 비너스로 추정되어 그렇게 명명되었다.
이 조각이 비너스가 아니라면 아마도 멜로스 섬에서 특별히 숭배하던 바다의 여왕 암피트리테일 가능성이 높다.
(암피트리테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고대의 거장 프락시텔레스의 원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연구
결과 프락시텔렉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30~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프락시텔렉스 원작 설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좌에 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명문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팔이 떨어져 나갔으니 이 조각 원본의 팔이 정확히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대의 여러 증거로 볼 때 왼팔은 들고 있고 오른팔은 왼쪽 무릎 앞으로 뻗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손이 왼쪽 무릎에 닿아 옷이 더 내려오지 않게끔 했을 것이고 왼손에는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비너스의 시선은 그 사과에 가닿게 된다.
물론 매우 멋진 조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부분이 다 남아 있었다면 시선이 분산되어 지금의 조각처럼 최고의 미녀 상으로 우뚝 설 수는 없지 않았을까.
기원전 190년 경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는 원작자가 누구인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1863년 그리스의 사모트라키(고대 그리스어로는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되어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로 불린다.
머리와 팔은 다 떨어져 나갔는데 날개는 남아 있어 이를 부각시킨 이름이다.
지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상의 존재와 대면하는 듯한 감동이 일어와 이 작품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조각의 하나로 꼽게 만든다.
이 조각의 정체는 승리의 여신 니케다.
니케를 기리는 한편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제단 등 복합적인 구성을 한 설치물의 일부였다.
사라진 오른팔은 아마도 손을 입에 대어 소리치기 좋은 형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노라면 승리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전체적인 형태는 여신이 뱃머리에 살짝 내려앉은 모습이어서 바닷바람을 맞아 휘날리는 옷자락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이 조각에서 압권은 커다란 날개가 뒤로 시원스레 쭉 뻗은 모습인데,
V자로 꺾인 날개와 휘날리는 옷자락이 거센 바닷바람,
곧 ‘도전’을 상기시킨다면,
수직으로 우뚝 선 몸통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오로지 승리만을
추구하는
여신의 의지,
곧 ‘응전’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어느 순간 조각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느껴진다.
만약에 머리와 팔이 다 있었다면 날개의 형상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횃불 같은 느낌도 많이 사그라졌을 것이다.
머리와 팔이 제거됨으로써 이 조각은 더욱 승리의 여신다운 인상을 갖게 되었다.
머리와 팔이 없으니 다리가 보인다 - 로댕의 ‘걸어가는 남자’
고대의 조각들이
이렇게 세월의 무게에 눌려
토르소가 되었다면,
이를 보고 감탄한 근대의 조각가들은 일부러
토르소를 제작했다.
작가의 의지와 의도에 따라 본격적인
토르소를 만들기 시작한 선구자의 한 사람이 로댕이다.
르네상스 이래 서양의 조각가들은
토르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명히 인식했으나,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토르소를 만들지는 않았다.
설령 조각상이라 하더라도 신체의 일부를 제거하는데 아직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로댕은 과감하게 이
트렌드를 주도해나갔다.
로댕의 <걸어가는 남자>를 보자. 머리와 팔이 철저히 생략되어 있다.
머리와 팔이 없다 보니 사람의 다리 형태가 보다 뚜렷이 눈에 들어오고 걸어가는 다리 동작이 얼마나 아름다운 균형과 리듬의 산물인지 명료히 인식할 수 있다.
이 자세의 원형은 <세례자 요한>에 있다.
로댕은 요한을 주제로 동일한 동작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머리와 팔이 다 붙어 있다 보니 관객의 시선은 아무래도 다리 쪽보다는 얼굴과 제스처가 풍부한 손 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만들면서 로댕의 관심은
자꾸 다리 쪽으로 쏠렸다.
굳건하게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다리가 전해주는 메시지와 뉘앙스가 매우 풍부하다고 느낀 그는 그 에너지에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머리와 팔을 제거한 새 조각을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보며 그는 “살아 있다,
손가락이 필요하지도 않고 이대로 충분하다,
진실이므로”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대사회는 치열한
경쟁 사회이고,
경쟁 사회는 보다 많은 자본과 스펙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보다 많은 것을 더하고 채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성취욕구가 강할수록
덜어냄의 가치를 소홀히 하기 쉽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우선순위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중요도와 상관없이 눈앞의 사안들에만 집착하게 된다.
자연히 종국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낡은
것의
계획적인 폐기야말로 새로운
것을 강력하게 진행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성과를 올리는 사람은 일에서 시작하지 않고 시간에서 시작한다며,
무엇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비생산적인 요구를 멀리함으로써,
곧
덜어냄으로써 보다 여유롭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고 권한다.
토르소가 바로 그 창조의 비밀을 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다.
꼭
토르소만이 아니다.
미술사의 많은 부분이
덜어냄의 미학을 통한 위대한 성취의 역사다.
추상화가들은 그림에서 형상을 제거해
새로운 미학의 길을 열었고,
반 고흐는
그림에서 그림자를
제거해 화사한 색채의 세계를 열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글자 그대로 표현을 최소화해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덜어냄의 미학을 추구해 우리의 삶에서 군살을
덜어내 보면 어떨까.
이주헌
이주헌은 미술평론가이자 대중에게 미술을 쉽게 전하는 아트 스토리 텔러다.
최근 저서로는 <혁신의 미술관>(아트북스),
<신화의 미술관>(아트북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