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자격증도 없이 교단에 서는 생성형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에듀테크 코리아 페어′에서 참관객들이 디지털 교과서를 체험하고 있다.<BR> 연합뉴스 제공

디지털 교과서-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에듀테크 코리아 페어'에서 참관객들이 디지털 교과서를 체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내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AIDT)가 등장한다.
'지식·개념 교육은 완벽한 수준별·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맡기고 교사는 학생의 인성교육을 전담한다'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해괴한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당연히 전세계 최초의 일이다.
당장 내년에는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수학·영어·특수교육 국어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모든 학생에게 저마다의 독창성·상상력·윤리성·추론능력을 완벽하고 세심하게 길러주고 챙겨준다는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공식적으로는 시제품조차 공개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2028년에는 국어·사회·과학·기술가정 등의 교과로 확대 적용한다는 것이 교육부의 확고부동한 정책이다.

교사자격증도 받은 적이 없는 인공지능이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의 교단을 온전하게 점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 교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엄혹했던 권위주의 시대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설고 생경(生硬)한 일이다.

● 전광석화처럼 등장한 AI 교과서

AI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숙의(熟議)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낯선 '에듀테크' 기술을 전방위로 사용하겠다는 낯선 정책의 '제안'에서 '시행'까지 모든 과정이고작 2년 만에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2022년 11월 윤석열 정부의 2번째 교육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이주호 장관이 느닷없이 디지털 대전환 시대의 교육을 표방하면서 AI 디지털 교과서를 핵심과제로 내놓았던 것이 2023년 2월이었다.

4개월 후인 6월에는 'AI 디지털 교과서 추진방안'이 등장했고 8월에는 'AI 디지털 교과서 개발 가이드라인'이 공개됐다.
그리고 2025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AI 디지털 교과서'가 본격적으로 투입된다.

이제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인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특히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는 그렇다.
실제로 이 장관의 정책 밀어붙이기 역량은 상상을 넘어선다.
2023년 전국의 대학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지역혁신중심대학 지원사업'(RISE)과 '글로컬대학' 선정 사업은 '제안'에서 '시행'까지 채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의대와 의료 현장을 통째로 뒤집어놓은 의대 증원도 2개월 만에 해치웠다.
결과는 참혹하다.
의대 교육은 무너졌고 의료현장은 붕괴되고 있다.

사실 'AI 디지털 교과서'는 이주호 장관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교과서는 이 장관의 오랜 개인적 숙원(宿願)이었다.
이 장관이 모든 교육 정책을 틀어쥐고 있었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기 위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당시에는 오늘날 전자책(e-book) 수준의 어설픈 디지털 교과서를 개발했었다.
시범학교를 지정해서 학교 현장에 적용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던 디지털 교과서는 정권과 함께 학교 현장에서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디지털 교과서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교육부를 떠난 이주호 장관이 회원 57명과 함께 창립해서 2022년 11월 장관 취임 때까지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아시아교육협회'를 디지털 교과서의 꿈을 키우는 새로운 무대로만들었다.

'사교육 카르텔'이라는 비난을 받는 사교육 시장에게 '디지털 교과서를 통한 화려한 부활'의 꿈을 안겨주는 역할도 했다.

● 교사자격증도 못 받은 '인공지능 교사'

교육부가 기대하고 있는 AI 디지털 교과서의 역할은 화려하다.
AI 디지털 교과서가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 교사'의 획일적이고 비효율적인 교육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적과도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선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가 학생 개인의 능력과 수준에 맞는 수없이 다양한 맞춤형 학습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 학생의 학습 과정을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평가해 주는 일도 해준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준별·맞춤형 교육의 꿈을 실현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비현실적인환상이다.
인공지능이 학생의 지적 학습 능력은 물론 정서적 발달 상태를 정확하게 평가해 준다는 과학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확인된 적이 없다.

