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강영운 기자

[사색-47] 황후의 침실에서는 교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만족과 기쁨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지요.
거친 숨결이 넓은 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지요.
러시아 황실의 원자 생산을 위한 ‘애국적 성관계’였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황후의 잠자리를 달군 건 불륜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이라는 의존명사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상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암시였습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잠자리를 중단한 그녀는 뭇 남성들과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성욕에 다소 무심해지는 환갑에도 40살 연하 미남을 침대로 끌어들였을 정도였습니다.
천하제일 색마 대회가 열렸다면, 능히 우승자는 그녀의 차지였을 것입니다.

예카테리나 젊은 시절. 1745년 작품. 프랑스 화가 루이스 카라바크 작품바람만 피웠으면 다행입니다.
그녀는 황제였던 남편을 폐위시키기도 했었지요.
본인이 황제에 직접 올라 러시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인식구조로 이런 유형의 여성은 악처이자 혼군(昏君)이었을 게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 여성이 러시아에서 표트르 대제(46화 사색 참조) 다음으로 존경받는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대제(영어로는 카트린 대제)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죽인 것도 모자라, 수 없이 많은 잠자리 상대를 가진 ‘색정광’을 러시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카테리나, 그녀는 누구인가

예카테리나는 독일 안할부르크 지역 지배자이자 프로이센의 장군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의 딸로 1729년 태어났습니다.
당시 독일은 수 백개의 도시 국가로 찢어진 채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느슨한 조직에 가까웠습니다.
프로이센이 그나마 가장 큰 경쟁력을 보였던 왕국이었지요.
소규모 도시 국가 지배자들이 유럽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왕족과 혼맥으로 얽히는 것이지요.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귀족의 언어로 통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강도 높은 신부수업이었지요.

결혼 당시 예카테리나.“꼭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하나요?가문에 빛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가 첫 만남을 하면서였습니다.
아우구스트는 어떻게든 딸을 그와 맺어주려고 애를 썼지요.
예카테리나는 나약하고 의지가 없는 표트르 3세에게 혐오의 감정을 내비쳤지만, 부모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러시아 최고 권력 엘리자베타 여왕 역시 예카테리나를 표트르 3세의 아내로 낙점지었지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1745년 두 사람이 결국 결혼식을 올렸지요.
예카테리나의 나이 고작 15살이었습니다.

“자자 사진 아니 그림 그릴 땐 웃읍시다.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아직 러시아 황위에 오르기 전 모습이다.

“제가 러시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러시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독일 지방의 여성이 러시아 황실의 일원이 되는 건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고, 추운 날씨에 적응해야 했으며, 신교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잠도 못 잔 채 공부하고 러시아식 예의를 배우면서 폐렴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플 때, 가장 위로가 되어야 할 사람은 마땅히 배우자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표트르 3세는 다른 여자 치마 속에 있었지요.
예카테리나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저작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지만, 쉽진 않았습니다.

캐서린의 첫 애인 세르게이 살티코프.그때 다가온 사람이 세르게이 살티코프였지요.
키 크고 잘생긴 백작 출신의 장교이자 시종실장. 왕족을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하는 멋진 보디가드였던 셈이었지요.
외로운 그녀가 세르게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같은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예카테리나의 회고록을 보시지요.
“내 첫 경험은 세르게이와 함께였다.
오죽하면 러시아 내에서는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아들 파벨이 사실은 세르게이의 아들이라는 말까지 퍼졌을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파벨은 공식적인 아버지 표트르와 똑같이 생겼었지요.
작고 못생긴 모습 때문에 세르게이의 핏줄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러시아 황위 계승자 부부의 모습은 ’막장‘과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 그는 예카테리나 정책을 반대해왔다.
1762년, 1월 엘리자베타 여왕이 승하합니다.
표트르 3세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지요.
두 부부는 겨울 궁전에 입성하면서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백성들에게 선언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독일의 강대국인 프로이센과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습니다.
1761년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고, 러시아가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요.
당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끈 ’프리드리히 대제‘를 상대로 이룬 성과여서 의미는 배가 됐습니다.


매국적 황제의 등장

“프로이센에서 이제 군대를 빼게.첫 황제의 취임 일성은 모든 러시아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로이센을 상대로 대승을 앞둔 상황에서 작전 중단(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를 존경한다네 표트르 3세 초상화.친가 쪽이 독일 유력 집안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이었던 표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를 선망했습니다.
그저 그런 제후국인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의 영웅담을 되뇌고 살았지요.
프리드리히가 러시아에 의해 무너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이득을 위해 러시아 황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요.
표트르 3세는 황제의 재목이 안됐던 셈이었지요.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결정으로 살아남았고, 다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끌며 현대 독일의 기틀을 다집니다.
‘역사의 서문’을 쓴 역사학자 칼 구스타브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표트르는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쿠데타를 계획한 러시아

러시아는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황제라는 사람이 개인적 사감 때문에 러시아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니요.
화가 난 건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군대와 귀족이 한 사람을 옹립합니다.
황후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도 승하한 직후, 황후가 그 자리를 계승했었지요.
체포된 표트르 3세는 감옥에 갇힌 뒤 정확히 8일만에 죽었습니다.
부검 결과는 치질과 뇌졸중.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나라 팔아먹은 표트르 꺼져라. 쿠데타가 일어난 러시아를 묘사한 모습.1762년 9월,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황제 자리로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1년 사이에 벌써 두 번의 대관식. 러시아는 내심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요.
위중한 시기에 잇따른 정권교체, 거기에 여자 지도자라는 불안요소까지 더해졌으니 무리도 아니었지요.

