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
연금 개혁 논의에서 빠진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기회비용이다.
앞으로 정부는 더 많은 재정을 지출해야 한다.
기업의 투자 위험도 덜어줘야 하고,
재분배도 다듬어야 한다.
현대화폐이론을 믿기에는 아직 불안하니,
결국 정부는 지속가능한 재정을 위해 세금을 올려야 한다.
감히 어느 정당도 세수가 확실한 부가가치세를 올릴 수 없다.
심지어 민주당도 1주택자와 일시적 2주택자의 종부세를 완화하겠다고 공약한 적 있다.
세금은 문명의 기본이자 자유의 비용이지만,
우리나라는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적 불신 탓에 세금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있다.
그만큼 세금을 올리기는 더 어렵지 않을까. 이미 우리나라 복지예산의
태반은 의료보험과
노령연금으로 지출되고 있다.
그런데 한정된 소득을 노후 대비에 더 지출하면 그만큼 지금 필요한 일에 소홀해지는 건 아닐까. 앞으로 사람들의 소득은 더 불안정해질 텐데,
그렇다면 각자의 소득에서 보험료가 자치하는 비중이 더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노후 대비를 위해 너무 많은 기회비용을 감당하는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보험이다.
보험은 안정된 소득을 갖고 꾸준히 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장 유리하다.
유럽 복지국가도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험을 주로 활용했는데,
앤서니 기든스는 기존 복지국가가 정규직 근로자,
중산층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줬다고 지적했다.
기존 복지국가가 아픈 사람에게 무상에 가까운 의료서비스를 줬다면,
사회투자국가는 아플 가능성을 낮췄다.
기존 복지국가가 두터운 연금을 약속했다면,
사회투자국가는 일자리를 찾을 능력을 약속했다.
스웨덴,
영국,
독일 등 선진적인 복지국가는 모두
새 천 년이 시작되기 전에
사회투자국가로 전환했다.
우리나라도 사회투자국가를 장기적인 방침으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주
참고한 학자가
바로 사회투자국가를 대안으로 퍼뜨린 앤서니 기든스였다.
하지만 결국 우리나라는 이탈리아 같은 낡은 복지국가가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보다 복지 지출이 적다는 점일 것이다.
국민연금은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함께 노후를 대비하게 돕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노후 대비만 중요할까. 애초에 지금 안정된 소득을 벌 수 없으면,
국민연금이 있어도 무의미하지 않을까. 어쩌면,
'더 내고 더 받는 연금'은 앞 세대가 뒤 세대를 착취하는 게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착취하는 걸지도 모른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유창선
진즉에 사과하고 명품백 사후 소재 밝혔어야 할 일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 2일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으로부터 주요 사건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김 여사 관련 청탁금지법 고발 사건은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증거와 법리에 따라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여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서울중앙지검은 형사1부에 검사 최소 3명을 추가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일 4차장 산하인 반부패수사3부,
공정거래조사부,
범죄수익환수부에서 각각 검사 1명씩 총 3명을 형사1부에 투입했다고 한다.
4차장 산하 부서들은 주로 권력형 비리와 부패사건 등 난도가 높은 사건들을 담당한다.
수사에 임하는 검찰의 이같은 분위기를 보면 그냥 김 여사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요식 행위적 수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는 검찰이 특검법을 피해가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의심도 있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수사에 임하는 검찰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7일 대검찰청 출근길에서 이번 수사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에서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서만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하고 처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말씀을 덧붙이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수사 결과를 지켜봐달라는 것이 이 검찰총장의 말이다.
야당의 해석 보다는 오는 9월이면 퇴임하게 되는 이원석 총장이 차기 검찰총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임기 안에 이 사건에 대한 매듭을 지으려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불편한 반응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당분간 검찰과 대통령실의 긴장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김건희 여사는 2022년 9월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지인 최재영 목사로부터 300만 원 상당의 명품백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최 목사는 가방 전달 과정을 몰래 촬영해 유튜브 채널 ‘서울의소리’에 공개했고,
서울의소리 측은 지난해 12월 김 여사와 윤 대통령을 청탁금지법 위반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의 수사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청탁금지법에는 공직자의 배우자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기에 피의자가 아닌 김 여사에 대한 소환 조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까지 검찰이 밝힌 수사 대상은 ‘명품백 수수 의혹’이다.
도이치모터스 관련 주가조작 의혹 수사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비교적 단기간에 명품백 수수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고 법적 책임 여부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검찰수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통령실의 대응 방식에 따라서는 진즉에 매듭지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명품백’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파우치를 받은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서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서는 법적,
정치적 논란이 따를 문제였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사안의 본질은 정치공작’이라는 입장만 고수하면서 국민들이 묻는 명품백의 소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당사자인 김 여사나 윤 대통령의 사과가 없었음도 물론이다.
