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管仲)을 공자는 어떻게 보았는가?

 


 관중(管仲)을 공자는 어떻게 보았는가?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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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는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에 대한 공자의 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공자는 관중을 긍정적으로 보았는가 부정적으로 보았는가를 두고서 종종 논란이 있어 왔다.
대체로 성리학자나 주자학자들은 비판적이다.
그래서 주자학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의 경우도 관중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논어’에는 한 차례 비판적 언급과 두 차례 긍정적 언급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자의 이 세 언급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공자가 관중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상적이다.

먼저 ‘팔일편 22’에서 공자는 관중이 예를 알지 못했다[不知禮]고 강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제후라야 다른 임금을 만났을 때 우호를 다지기 위해 반점(反坫)이라는 탁자를 두고서 술잔을 거기에 놓을 수 있는데 관중도 자기 집에 반점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넘본 범상(犯上)을 했기에 일의 이치[事理=禮]를 알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관중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

관중은 원래 제나라 공자 규(糾)를 섬겨 난을 피해 노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 양공(襄公)이 시해되자 공자 규는 동생인 공자 소백(小伯)과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였다.
관중은 이 과정에서 공자 규를 도와 소백에게 활을 쏘아맞췄다.
그러나 하필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쇠고리에 맞았고 소백은 그후 공자 규를 꺾고 왕위에 오른다.
이 사람이 제 환공이다.
환공은 노나라에 압력을 넣고 공자 규를 불러 죽이고 그를 섬겼던 관중도 잡아죽이려 했다.
이때 환공을 섬겼던 포숙아(鮑叔牙)가 나섰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포숙아다.


“주군께서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려면 이 포숙아만으로 충분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이 꼭 필요합니다.”

환공은 포숙아 말을 받아들여 자기를 죽이려 했던 관중을 용서하고 재상으로 삼았다.
재상 관중은 제도를 개혁하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구분했다.
도성 또한 사향(士鄕) 15군데와 공상향(工商鄕) 6군데로 나누고, 지방을 오속(五屬)으로 구획해 오대부(五大夫)가 나눠 다스리도록 했다.
염철관(鹽鐵官)을 두고 소금을 생산하면서 돈을 제조하게 했다.
이렇게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과 수공업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했고,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했다.
제환공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관중은 고대 중국에서 부국강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 이런 관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형적인 역사 인물 평가이다.
지금 한국 역사학자들이라면 관중을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하여 바로 파묻어버릴 것이다.
공이 90이라도 1의 도덕적 하자를 들어 끌어내리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 풍토이기 때문이다.

다시 ‘논어’로 돌아가자. ‘헌문편 17’이다.

자로(子路)가 말했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공자 규(糾)를 죽였을 때 소홀(召忽)은 죽었는데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습니다.
(관중은) 어질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번 모으면서도 무력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공자는 제후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쓰지 않은 점을 들어 관중을 어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 어짊을 바라보는 공자 자신의 시각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헌문편 18’에서는 바로 이런 공자 시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공(子貢)이 말했다.

“관중은 아마도 어진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도 능히 자기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된 것은 한 번에 천하를 바로 잡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처럼 알량한 어짊을 베풀다가 하수구에 굴러떨어져 죽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수야 있으랴!”

정(正)보다 중(中)을 중시했던 공자의 폭넓은 시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인(仁)을 공자는 소인(小仁)으로 보았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만약에 이런 소인(小仁)으로 백성들 환심을 사려한다면 공자는 필부필부의 알량한 어짊이라고 비판했다.
부인(婦仁), 즉 아녀자의 어짊이 그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풀 수 있을 때는 정도(正道)에만 머물지 말고 중도(中道)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공자 생각임을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른 도리도 중요하지만 특수상황에서는 적중된 도리를 쓸 줄 아는 지도자, 그런 지도자가 큰 지도자라는 말이다.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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