혼군인줄 알았더니 명군이었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모두의 불안을 단숨에 날려버렸습니다.
남편이 불륜에 빠진 사이, 그녀는 차근차근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군주 표트르 대제처럼 계몽주의적 역량을 쌓아올리고 있었지요.
물론 밤에는 불륜남이 그녀의 침대를 찾았지만요.
그녀의 치세 아래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단순히 내치만 잘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여성의 몸으로서 군사강국을 일굽니다.
러시아-튀르키예 전쟁(1770~1774년) 전쟁에서 승리해 흑해 제해권을 빼앗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반도를 탈환한 것도 그녀의 공이었지요.
오늘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우크라이나와 대립각을 세운 배경입니다.

군사지도자로서 이미지가 부각된 예카테리나 2세. 덴마크 화가 비길리우스 작품동유럽의 강대국 폴란드를 분할시킨 것도 예카테리나 치세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재임 기간 늘어난 러시아 영토가 52만k㎡에 달할 정도입니다.
벨라루스·리투아니아·노보로시아·북코카서스·동부 우크라이나도 이제 러시아의 땅이 되었지요.
러시아를 유럽화하려는 작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유럽의 지성을 모신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정치 철학을 배웠습니다.
아서 영, 자크 네커와 당대 경제학 석학들 역시 그녀가 설립한 자유경제협회에 가입해 활약했지요.
예카테리나는 유럽의 석학으로부터 배운 식견을 러시아의 정치에 반영하려고도 애썼습니다.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고 중산층을 두텁게 하기 위한 법령 발표도 했었지요.
여성 최초의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도 예카테리나의 공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 스몰니 연구소를 설립해 러시아의 지적 수준을 끌어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련된 스몰니 연구소. 앞의 동상은 레닌. <저작권자-AndrewShiva>
영웅호색은 남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나봅니다.
통치 과정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를 갈아치웠습니다.
하지만 허투루 만난 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남자들을 이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후의 남자들은 궁정에서도, 침대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증명해야 했었지요.
실제로 남편 표트르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킬 때도 군사적 행동을 이끈 사람은 예카테리나의 정부 그레고리 오를로프였습니다.

불륜이 국가의 이익으로

예카테리나의 정부 하면 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포템킨’이었습니다.
군인이었던 포템킨은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쳐 예카테리나의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기병대 소장으로서 러시아에 여러 승리를 가져다주었지요.
그리고 그는 호기롭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폐하의 영광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뿐입니다.
10살 연하의 포템킨은 그렇게 예카테리나의 침실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카테리나를 위해 언제나 싸움터에 나갔던 그의 용맹함을 기억해 20세기 러시아 제국은 전함에 포템킨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전함 포템킨’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지요.

35세 포테킨.

포템킨과 연애하던 45세의 예카테리나포템킨과의 열정이 식을 때 쯤에는 또 다른 남성과 내연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포템킨은 옛 여친(?)의 새 남자를 구해주는 ‘뚜쟁이’ 역할을 해줬을 정도였지요.
최고 권력인 예카테리나와 척을 져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한 예카테리나의 마지막 남성은 플라톤 주보프였습니다.
예카테리나가 점찍은 마지막 남성이었지요.
둘의 나이 차는 38살. 물론 예카테리나가 연상이었습니다.

성욕에 빠진 여왕...러시아를 만들다

예카테리나가 사망할 당시 그녀가 말과 수간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로 그녀의 성욕은 유명했지요.
진짜 사인은 뇌졸중이었습니다.
1796년, 11월 5일의 일이었지요.
그녀의 치세로 러시아는 조금 더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 봐야 했지요.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는 예카테리나를 묘사한 그림.미를 향한 집착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미남자를 찾아다닌 실력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수집했던 것이지요.
‘에르미타주 미술관’입니다.
소장품만 300만개에 달할 정도로 세계적인 박물관입니다.
표트르 대제가 만든 겨울궁전의 내실을 예카테리나 대제가 채웠지요.
한 여인의 권력과 성에 대한 욕망이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셈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 전시된 예카테리나 2세 조각상. <저작권자=Antonleto><네줄요약>ㅇ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여왕은 ‘대제’로 불리는(표트르 대제와 함께) 한 인물이다.
ㅇ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현대식 국가 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ㅇ그러면서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수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60세에는 38살 연하와 내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ㅇ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도덕군자보다 욕망하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역사가 증명한다.
<참고문헌>ㅇ니콜라스V. 랴자놉스키·마크D.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까치, 2011년.ㅇ다닐로프, 새로운 러시아 역사, 신아사, 201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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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때려 죽여라…바람난 남편이 전처와 자식 잔혹하게 고문한 이유 [사색(史色)]