물론
몰카를 동원한 정치공작임은 맞지만 받은 것이 사실인 이상 그렇게만 말하고 지나갈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이 의혹에 대해 지난 2월 KBS와의 특별 대담 방송에서 "제가 보기에는 그것을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라면서도 "시계에다가 몰카를 들고 온 정치공작이라며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박절하게 대하긴 참 어렵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국민감정을 고려하지 못한 대단히 미흡한 설명이었다.
진즉에 사과를 하고 받은 명품백을 어떻게 했는가를 밝혔다면 이 정도로 오래갈 이슈는 아니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용산의 태도가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을 자초한 셈이다.
한동훈의 도서관 책읽기는 유죄인가
유창선
도서관 가서 책읽는 정치인을 비난하는 MBC를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인이라는 공인에게는 사생활이라는 영역이 따로 있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사생활까지도 공개되고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입니다.
그러니 정치인은 일거수 일투족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MBC 사이트에 지난 5월 13일 정승혜 기자의 이름으로 올라온 ‘한동훈은 왜 집에서 책을 안 읽을까?
’라는 기사는 좀 엽기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언론이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말 정치뉴스란에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도서관에 와서 책 읽었다’는 기사가 우수수 쏟아졌습니다.
총선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한 위원장은 공개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뒤 몇 번 식사 모임을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졌는데 '공공 도서관에서 SF소설 읽기'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와서 책읽는 한동훈 전 위원장이 모습이 무척 싫었던 모양입니다.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니 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부촌 중 하나인 타워팰리스에 사는 한 위원장이 왜 굳이 서민들이 오가는 공공 도서관에 가서 SF 소설책을 펴들고 앉아 있었을까?
김근식 국민의힘 전 비전전략실장의 말처럼 대중에게 ‘오픈된 공간인 양재 도서관에 가서 책을 봤다는 건,
책을 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면서 근거를 알 수 없는 상상의 나래를 기자는 마음껏 폅니다.
“소설책이 보고 싶었으면 집에서 인터넷 서점에 주문해서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공공 도서관에 온 건 사진을 찍히기 위해 나타난 것이란 얘기이고,
나름 여러 가지 계산을 깔고 한 행동일 것입니다….. 본인이 사퇴해서 치르는 전당대회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등판하려니 명분이 좀 부족하고,
그래서 이미지 정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전당대회에 나가기 위해 이미지 정치부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이 도서관에 가서 책읽는 모습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작 사진을 찍은 것은 본인도 아니고 누군가가 찍은 사진이 알려진 것도 우연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쯤되면 MBC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보도했던 한동훈과 채널A 이동재 기자와의 검언유착 소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가 언론의 보도를 갖고 ‘소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당시 보도가 아무런
근거
없던 내용이었음이 법원의 판결에 의해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팩트가 아니라 불호의 감정을 가진 기자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진 악의적인 기사라는 점에서 그 때의 보도와 닮은 꼴입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이 도서관에 사진 찍으러 왔다고 단정한 정승혜 기자는 이런 점잖은 훈계를 합니다.
“이 시점에서 한동훈 전 위원장에게 중요한 것은 사진 찍기일까요?
아닙니다.
한 전 위원장은 이미 조선일보가 지적했던 것처럼 <셀카> 정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그건 오래가지 못합니다.
총선에서 뜬금없는 '이·조 심판론'을 내세우고 '운동권 청산론'에 집착하니 중도층과 수도권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가 없었다고 한동훈을 비판한 기사는 “만약 모두 한 위원장의 아이디어였다면 앞으로도 너무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고,
만약 참모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건 사진찍기 놀이로는 안됩니다라고 가르쳐줍니다.
이미 한동훈이 도서관에 간 이유는 오로지 ‘사진찍기 놀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정승혜 기자는 이런 충고로 결론을 내립니다.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사색을 해보면 어떨까요?
아,
윤석열 대통령이 버리고 갔다는 책들을 한 전 위원장에게 선물해 줬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세상에 남이야 책을 집에서 읽든 도서관에서 읽든 제3자가 무슨 상관할 일입니까. 도서관에 찾아가서 조용히 책읽는 일이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집이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자주 도서관을 찾아가서 책을 고르고 읽습니다.
도서관에는 모르고 있던 수많은 책들이 있고,
도서관에서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독서의 매력이란 것이 있습니다.
책읽을 집이 있는 사람은 도서관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저는 정승혜 기자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정치인이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모습이 무척 반갑습니다.
