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화 <황산벌>(이준익 감독, 2003)은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이나 쇼츠에서 즐겨 보는 영화입니다. 제게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언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주위에 사투리를 쓰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사투리를 듣기 어렵죠. 현재 거주지가 울산인데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듣더라도 표준어로 많이 순화된 사투리를 듣습니다. <황산벌>은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하는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던 영화였습니다.

영화 <황산벌>(이준익 감독, 2003) 스틸샷. 계백 역의 배우 박중훈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백제의 장수 계백이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가족을 죽이는 장면을 선택할 겁니다. 특히 계백의 아내 역으로 등장한 배우 김선아의 대사는 이 영화의 백미였지요.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거죽을 냉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냉긴다고 혔다.

제발 깨끗하게 가장께.

계백의 아내:

뭐시 어째고 어째?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재.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이 인간아!

영화 <황산벌>(이준익 감독, 2003) 스틸샷. 계백 부인 역의 배우 김선아

만물유전(萬物流轉)! 모든 게 변하고 변해서 세상엔 남는 게 없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헛되고 덧없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해왔죠. 그나마 남는 것은 이름이라 여겼습니다. 거창하게 역사책에 남든 소박하게 가족의 족보에 남든 말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노인 양반들이 족보 관리에 힘쓰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유한성에 절망하며 취하는 마지막 몸짓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욕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귀한 몸짓마저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죠.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명예욕을 이용합니다. 호랑이의 가죽을 팔아먹고,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려는) 명예욕을 부추겨 자신의 안녕을 꾀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지요. 그이들은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들만 살아남았지요. 그래서 계백 부인의 절규어린 한 마디 말에 커다란 호소력이 있었던 겁니다.

명예는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한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좁은 문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걸 얻으려고 추구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명예욕은 자기 자신의 헛된 죽음만 초래하고, 결국 어리석고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명예는 진실한 삶 속에서 그저 운좋게 감사하게 받는 것일 뿐이지, 결코 추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끼를 연못에 빠트린 나무꾼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금도끼는 정직한 나무꾼이 받는 선물이지, 그걸 소유하려는 나무꾼의 몫이 아닌 겁니다.

계백과 같은 사람은 '운 좋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가 정말 영화에서처럼 '호랑이 가죽과 사람 이름' 속담을 말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백제의 장수로서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필요악(必要惡)'은 공동체(혹은 나를 둘러싼 전체)에게는 필요하지만 개인에게는 나쁜 무엇인가를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 이런 필요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자기희생을 선택할 수 있겠고, 그 선택이 명예욕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인물로 우리는 계백장군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계백의 이름 속에서 살해된 가족과 전쟁터에서 죽어나간 이름 모를 백제군들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노년기의 특징과 멋진 노인

펜하우어의 글을 읽다가 노년기의 특징이 언급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과 많이 일치하기에 소개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편안함과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노년기의 빈곤은 커다란 불행이다. 궁핍에서 벗어나고 건강이 유지되면 노년기는 인생에서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노인의 주된 욕구는 편안함과 안정이다. 그 때문에 노년이 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돈을 사랑한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버림을 받았으니 술의 신 바쿠스로 기분을

전환하려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1, 259쪽.

두 번째 특징은 환멸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가 난 듯 보이고 냉소적이고 무표정한 모습의 노인들을 자주 볼 수 있죠. 사실 세상의 가혹한 진실을 많이 본 사람이 가지는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삶에 자극을 주고 활동에 박차를 가한 착각이 사라져 버려, 세상의 온갖 화려함, 특히 부귀영화와 권세의 무가치함과 공허함을 인식한다. 가장 소망하던 일이나 열망하던 동경의 배후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점차 우리의 생존 전체가 대단히 빈곤하고 공허하다는 통찰에 도달한다. 일흔 살이 되어야 비로소 전도서의 첫 구절('헛되고 헛되도다')을 제대로 이해한다.

같은 책, 같은 곳

세 번째로 노년기가 되면 더욱 굼뜨고 우둔해집니다.

고령이 되면 더욱 로봇처럼 된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한다. 외부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아도 그런 점은 더 이상 변하지 않거나 그들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같은 책, 같은 곳

사실 이 세 가지 특징은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 연령층에겐 이해받기 어렵고 추해 보이지만, 나이 듦이 몰고 온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멋진 노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첫 번째와 세 번째 특징을 두 번째 특징인 환멸로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환멸로 일관된 냉소주의자 자신을 마지막으로 다시 환멸하는 것이지요. 해법이 너무 철학적인가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멋진 노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젊을 때 철학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되고, 또 나이가 들어서 철학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는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있을 수 없다. ...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사람은 철학을 해야 하며, 후자의 경우 신과의 접촉을 통하여 또 지난날들을 회고하며 회춘하기 위해 철학을 하고, 전자의 경우 어리더라도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미래 앞에서 확고해지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한다.”

'회춘하기 위해서 노인은 철학해야 한다' 조금 알쏭달쏭 한 말일 수 있습니다. 회춘한다는 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는 뜻이죠. 그것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한다는 말이며, 유한자가 무한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신과의 접촉')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탄생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자입니다. 하지만 무한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한과 만나는 그런 영역을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이라 불렀습니다. 이 세 영역에 관심을 두면 회춘이 가능합니다. 멋진 노인이 될 수 있지요.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특히 환멸을 환멸하는 길로 제시하고픈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랑'입니다.



인생이 뭐냐고? "계획에 얽매이는 것" (feat. 송강호)

출처: 디즈니+ <삼식이 삼촌>

인적으로 저는 송강호 배우를 좋아합니다. 그이만큼 때론 익살스럽고 때론 진지한 인간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을 겁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는 점점 더 인생의 진국을 연기하고 있죠. 최근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삼식이 삼촌>이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그는 이 드라마에서도 제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아마 다른 배우가 삼식이 삼촌 역을 맡아 똑같은 대사를 읊조렸다면, 생의 짙은 맛이 영상 가득 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제 올라온 8화와 9화에서 대배우의 입을 통해 무릎을 칠만한 명대사가 발화되었죠. 대사에 걸맞은 표정과 함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관성.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유는 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천성과 관성.

<삼식이 삼촌>, 8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잘 모를 때가 많죠. 도무지 모르겠지만 꼭 알 필요가 있을 때, '천성과 관성', 이 말을 기억해 두면, 인식의 좌표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드라마 작가는 라임을 맞춰 외기 쉽게 알려 주었습니다.

송강호, <삼식이 삼촌>, 디즈니+

계획 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고

계획에 얽매이는게 인생 아니겠어?

누굴 탓하겠어. 그게 인생인데...

<삼식이 삼촌> 9화

알 수 있다면, 그건 미래가 아닙니다. 예측 불허의 시간만이 미래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인생이라는 시간에는 반드시 미지의 미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고 자기 뜻대로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는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죠. 하지만 언제나 계획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계획이 엎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래를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계획하고 보험까지 들면서... 그렇게 계획에 얽매이며 살 수밖에 없죠.

송강호, 출처: 위키

재미있게도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보험료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보험료는 누구나 공공연하게 악마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1, 230쪽.

(행운까지는 바라지 않고) 미래에 불행이 일어나는 가능성을 막아보기 위해서 지불하는 돈이 보험료입니다. 그렇다면 보험료란 불행을 관장하는 악마에게 갖다 바치는 제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보험사의 몸집만 불려 주는 보험료를 따박따박 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이렇게 풍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헛된 줄 알면서도 계획에 얽매여 사는 인생이라니... 누굴 탓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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