말 탄 표트르 초상화.[사색-47] “아드님이 사망했습니다.
차디찬 감옥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건 다름 아닌 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수많은 매질과 주먹질로 몸은 만신창이. 세상이 무너질만한 장면이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낯에서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기분도 읽힙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지요.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세상을 떠날 때, 참척이라 표현합니다.
참혹할 참, 슬플 척.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주도한 이가 아버지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들은 귀한 자식이라기보다는 원수나 다름 없는 듯 보였습니다.
“녀석의 어미, 그 여자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리게.비정한 아버지는 이제 냉혈한 남편이 되고자 마음먹습니다.
죽은 자식의 친모이자 자신의 전 부인에게도 추방 명령을 내립니다.
그녀 역시 잔혹한 고문을 받은 직후였습니다.
가정을 부수려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세계사 역사상 이름 난 폭군이냐고요.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명군, 표트르 대제(PeterThegreat)의 이야기입니다.
유럽의 변방이던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군주이자 동시에 자신의 가정을 산산조각 낸 냉혹한 가장. 표트르 대제의 양면을 소개합니다.
이율배반의 사잇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마크 나티에가 그린 표트르 1세 초상화.

태생부터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표트르

“이름뿐인 왕.비정한 아버지의 가정사부터 돌아봅니다.
표트르는 1672년 러시아 왕손으로 태어났지만, 기반은 미약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 황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어서입니다.
러시아의 왕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미 첫 황후와의 사이에서 왕세자를 둘이나 낳은 상황. 러시아 왕좌를 두고 치열한 정치 게임이 벌어질 공산이 커진 셈이었지요.

“제가 왕이 맞긴 한 건가요? 1670년대 표트르 대제 어린 시절 초상화.표트르의 아버지인 러시아의 왕 알렉세이가 승하합니다.
왕좌엔 표트르의 이복형(표트르 3세)이 앉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내 세상을 떠납니다.
정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습니다.
두 세력의 대립이었습니다.
첫 황후의 소생인 소피아와 이반 남매와 두 번째 부인의 아들 표트르가 주축이었지요.
신하들은 계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건 소피아였습니다.
그녀가 러시아의 궁수·사격수 부대인 스트렐치를 이끌고 정권 장악에 성공하면서입니다.
곡절 끝에 합의안이 마련되지요.
이반과 표트르의 공동 즉위, 그리고 소피아의 섭정. 사실상 소피아의 시대가 열린 셈이었습니다.

표트르와 이반의 공동통치를 나타내는 동전. 뒷면에는 실세 소피아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정치 상황이 정확히 반영된 동전인 셈.

변방에서 배운 ‘강대국의 조건’

“표트르, 너는 나의 말만 잘 따르거라.왕이라는 이름은 허울뿐이었습니다.
모든 결정은 이복 누나 소피아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지요.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인 나탈리아는 표트르와 함께 여름별장으로 자주 떠났습니다.
사실상의 피난.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요.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멀어졌을 때, 비로소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표트르 역시 어머니와 여름 별장에서 ‘부국’의 길을 습득합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유럽인들에게서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을 배우면서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지요.
유럽은 점점 강해지는데, 점점 뒤처져 가는 러시아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유럽을 배워야 한다.
정치도, 문화도, 우리의 생각까지도.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표트르 대제를 묘사한 그림1689년, 그가 17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사내의 향기가 표트르에게 묻어납니다.
내면은 통찰과 결기로 가득 찼지요.
군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소피아의 손아귀에서 러시아를 해방하고, 유럽식 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표트르가 ‘친정’을 선언했을 때 많은 귀족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소피아의 자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손쉽게 표트르의 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네덜란드 목수의 도움을 받아서 표트르 1세가 직접 만든 배. 그는 유럽 문명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Ninara]

유럽을 배워라...수염 한올까지도

“러시아식 수염을 깎고 유럽인처럼 콧수염을 기르게.표트르의 핵심 정책은 ‘원대한 변화’였습니다.
정치·행정·군사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의식주 역시 유럽식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여겼지요.
1697년 조선업자로 분장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몸소 체험한 뒤였습니다.
(GrandEmbassyofPetertheGreat). 전통문화를 고집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생각이 깃들기 힘들다는 판단이었지요.

수염세 납세 증표 동전. 1705년.정통 보수 계층에서 극렬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나름의 카리스마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1698년 9월에는 러시아식 긴 수염과 러시아 전통 의복을 입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었지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정치행보.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국가는 새 수도를 요구합니다.
표트르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요.
그는 전통이 깃든 모스크바에서 개혁은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새로 점찍은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지요.
이 도시는 이탈리아와 독일 건축가가 디자인합니다.
그만큼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스러운 도시였지요.
러시아의 도시 명칭에 독일식 어미인 -부르크가 붙은 이유 역시 그가 얼마나 유럽을 선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고안 중인 표트르 1세.거칠게 밀어붙인 정책들이었지만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조업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광업과 목재 산업도 점점 효율성을 더해가면서 러시아의 경제도 튼튼해지고 있었습니다.