이제껏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서로 전쟁하듯이 싸우는 모습만 보아왔기에 도서관에 앉아서 책읽는 모습의 정치인이 반갑습니다.
우리 정치인들도 책과 가까웠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설혹 정 기자의 주장처럼 ‘사진찍기 놀이’였다 해도 그 장소가 도서관이라면 저는 좋습니다.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아가서
책을 읽는 문화에 도움을 주면 주었지,
해로운 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마땅히 비판할 일을 갖고 비판하면 정론이 되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묻지마 비판’부터 하고 보면 ‘스토커’ 소리를 듣게 됩니다.
MBC가 뭐라 하든,
저는 도서관에 가서 앉아 책을 읽는 정치인의 모습이 반갑습니다.
물론 정치인 한동훈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와는 별개의 얘기입니다.
이런 글 썼다고 해서 또 누구 누구를 편들어 준다는 식의 흔해 빠진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남기는 얘기입니다.
김흥국과 한동훈의 이름이 함께 등장하는 상황
유창선
‘호랑나비’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만 인기인,
이제는 지지정당을 조용히 돕는게 낫다
오늘 아침 언론 기사들을 보니 가수 김흥국씨의 이름이 일제히 나온다.
어제 TV조선 유튜브 ‘강펀치’에 출연해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최근 연락을 해서 "몸을 추스르는대로 5월이나 6월 따로 만나 뵙겠다"는 감사 전화를 한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김흥국 씨는 "선거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한 위원장이 사퇴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인데도,
이렇게 전화를 하고 챙기는 마음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고 덕담을 하기도 했다.
최근 김흥국씨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자주 등장한 것은 그가 국민의힘에 대한 서운함을 방송에서 토로한데서 비롯되었다.
김씨는 지난 24일 채널A '정치 시그널'에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전화 한 통도,
밥이나 한 끼 먹자는 말도 없었다"며 이러면 가뜩이나 정치색 띠는 걸 꺼리는 우파 연예인인데 누가 나서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우파 연예인들은 누구 하나 보장해 주는 사람이 없어 겁을 먹는다"며 "목숨 걸고 했는데 '고생했다.
밥이라도
한 끼 먹읍시다'라는 말이 없는 게 현실이다"고 국민의힘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 말에 국민의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것일까. 김흥국씨는 그 뒤로 주호영,
김태호,
이철규,
나경원,
권영세,
조정훈 당선인은 물론 낙선인들도 전화를 걸어와 감사 인사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흥국씨는 지난 총선때 자발적으로 나서서 국민의힘 선거유세를 지원했다.
한동훈 당시 위원장 가까이서 함께 한 적도 있고 곳곳을 다니며 지원 연설을 했다.
그러니 총선이 끝나고 국민의힘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무척 섭섭할 수 있을 법하다.
인간적으로야 충분히 이해도 되지만,
사석도 아니고 방송에 출연해서 국민의힘이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데 대한 서운함을 밝힌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애당초 당이 요청해서 나선 유세도
아니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손들고 나선 일 아니었던가. 더구나 자신이 지지했던 국민의힘은 최악의 참패를 당한 상황이다.
그런 마당에 자신에 대한 인사가 있었으니 없었느니 하는 것을 따지고 드는 광경 자체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김흥국씨가 불만을 토로하니까 한동훈 전 위원장을 비롯한 국민의힘 인사들이 잇따라 감사 인사를 해온 꼴이 되었다.
어쩐지 김흥국씨의 말 한마디에 화들짝 논란 여당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물론 총선 끝나고 아무도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도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당의 모습이
왜소하게
보이는 광경이다.
내친 김에 좀 더 근본적인 얘기를 해보자. 김흥국씨가 보수정당 지도부 가까이서 선거를 돕는데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김흥국씨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것은 지난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후보를 도우면서였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가 파기되는 과정에서 김흥국씨의 주장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파다해지면서 정몽준 후보가 희화화 되는 상황을 맞았다.
그 뒤로도 김흥국씨는 이런 저런 말 실수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너무 보수정당의 한복판에서 자주 등장하고 말을 많이 쏟아내는 것이 특히 중도층의 정서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김흥국씨도 사심없이 국민의힘을 도왔으니 이제 그것으로 됐다.
무슨 대가나 인사를 받으려고 도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한동훈을 만나고,
또 만나면 나눴던 얘기를 시시콜콜히 방송에서 얘기할 일도 아닐 것이다.
김흥국씨도 이제는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하게 돕는 것이 보기좋은 나이가 되었다.
유창선
칼럼니스트
30년 넘게 시사평론을 했습니다.
