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반 파주에서 버스를 탔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야채 상자가 묶인 카트를 끄는 노인. 나는 비행기나 버스, 기차에서 낯선 이와 함께 앉을 때 그가 여성 노인이면 가장 좋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나직이 말했다.
“나 일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야.” 아침에 마치는 일을 하시는구나, 짐도 무거워 힘들어 보이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소리로 꾸짖는
말이 들려왔다.
“버스에서 통화하지 마세요!” 등산복 차림의 한 남성 노인이 만들어낸 불편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구석구석까지 퍼졌고, 승객들은 서울에 도착하길 기다리며 한 시간 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규율이 최상의 가치 된 세상
모든 말을 ‘올바름’으로 재단
‘협소한 자아’ 넘는 사회 돼야
지난여름 대관령음악제에 가면서 오대산 명상마을 숙소에서 하룻밤 묵었다.
명상을 하려던 것은 아니고 산과 절과 나무 향이 좋아 두 해째 머물게 됐다.
숙소 내 식당에는 되도록 대화를 자제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는데, 우리 일행끼리 식판에 음식을 담으면서 ‘맛있겠다’고 한두 마디 소곤거렸다.
이때 뒤에서 화장 안 한 민얼굴의 중년 여성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침묵해야 돼요!” 명상하러 온 듯한 그의 목소리는 칼 같았고, 그 칼은 우리 넷의 마음에 꽂혔다.
요즘 사회적 풍경의 많은 부분이 소리 그리고 침묵과 관계 있다.
고속열차 안에서는 통화하지 말도록 안내 방송을 할 뿐 아니라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면 곧바로 제지가 들어온다.
해외에서 기차를 타면 독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가운데서도 서로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면, 우리는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아무도 대화하지 못한다(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다.
휴대전화가 만들어낸 소음
때문에 생겨난 문화일 것이다). 문제는 누군가 소리를 냈을 때, 즉 완만한 규칙처럼 정해둔 침묵이 깨졌을 때 상대방의 버르장머리를 잡으려고 그보다 더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오며, 많은 사람 앞에서 그에게 모멸감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에게 지적할 때 걸리는 시간이 1~2초 정도로 매우 짧다는 것은 유의해서 볼 만하다.
예의와 이해는 뜸 들이는 시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원칙주의와 규율이 우리 사이를 강하게 통제하는 것의 문제다.
요즘 사람들은 규율을 최상의 가치로 삼는 듯하다.
그것만이 우리를 타인의 침범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 여기면서, 모든 말이 올바름을 중심으로 재단된다.
이때 타인은 꺼림칙한 대상이 되는데, 이는 우리가 늘 타인을 평가하는 버릇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많은 심리학자가 말하듯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타인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문화다.
그래서 타인은 내 기준에 맞지 않고, 그들의 삶은 멋있지 않으며 이해되지도 않는다.
크게 보면 이런 현상은 우리가 각자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하고 늘 경쟁하며 손바닥만한 공간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여겨진다.
나와 내 공간, 시간은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인데 이것을 한 터럭이라도 빼앗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전체 속에서 서로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는 의식은 희미하다.
우리가 사는 이런 곳을 글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글은 구조와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규율과 같은 구조는 뼈대이니 중요하지만, 문체 또한 구조를 작동시키는 중요 기제다.
글이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문체는 작가의 버릇, 특징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감싸는 눈동자, 삼켜지는 말, 시간 속에서의 머뭇거림과 한 템포의 간극 같은 습성이 일상을 이끌어간다.
반면 말이 올곧고
추상같기만 할 때 상대의 마음과 일상은 휘청거린다.
원래 민주주의 사회는 나 같지 않은 사람, 나에게 당장 필요치 않은 대의를 위해 싸우게 되어 있다.
즉 나의 이익이 걸린 문제여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근간에서 요구하는 자세는 ‘협소한 자아’를 넘어선 싸움이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자녀가 없는데, 아이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해주는 사회가 좋은 것이고, 그런 사회를 위해 싸운다.
시인 타고르는 ‘자신만을 위하지 않는
지출인 낭비하는 지출이 있어야’ 사람들의 상상력이 합쳐질 수 있고, 우리가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각자 자신이 있는 회로 바깥으로 빠져나와야 우리는 제자리 맴돌기를 피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는 요즘 ‘냉기가 서린’ ‘야멸찬’ ‘박대하는’ 등의 형용사로 묘사될 만하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것을 매번 증명하고 지적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마음은 투과성을 잃고 장벽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고 “마주침을 통해서만” 새롭게 되는 존재라고 스피박을 비롯한 많은 이는 강조한다.
매번 새로운 나와 마주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삶의 신비이지 않을까.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