표트르 1세로부터 시작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저작권자 =Florstein(WikiPhotoSpace)]

나라는 부강해지는데...표트르의 가정은 정반대로

정치는 순항했지만, 가정은 삐걱거렸습니다.
“아내와 아이 빼고 다 바꿔라라는 게 개혁이라지만, 표트르는 아내와 아이까지 바꾸고 싶어했지요.
시작부터 정략결혼이었던 데다가, 아내 에우독시아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게 문제였습니다.
유럽 지향적이던 표트르에게 러시아 전통을 고수하는 에우독시아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지요.
표트르가 그토록 바꾸고 싶어한 전통 러시아의 모든 걸 에우독시아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표트르는 처음부터 정부를 들였고, 에우독시아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다른 여자와 대놓고 잠자리를 가지는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지요.

“이 결혼 정말 맞는 건가요? 표트르와 에우독시아 결혼 장면을 묘사한 그림. 두 사람은 러시아 전통에 따라 정략 결혼했지만, 이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너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사람이란다.
에우독시아의 복수는 자녀 교육을 통해 이뤄집니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교육을 받도록 고수하면서 표트르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로 키워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방법이었지요.
1698년 표트르가 공식적으로 에우독시아와 이혼을 선언합니다.
알렉세이의 나이 고작 8살이었을 때였지요.
황태자는 표트르를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표트르 1세의 아들 알렉세이. 그는 아버지 표트르를 끔찍하게 혐오했다.

해양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륙 국가’ 러시아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가정에서 불화가 싹이 트는 걸 모른 채, 표트르는 개혁에 더욱 집중합니다.
항구를 손에 넣기 위한 군사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지요.
대륙의 복판에 자리 잡은 지리적 요건이 조국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6세기부터 세계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지요.
표트르는 항구를 손에 넣기로 마음먹습니다.
항구는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발트해와 흑해. 두 거인이 입구를 딱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발트해를 지배하던 스웨덴 제국과, 흑해의 강자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막 역량이 올라오던 러시아가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1704년 나르바를 점령한 후 약탈하는 군인들을 막는 모습.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사우어바이드가 1859년 그린 그림.“스웨덴을 넘어야, 러시아가 선다.
표트르는 도전하는 군주였습니다.
스웨덴에게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요.
대북방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스웨덴 제국에게 앙심이 있던 여러 국가가 러시아에 힘을 보탰습니다.
작은 규모의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지요.
교회의 종을 녹이고, 고율의 세율을 걷었습니다.
총과 대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세계 최강 수준의 스웨덴 제국 군대와 정면 승부는 피하고 보급로를 끊는 전략도 빛을 발했지요.
20년의 전쟁에서 미소 짓는 건 러시아와 표트르 였습니다.
전쟁이 막을 내린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됩니다.
스웨덴령의 땅 일부를 러시아에 넘긴다는 내용이었지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1세.이제 러시아는 발트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의 이름 뒤에는 대제(TheGreat)가 붙게 됐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여름궁전 중심부에는 수사자를 죽이는 삼손 조각상이 자리합니다.
스웨덴의 국장이 수사자이기 때문입니다.

1717년 프랑스 베르사유를 방문한 표트르. 유럽에서 높아진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전쟁에서의 승리...그러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전쟁이 마냥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태자 알렉세이의 죽음. 그는 전장에서 영예롭게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었지요.
아버지 표트르의 명령으로 옥에 갇혀 고문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북방전쟁에서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늘 기대에 못 미쳤지요.
어쩌면 의도된 것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머니를 소박 놓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으니까요.

황태자 알렉세이의 아내 샬롯. 그는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 틀어진 건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세이가 아들(훗날 표트르 2세)을 출산한 날이었습니다.
아내 샬롯이 난산 끝에 사망한 것이었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온 날, 가장 소중한 이가 떠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때 표트르 대제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지요.
“국가의 일에 더욱 관심을 갖길 바란다.
알렉세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들 알렉세이(왼쪽)를 꾸짖는 표트르 1세. 니콜라이 게가 1871년 그린 그림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일화.
두 사람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모반 소문까지 번지기 시작합니다.
알렉세이는 표트르에게 벗어나기 위해 외국에 머물고 있었지요.
표트르는 즉각 귀환을 요구합니다.
알렉세이가 마지 못해 돌아오자 법원에 넘겨버렸습니다.
감옥에서 그를 맞이한 건 끔찍한 구타. 그는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닌 반역자에 불과했습니다.
표트르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사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1718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친모인 에우독시아 역시 수녀원으로 강제 감금을 당해야만 했었지요.
‘러시아판 사도세자’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 아들 살려내. 알렉세이의 친모 에우독시아.