뇌종양 수술을 하고 긴 투병의 시간을 거친 이후로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문화예술과 인생에 대한 글쓰기도 많이 합니다.
'트럭
시위',이제는 시위도 외주를?
요즘 몇 년 사이에 이른바 '트럭 시위'가 집회,
시위의 방법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큰 전광판이 달린 대형 트럭의 전광판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적고,
그 트럭을
시위의 대상(예:
게임 회사,
연예기획사 등) 근처의 도로를 천천히 달리게 하여 의사표시를 하는 행위를 요즘 '트럭 시위'라고 한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집회도 시위도 아니다.
집회란 여러 사람이 모이는 행위를 뜻하고,
시위는 집회를 전제로 위력이나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를 뜻한다(집시법 제2조 제2호). '트럭 시위'에서 사람은 트럭 운전사 1명 뿐이니,
집회도 시위도 아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트럭 시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트럭 전광판에 적힌 메시지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특히 Z세대를 비롯한 청년층들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대외적으로 전하고자 할 때 트럭시위가
많이
활용된다.
아이돌그룹 팬이나 게임 이용자들,
혹은 몇몇 대기업의 청년층 위주의 노동조합도 트럭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트럭 시위가 언제부터 시위의 한 방법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집회,
시위를 벌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처음 등장한 게 아닌가 추측한다.
요즘은 심심치 않게 트럭시위를 하는 모습을 언론에서 접한다.
어쩌면 '트럭 시위'는 Z세대가 주도로 도입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위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시위에 비하여 '폐'를 끼치는 정도가 크지 않다.
전통적인 집회,
시위는 주변 보행자와 차량의
통행에 큰 방해를
주고,
거주민들에게 소음 피해를 주고,
때때로 주변 회사들의 업무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트럭 시위는 딱히 보행자나 차량의 통행에 방해를 준다고 보기도 어렵고,
특별히 큰 소음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트럭에 전광판을 켜 놓고 주변 도로를 달리기만 하니 누군가의 업무를 방해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들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혁신적인 시위의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Z세대의 하나인 나(96년생)로서는 이런 새로운 시위 문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애초에 '시위'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공통의 메시지를 낸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집회 또는 시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트럭 시위를 하기 위해서 굳이 여러 사람이 돈을 모을 필요도 없고,
여러 사람의 공통의 메시지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
충분히 돈이 많은 사람 1명이서 트럭과 운전사를 섭외해서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를 전광판에 송출하도록 할 수도 있다. 1명이서 트럭 시위를
하는 행위가
외부적으로 보이기가 안 좋아 보이면 '대한 문명하셨습니다 간디 연합'같은 허구의 단체 이름을 내세울 수도 있다.
요컨대,
트럭 시위를 하는 주체가 집단인지,
개인인지 알기가 어렵다.
소수의 인원,
심지어 1명만으로도 충분한 돈을 주고 트럭 시위를 주최할 수 있다.
다소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트럭 시위는 돈으로 영향력을
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특정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메시지를 트럭 시위의 형식을 이용하여 마치 많은 사람의 목소리인양 전달할 수 있다.
돈만 있으면 당장 나라도 트럭을 하나 섭외해서 '얼룩소는 포인트 수익을 10배 더 지급하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트럭을 '대한 파워얼루커 연합'의 명의로 얼룩소 본사 앞에 보낼 수 있다.
애초에 장파덕이 파워얼루커인지,
정말 그 메시지가 얼루커들의 참뜻인지는.. 알빠노?
한편으로,
현재 트럭시위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트럭시위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광판을 단 트럭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엄청 보기 드문 존재는 아니다.
각종 축제 행사를 홍보하는
목적,
신장개업한
상점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그런 트럭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트럭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요즈음 트럭시위가 이루어지면 언론에 바로바로 보도되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트럭시위가 '신선한 시위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점점 더
트럭시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될수록,
트럭시위에 대한 언론 보도는 줄어들 것이다.
늘 일어나는 일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트럭시위는 본질적으로 민폐를 거의 주지 않는 시위 방법이다. 지금이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거대한 전광판이 달린 트럭이 도로를 돌아다니면 관심을 가질 사람이 많겠지만,
몇 년만 지나도 '또 하는구나'라는 감상 정도만 가질 사람이
많을 테다.
지금은 초기 단계니까 트럭시위를 하면 시위의 대상이 되는 게임회사나 연예기획사들도 긴장하고 그 요구사항에 대해 답변하려고 하지만,
몇 년만 지나도 트럭시위를 무시하는 회사들이 많아질 테다.
