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기억과 기록

오래전 일기를 펼쳐 보는 버릇이 있다.
가끔 일기 속 내용이 내 기억과 달라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일본의 ‘아오모리’는 사과로 유명하지만 내겐 눈의 도시로 각인돼 있다.
눈이 내리면 항상 그곳이 생각나는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아오모리 미술관까지 헤맸던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헤매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날 마신 핫 초코와 메밀 우동의 맛은 미슐랭 별이 아깝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지금 기억하는 아오모리다.
하지만 실제 그날 내 노트의 기록은 맹추위와 폭설로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찔 때마다 잘못된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린 내 실수에 대한 자책만 빼곡했다.
어디에도 아름다운 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는 이처럼 다르다.

인간은 영화를 돌려보듯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비트로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의 뇌는 이야기 단위로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압축과 인과를 사용한다.
‘왕이 있었다, 왕비가 있었다’ 사이에 ‘왕비가 그 비통함에 죽었다’라는 인과를 꿰어 이야기를 압축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억의 오류가 일어난다.
겉보기에 명백한 사건이 사건 당사자의 기억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라쇼몽’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과거는 끝없이 재해석된다.
시간이 지나며 생긴 기억 속 모호함은 자신의 현재 상황과 감정에 의해 재편집되어 새로운 과거, 즉 추억으로 등재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과 실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오모리에서의 내 기억은 눈으로 아름답게 채색됐지만 그때 내가 경험한 진짜 가치는 어쩌면 폭설로 순식간에 사라진 길 위에서 현명히 대처하고, 버스 안내도를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억은 방울방울 아름답지만 우리는 종종 기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경험하는 순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저지른다.
이것이 때로 기억보다 기록이 더 가치 있는 이유다.

더하기보다 빼기

새해부터 신경외과 진료실에 앉아 뇌 MRI 사진을 봤다.
작년부터 이름이나 명사가 기억나지 않아 정확한 단어 대신 ‘그거, 저거’ 같은 대명사를 쓰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혹시 치매가 아닌가 하는 불안이 몰려왔다.
결론적으로 뇌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태가 좋으니 10년 후에나 점검차 다시 찍자는 의사에게 “그런데 왜 이러죠?”라는 말을 반문했다.
MRI 사진이 걸려 있는 진료실에서 50대 중반의 의사는 내게 자신도 멀쩡한 척 앉아 있지만 어젯밤 아내와 대화 중 와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버벅였고, 콘퍼런스에서도 말이 꼬이기 일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도파민 범벅의 과도한 정보에 노출되는 20~30대에서도 엿보이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의 처방은 나쁜 음식을 줄이고, 기억나지 않는 단어가 있으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해내고, 인터넷 사용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하라’ 대신 ‘하지 말라’에 방점을 둔 의사의 처방을 곱씹다가 도파민 중독, 가속 노화, 단순 당처럼 내가 진료실에서 사용한 단어 중에 불과 몇 년 전이라면 쓰지 않았을 말이 수십 개가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이 세계에서 선택 장애는 개인이 아닌 구조적 문제이며 나아가 기억력 감퇴로까지 확장된다.
오죽하면 도쿄 같은 대도시에 책이 딱 한 권 밖에 없는 서점이 인기를 끌까. 사물로 꽉 들어찬 방에서 원하는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법은 비우는 것이다.
무한대의 가능성이 종종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다.
가끔 선택의 옵션을 아예 없애는 게 답일 때도 있다.

뇌의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인터넷을 줄이는 것보다 주말에는 디지털 기기를 아예 끊는 쪽이 낫다.
담배를 줄이는 것보다 끊는 게 쉬운 것처럼 이럴 땐 100퍼센트 이행이 50퍼센트 이행보다 더 쉽다.
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과잉 정보로 파생되는 ‘의견의 과부하’다.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실에서 더 중요한 건 할 것이 아닌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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