표트르의 죽음, 분열에 빠진 러시아

러시아를 제국으로 일군 대왕의 삶도 시나브로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1725년 1월 그가 쓰러집니다.
요독증이었습니다.
과로에 과음까지 겹친 탓이었지요.
한 달 뒤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52세라는 짧은 나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5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지요.
표트르의 죽음은 반(反)개혁을 불렀습니다.
그의 손자인 표트르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였습니다.
손자인 표트르 2세의 아버지는 알렉세이. 표트르 대제가 잔혹하게 감옥에서 죽게 만든 바로 그 사람. 표트르 2세가 보수적인 정책으로 간 배경에는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의 역사는 다시금 일대 혼란으로 접어들지요.

임종 직전의 표트르 1세. 이반 니키티치 니키틴 1725년 작품.러시아가 표트르의 지도 아래 대국으로 성장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능력 중심 인재 정책을 펼친 것도 표트르의 공이었지요.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들여온 물건들입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지배하는 종교국가에서 세속주의 국가로 거듭나게끔 주도한 것도 표트르였습니다.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자 스탈린이 그의 리더십을 극찬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공산주의자가 전 근대 왕조 국가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이나 표트르가 러시아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것이었겠지요.

표트르 대제와 그의 시종 소년의 초상화. 그가 얼마나 편견없이 인재를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위대한 군주의 두 얼굴에 역사가 있다

러시아를 부유하게 만든 그였지만, 가정을 파탄 낸 것 역시 표트르였습니다.
러시아의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이자, 최악의 아버지이자 뻔뻔한 남편의 전형. 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아내를 학대하고 아들을 죽음에 빠뜨리게한 모순적 인물인 셈이지요.
가화만사성이라지만, 역사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음을 자주 봅니다.
역사는 때로 가정의 피 땀 눈물을 먹으며 진보하는 것일까요.
표트르와 그 가족의 삶을 보며 든 생각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기마상. [저작권자 =Lite]<네줄 요약>ㅇ후진국 러시아를 제국으로 키운 건 표트르 대제였다.
ㅇ그는 러시아의 모든 걸 유럽식으로 바꿔 부국강병을 이뤄냈다.
ㅇ러시아 전통을 고수한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ㅇ국가 차원에서 성군이지만, 가정에선 최악의 가장이었던 셈이다.
가화만사성은 표트르에겐 예외다.

<참고 문헌>ㅇ린지 휴스, 표트르 대제-그의 삶·시대· 유산, 모노그래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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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성기와 고환을 선물…트랜스젠더는 ‘신의 축복’이었다? [사색(史色)]

[사색-46]“남과 여. 세상에는 두 성별만이 존재한다.
태곳적부터 인류는 굳건히 이런 믿음을 가져왔지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건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반골이 존재해왔습니다.
주어진 성별대로 살지 않겠다고 외친 자들 역시 오랜 시간 투쟁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혹은 중간의 회색지대 어딘가로 들어가기를 소망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오늘날의 언어로는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미국 배우이자, 미국인 최초의 트랜스젠더 여성인 크리스틴 요르겐센.녹록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공동체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집단적으로 돌팔매를 맞거나, 때로는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인권 의식이 비로소 싹을 틔웠으나, 트랜스젠더는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역사 속에서 늘 소박맞은 건 아니었습니다.
성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들이 외려 융숭한 대접을 받던 시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기 사건 때문에 모든 트랜스젠더들이 돌팔매질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트랜스젠더는 귀한 몸이시다…고대 그리스의 속사정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세하고, 여성 옷을 입으며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이 아니었지요.
이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꽤 존경받는 사제들이었습니다.

양성적 여신 키벨레를 모신 사제를 묘사한 고대 로마의 동상. 남성이지만 여성적 모습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 사제들은 거세를 하고 여성 옷을 입었다.
<저작권자=Anna-KatharinaRieger>
그리스의 사제들이 ‘트렌스젠더’가 된 이유는 이들이 모신 신들의 정체 때문입니다.
이들이 모신 신의 이름은 키벨레와 아티스. 고대 튀르키예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로마에까지 전파된 유명한 신들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등장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시지요.

“자다가 그만...딸을 낳아 버렸소. 제우스 흉상. 20세기 드로잉.여신 키벨레는 제우스의 딸입니다.
(여러 설이 혼재하지만)제우스가 몽정을 통해 낳은 자식입니다.
그래서인지 키벨레는 태어났을 때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 다 지니고 있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를 악마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스스로 거세하도록 음모를 꾸몄고, 이에 성공하지요.
“싹둑. 거세된 성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성기가 닿은 땅에서 아몬드 나무가 자라난 것이었습니다.
당대 시민들의 젖줄이었던 상가리우스강의 딸 나나가 이 아몬드를 품었습니다.
그리고 나나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회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사람이 아티스라는 미모의 남성이었지요.