트럭시위를 단순하게 보면,
그저 조용히 지나다니며 번쩍번적이는 거대한 트럭일 뿐이다.
누구에게도
민폐를 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런 일이 흔한 일이 된다면,
아무도 관심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통적인 시위의 방법처럼 여러 사람이 광장에 모여서 구호를 외친다면,
아무리 그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민폐를 끼치고 동시에 관심을 얻게 된다. 일단 여러 사람이 모이면 차든 사람이든 통행이 혼잡해진다.
그리고 단체로 구호를 외치면 꽤나 시끄럽다.
지나가다가 한 번쯤은 쳐다볼 사람이 많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시위 집단이 요구하는 메시지가 '일부'의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목소리로 생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트럭시위는,
트럭을 100대쯤 부르지 않는 이상 민폐를 끼치기 어렵고,
설령 100대를 부르더라도 돈 많은 1인의 '관종짓'인지,
시민 다수의 십시일반의 결과인지 알기 어렵다.
시위는 집시법 제2조 제2호에 나와 있듯,
여러 사람이 공개된 장소에서 위력이나 위세를 보여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영향을 주는 행위이다.
개념상 '민폐'를 끼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교통방해이든 소음이든 민폐를
끼쳐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시위의 본질이다.
그런데 민폐를 끼치지 않는 시위라니. 지금처럼 트럭시위가 흔치 않은 초기에야 효과적인 시위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도 돈은 돈대로 쓰고 메시지는 거의 전달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시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돈만 있으면 개인 차원에서도 트럭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메시지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트럭 시위를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은 운송노동자 1인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트럭시위를 실제로 주최한 사람은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트럭 기사가 계약상 정해진 시간 동안 트럭을
운전할 뿐이다.
그는 1인 사업자일수도,
혹은 어떤 회사의 봉급노동자일수도 있다.
시위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항의의 목소리,
시위 대상과의 시비,
심지어 교통사고까지)은 전적으로 트럭 기사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물론 대부분의 트럭시위는 평화적으로
벌어지므로 '위험의
외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과다하다.
그러나 가장 트럭시위의 문제점은 외주화는 외주화이되 '연대의식의 외주화'라고 생각한다.
트럭시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은 이른바 트럭시위의 '총대'와 트럭 운전사 사이의 계약의 문제로 축소된다.
전통적인 집회와 시위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연대의식,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전율,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주인의식과 책임감,
시위의 주제가 되는 이슈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쟁은,
트럭시위의 현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트럭시위의 '총대'에게 후원금을 입금하는 것으로 시민의 역할은 끝난다.
그 자리에 연대의식,
시민의식,
공동체의식이 들어갈 자리는 많지 않다.
어쩌면 시민보다 소비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늘날 집회,
시위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많은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거리로 나선 시기는 2016년 촛불집회였다.
집회 내용에 대한 호불호나 '광장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와는 별개로,
광장에서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는
그 행위 자체가 민주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공동체의식과 시민의식을 향상시키는 행위로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20년대에 더 이상 시민들은 부조리에 맞서 광장에 나서지 않는다.
당연히 개인의 탓을 할 수만은 없다.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
일차적 과제다.
돈이 우선인 사회에서 사회적 메세지를 내는 것은 터부시된다.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공동체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공동체를 위한 행동에
나서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무너진 공동체를 재건하여야 이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물론 정당과 의회도 역할도 중요하지만,
집회시위와 참여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크고 작은 단체들이 (부문)사회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이다.
집회,
시위마저도 소비와 계약의 문제로 축소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온라인에서 많은 것이 일어나는 세상이 되더라도,
여전히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 삶을 더 크게 좌우한다.
옆 사람도,
앞 사람도,
뒷 사람도,
나와 동일한 구호를 외치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느낀다.
지금 구호를 외치는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왜 분노하고 있는지 고민할 기회가 생긴다.
그 날의 전율과 환희,
분노를 통해 앞으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총대'에게 후원금을 송금하는 행위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이다.
2030년대의 촛불집회는 광화문광장에 수백 대의 트럭이 전광판에 촛불을 송출시키는 것으로 대체될 것인가?
몇 대의 트럭이 모여야 다수 시민의 뜻으로 간주될 것인가?
몇몇 부자들이 대한민국의 트럭을 몽땅 섭외해서 '촛불집회 반대 트럭시위'를 벌인다면 이 역시 시민의 뜻으로 간주될 것인가?
트럭시위 '총대'에게 후원금을 입금하는 것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 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트럭시위가 저녁마다 벌어지고 있으나 많은 시민들이 그저 후원금을 낼 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권력자들은 트럭시위를 두려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