거세한 신 키벨레의 동상.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린 신이다.
그의 사제들은 거세를 한 후 여성처럼 행동해야 했다.
<저작권자=ChrisO>
여기서부터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키벨레가 아티스를 보고 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엄마(혹은 아빠?)가 자기 아들을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만 것이지요.
아티스가 이웃나라 왕의 딸과 장가를 가려고 하자, 키벨레가 이를 막아섭니다.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킨 아티스는 자기를 거세하고 맙니다.
대를 이은 성기 절단. 미남자 아티스의 최후였습니다.

최고의 인기 신들은 거세를 했다

비극이 얽히고설킨 탓이었을까요.
키벨레와 아티스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가장 인기 많은 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신화가 고대 그리스까지 닿은 배경입니다.
두신 모두 ‘거세’와 연관돼 있으니, 이들을 모시는 사제들 역시 거세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지요.

거세한 후 죽음을 맞이한 아티스의 동상. <저작권자=archer10(Dennis)>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에서 키벨레의 인기는 다른 신들을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다종교 국가인 로마에서 ‘마그나 마르테’(위대한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포에니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당시 고대 로마의 상황도 그녀의 인기를 올리는 배경이 됐습니다.
마침 이 신을 모신 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요.
고대에서 트렌스젠더는 신기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스키타이에서도 거세한 중성 남성 사제들 에나리가 있었지요.
이들 역시 고대 그리스 사제들처럼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처럼 말했습니다.
이들이 모시는 아리스탐파사가 중성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샤먼 사제로 통했고 스키타이 사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17세기 조각가 베르니니가 조각한 그리스로마 신화 속 헤르마프로디토스.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닌 인물로 트랜스젠더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저작권자=Pierre-YvesBeaudouin>
트랜스젠더 신들이 존경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양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건 다산과 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농경이 경제생활의 전부였던 당시에는 노동력이 중요한 자원이었고, 다산은 부와 직결되는 요소였지요.
양성을 지닌 신은 그만큼 고대의 시민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인정받은 존재였다

다신교 시대가 저물고, 유일신 종교가 자리잡습니다.
기독교의, 기독교에 의한, 기독교를 위한 지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전환자의 위상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공인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종교는 때론 그들을 인정하고, 이따금 성인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가 어떤 배경으로 트랜스젠더들을 받아들인 것이었을까요.
트랜스젠더의 삶을 선택한 수많은 기독교인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귀족 여성 아나스타샤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이집트에서 수도사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막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마리아는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여성성을 벗어던진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수도사는 남자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남자 수도사 복장을 하고 남성 행세를 하면서 평생을 살아갔지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거친 음식을 먹고, 불편한 잠자리에서 자야 하는 삶이었지만, 그녀는 신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자기 삶이 다한 이후에 그녀가 동방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될 수 있는 배경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트랜스젠더들

중세에는 수 많은 여성들이 더 가까운 거리에서 신을 모시고자 남성행세를 했습니다.
마리나라는 여성도 아버지를 설득해 수도원에 들어간 경우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의 밀고에 의해 마을 처녀를 임신(?)시켰다는 모함을 듣고 파문당하기에 이르렀지요.
마리나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대신 그 처녀의 아이를 자신이 직접 키웠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만 그는 끝까지 비밀을 지켰습니다.
) 그 아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모든 진실이 밝혀집니다.
사실은 그가 여자였고, 처녀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었다는 사실을요.
성별을 속였지만, 오늘날 추문((I‘m 신뢰에요)과는 정반대의 미담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양쪽에서 마리나가 성인으로 추대된 배경입니다.

성 마리나의 일대기를 담은 중세시대 삽화. 오른쪽 상단에 마리나가 죽은 후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을 묘사했다.
하나님을 더욱 잘 모시고자 했던 트랜스젠더들의 활약 덕분이었을까요.
중세 교회에서 성전환자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표현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지요.
때로는 신의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지기도 했었지요.
실제로 14세기 프랑스 소설 중 하나인 ’샹송 드 제스테‘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는 남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천사로부터 고환과 성기를 선물 받지요.
마치 신의 축복인 것처럼 말입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트랜스젠도를 일종의 축복으로 묘사한 중세 시대 이야기 책 ‘샹송 드 제스트’ 삽화.미국의 유명 사학자인 캐롤라인 워커 바이넘 교수 역시 중세 유럽인들이 성전환에 관대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는 “중세 시대 사람들은 ‘어머니 예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서 “이는 예수를 남성과 여성 중간적 존재로 여겼던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었지요.

근대는 진보가 아닌 퇴보였다.
..트랜스젠더에게 있어서

19세기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인권 의식이 싹을 틔운 시기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트랜스젠더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지요.
중세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혐오의 정서가 19세기부터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트랜스젠더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조항을 만든 때 역시 1885년이었지요.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여자 옷을 입은 남성들을 처벌하는 조항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었지요.
악명높은’3조법‘(thethree-piecelaw)이었습니다.
여전히 수 많은 트랜스젠더 여성들이 혐오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11월 20일이 국제트렌스젠더 추모의 날로 지정됩니다.
두 트랜스젠더 여성이 11월 같은 달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용과 다양성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척박한 삶을 살아갑니다.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덴마크 화가 릴리 엘베의 초상화. 동료 게르다 베게너가 그린 작품. 그(녀)는 영화 데니쉬걸의 모델로 유명하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트랜스젠더들이 일궈낸 역사적 진보가 있음을요.
의학적 성취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주인공인 앨런 하트 역시 트랜스젠더였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인류에 공헌한 사례를 차례차례 소개하겠습니다(nexttime...)오점으로 가득한 사기꾼이 한 사람이 집단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네줄요약>

ㅇ거세 후 여성 옷을 입은 트랜스젠더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ㅇ이들은 대개 중성적 신을 모시는 사제들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ㅇ기독교에서도 수도승이 되기위해 남장을 한 여성들이 시성되기도 했다.
ㅇ트랜스젠더는 중세 말기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처벌받기 시작해 근대에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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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을 때 성적 쾌감...내연녀에 때려달라 애걸복걸한 소설가의 사생활 [사색(史色)]

[사색-44] 문학사에서 길이 남을 소설가 하면 내로라하는 대문호의 이름이 몇 떠오릅니다.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톨스토이나, 영문학의 아버지 셰익스피어, 미국 문학의 시대를 연 마크 트웨인도 생각납니다.
근대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인간 실존적 불안과 부조리를 묘사한 프란츠 카프카도 빼 놓지 않으시겠지요.
저에겐 또 다른 맥락에서 생각나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소설가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입니다.
이름이 생경하시다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호의 이름이 문학사보다는 정신분석학에 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채찍질은 인류의 가장 큰 형벌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도 등장했다.
그림은 윌리엄 부게로의 ‘채찍을 맞는 예수 그리스도’(1880).
그렇습니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피학적 성향을 뜻하는 ‘마조히즘’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선사했지요.
오랜 세월 자허 마조흐란 이름은 언제나 성적으로만 주목받아 왔습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뒤편에 숨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텍스트가 다시금 평가받기 시작했던 건 1968년. 프랑스의 유명 철학자 들뢰즈가 그의 작품을 분석한 ‘마조히즘:냉정함과 잔인함’을 출간하면서였습니다.
그는 자허 마조흐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지요.
“마조히즘은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마조흐는 복잡다단한 인물입니다.
마조히즘의 이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사색하려는 배경입니다.

젊은 시절의 자허 마조흐.

의외로(?) 보수적 집안에서 태어난 자허 마조흐

자허 마조흐는 1836년 오스트리아 렘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 자랐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제국 경찰청장,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귀족 여성이었습니다.
집안 종교는 독실한 가톨릭. 신분과 종교의 조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보수적 가풍 속에서 자라납니다.
‘자유’라든가, ‘개성’이라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지요.
좋은 가문의 반듯한 아들로서의 가면을 벗어던진 건 그가 대학에 입학한 1854년부터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두 번째로 큰 도시 그라츠에서 법학·수학·역사를 공부했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역시 역사였습니다.
마조흐는 이때부터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지요.

자허 마조흐는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로부터 민속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는 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신화 속 장면을 그린 삽화.
역사 속 인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쌓아갑니다.
그라츠에서 만난 예술가와 교류하면서 자유로운 생각들을 시나브로 쌓아갔지요.
오스트리아 민속과 문화를 잘 녹여낸 덕분에 평가도 좋았습니다.
그는 곧 문학이라는 자유에 빠져들었지요.
특히 그는 오스트리아 갈리시아 지방 민중의 삶을 소설 속에 잘 녹여내 당대 소설가로부터 호평받았지요.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헨릭 입센이 자허 마조흐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 인물들입니다.

문제적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탄생

1870년은 자허 마조흐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출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세베린이라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완다라는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요.
하지만 그 방식이 괴이쩍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의 노예가 되고 싶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그러고는 점점 더 가학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알몸에 모피를 입은 채로 자신을 채찍질해달라는 해괴한 부탁이었습니다.

1555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거울 속의 비너스. 모피를 입고 있는 누드는 마조흐 소설의 모티브가 됐다.
때론 흑인 여노예를 시켜 세베린을 기둥에 묶게 한 후 채찍질을 하곤 하지요.
세베린은 그녀에게 가혹행위를 당할수록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완다의 마음은 다르게 흘러가지요.
세베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조를 잃은 아름다운 여인과 폭정 그리고 잔인함, 이 세 가지만큼 내 욕망을 자극하는 건 없다.
그의 소설은 꽤 인기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고통과 복종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데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지요.
불과 100년 전 사드의 작품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달랐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1902년 삽화.하지만 당대 모든 이들이 그의 작품을 알게 된 건 한 의사 덕분이었지요.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리차드 본 크래프트 에빙이었습니다.
1886년 그가 성적 병리학을 정리한 책 ‘사이코패시아 섹슈얼리스’였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성도착증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책이었지요.
이 책에서 가학성애와 피학성애를 설명하면서 ‘사디즘’, ‘마조히즘’이 최초로 등장하지요.
에빙은 ‘마조히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특정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하면서 느끼는 성적 감정. 자허 마조흐의 작품은 이제 ‘마조히즘’이란 용어에 잠식되는 처지에 놓이지요.
그는 자신의 소설 작품이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것에는 불쾌함을 느꼈습니다.

‘마조히즘이란 용어를 만든 본 크래프트 에빙.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이었어?

소설이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자허 마조흐 본인 자체도 고통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설대로 피학성애를 느끼는 것이었지요.
‘모피를 입은 비너스’ 역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었습니다.
파니 피스토어라는 귀족 출신 과부와 연애할 때 실제로 서약서를 교환하고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었지요.
파니가 잔인하게 그를 대할 때 쾌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자허 마조흐는 자신의 이름을 하인들이 많이 쓰는 ‘그레고어’로 쓰고 하인처럼 굴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나를 때려줄 수 있어요? 미망인 파니 피스토어와 주종 관계를 맺은 자허 마조흐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의 사진.
피학성애는 연애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자신과 결혼한 아내 오로라에게 채찍으로 때려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자허 마조흐 본인이 사냥감이 될 테니, 보피를 입고 사냥꾼처럼 자신을 쫓아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피학성애가 너무 심한 나머지 어느 날은 딸 샤샤 앞에서 자신을 때려달라고 부탁까지 하게 되지요.
오로라는 더 이상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이혼을 결심합니다.
자허 마조흐가 신문광고에 자신의 아내와 성관계를 할 힘센 남자를 구해보자고 요청한 뒤였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는 자허 마조흐의 삶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었습니다.

자허 마조흐의 부인 ‘오로라’는 남편의 피학성애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혼했다.

단순한 변태는 아니었던 자허 마조흐

그러나 그를 단순히 ‘변태적 인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자허 마조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대인에 대한 공감을 듬뿍 드러냅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점점 독버섯처럼 퍼진 ‘반유대주의’에도 공개적으로 맞서 싸웠었지요.
어렸을 적 살았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영주에 대한 농민반란을 본 뒤로 그는 언제나 약자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비참한 수레에, 빨간 피가 흘렀고, 그 피를 개가 핥았다.
가난을 못 이기고 봉기한 농민의 처참한 결말을 본인의 책 속에서도 여럿 남겼지요.
군국주의로 치닫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독일을 비판한 것도 그였습니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 걸린 한 선거 포스터.유대인은 우리 민족의 적이라는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그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변태적 작품으로 독해하기엔 아까운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높은 여성 평등 의식 때문이지요.
마조히즘은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습니다.
남성 스스로 강한 여성에 예속되기를 원하는 피학적 성향을 일컫지요.
남녀의 성 관념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 작품 속 여성 해방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소설 속 대사를 옮겨 적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적이나, 노예, 혹은 폭군만이 될 수 있다.
결코 동반자는 될 수 없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질 때에만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프랑스 작가 장 뒤 튀르가 “사랑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조히즘은 여성 상위의 권력관계를 상상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1890년대 마조히즘 이미지.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철학자 들뢰즈, 평론가 롤랑 자카르 같은 이들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여성을 끊임없이 악마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적 작품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자허 마조흐

1968년 철학자 들뢰즈는 ‘마조히즘’을 분석한 책을 출간하며 한발 더 나아갑니다.
마조히즘을 단순히 맞을 때 쾌감을 느끼는 피학성애라는 단순한 해석을 거부하지요.
오히려 쾌락은 맞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긴장 속에 놓여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맞기 직전까지의 과정에서 오는 불안이 쾌락의 근원이라는 해석이지요.
실제로 자허 마조흐의 작품 속에는 채찍을 때리는 장면보다, 내리치기 직전의 장면이나, 모피를 벗는 장면을 정지된 사진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허 마조흐만의 독창적인 미학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노년의 자허 마조흐. 정신병을 앓으면서 그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쾌락을 추구하다 50대 초반에 정신병을 앓게 되면서입니다.
1895년 린드하임에서 사망합니다.
사망하기 두 해 전까지도 반유대주의에 저항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던 그였습니다.

1994년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 한 장면. <사진 출처=IMDB>오늘날 그의 텍스트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미술계에서도 ‘마조히즘’은 하나의 주요 키워드이지요.
1960년대 크리스 버든, 비토 아콘치는 피학적 신체미술을 선보여 마조히즘적 미술(MasochisticArt)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 역시 그가 복잡다단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도덕과 방탕을 동시에 지닌 우리처럼요.

우크라이나 서부 렘브레그에 마련된 자허 마조흐의 동상. 그가 태어날 당시 이 땅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다.
<네줄 요약>ㅇ맞으면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즘’은 오스트리아 소설가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따왔다.
ㅇ그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피학성애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ㅇ마조흐는 또한 평생을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워 온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ㅇ야한 글 쓰는 사람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닌가 봅니다.
(제 얘기는 아닙니다.)<참고 문헌>

ㅇ윤시향, 자인한 쾌락-자허 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 2003년

ㅇ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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