AI 디지털 교과서가 학부모의 참여와 이해를 증진해 준다는 주장도 역시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 환상이다.
현실은 각박하다.
모든 부모가 AI 디지털 교과서가 요구하는 피드백을 제공해 줄 능력과 여유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수행평가'가 고질적인 '숟가락 논란'에 휘말려버렸다는 분명한 경험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수행평가는 충분한 역량과 환경을 갖춘 금수저 집안의 학생들을 위한 제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AI 디지털 교과서는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인 병폐로 자리 잡은 '부모 찬스'를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AI 디지털 교과서의 온라인 기능을 이용해서 현장의 모든 전문가를 초·중·고 학생의 멘토로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역시 황당하다.
현장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일면식도 없는 초·중·고 학생의 어설픈 요구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여유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학생의 교육에서 전문가의 조언·협력은 서로 소통이 되는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명백한 상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기술이 교육에서 긍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에듀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던 가장 대표적인 국가인 스웨덴과 핀란드의 경험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은 그동안 강력하게 시행했던 테블릿, 온라인 검색, 키보드를 활용한 적극적인 디지털 교육이 학생의 문해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디지털 교육을 시행한 이후에 스웨덴 학생의 읽기 능력은 오히려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스웨덴의 교육부 장관은 "학생의 학습은 실제 종이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과대학 연구소는 "디지털 도구가 학생의 학습 능력을 저해한다는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정확성이 검증되지 않은 무료 디지털 소스가 아니라 검증을 통해 인쇄된 교과서와 교사의 전문 지식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스웨덴 정부는 디지털 교육을 유치원까지 확대하겠다는 정책을 완전히 폐기했고 6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디지털 학습을 완전히 중단할 예정이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던 핀란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2022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수업 중 디지털 기기 활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학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수업 중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이 1시간 늘어나면 수학 점수가 3점씩 떨어진다는 것이다.

● 생성형 인공지능은 미완성의 미래 기술

디지털 교육이 학생의 마음 건강과 전인적 발달을 위한 사회정서 학습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도 절대 외면할 수 없다.
학생들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확실한 과학적 교육 방법론이 정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불확실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적·교육적인 친밀감·신뢰감'이 그런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인류가 오랜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한 명백한 진실이다.
그런 교육을 디지털 기술에게 통째로 맡겨버리겠다는 것은 이 장관의 개인적인 오만일 수밖에 없다.

AI 디지털 교과서의 졸속 추진에 대해 우리 교육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혼란스럽게 이어져 왔던 교육개혁의 피로가 누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든 우리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교육을 통째로 부정하는 어쭙잖은 선무당의 해괴한 주장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철저하게 실패해 버린 어설픈 교육개혁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육부가 AI 디지털 교과서의 졸속 시행을 거부하는 청원에 서명한 학부모가 5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교육부가 겉으로는 '사교육 카르텔'의 척결을 외치면서 뒤로는 사교육 시장을 적극적으로 키워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졸속으로 밀어붙인 의대 증원도 결과적으로 사교육 시장의 짭짤한 수익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AI 디지털 교과서가 강조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완성된 '현재 기술'이 아니다.
현재의 생성형 AI는 기계 학습에 투입된 '데이터'를 불법적으로 흉내 내는 '대규모 디지털 표절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생성형 문법에 대한 언어학 이론을 정립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분명한 평가다.

절대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가 아니다.
실제로 생성형 AI가 활용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팩트'나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기계 학습에서 활용한 데이터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생성형 AI가 자랑하는 화려한 솜씨는 모두 남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자료를 놀라운 속도로 분석해서 그럴듯하게 '표절'해서 포장하는 능력일 뿐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가장 심각한 약점으로 알려진 '환각'(hallucination)은 표절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오류'(error)를 말한다.
환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어쩌다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대규모 언어 모델이 가지고 있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내재적·구조적 한계라는 뜻이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미완성의 미래 디지털 기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의한 '디지털 속임수'에 우리 학생의 교육을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교육이 새로운 기술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미완성의 새로운 기술'까지 무차별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확실한 준비와 철저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소개

이덕환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정신적 신분사회, 노력하면 행복할까?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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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 사회를 좋아하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면, 뭔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런 세상은 잠시도 살고 싶지 않다’고 하겠죠. 물론 ‘신분은 귀족이다!’라고 하면 생각이 좀 바뀔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구상에는 아직도 신분 질서가 공고하게 남은 곳이 있지만, 대부분의 민주 사회에서는 출신 신분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과거 잔재일 뿐이죠.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과연 신분제가 정말 없어진 것일까? 그렇게 수천 년 넘게 내려오던 제도가 싹 사라져버린 것일까?

자연의 사다리 (scala naturae). 봉건 사회는 신분제를 통해서 사람의 등급을 나누었다.<BR> 각 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었고, 절대불변의 가치는 아니었지만 신분이 바뀌는 일은 드물었다.<BR> - 위키미디어 제공

자연의 사다리 (scala naturae). 봉건 사회는 신분제를 통해서 사람의 등급을 나누었다.
각 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었고, 절대불변의 가치는 아니었지만 신분이 바뀌는 일은 드물었다.
- 위키미디어 제공

사다리 사회

인류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들입니다.
신분, 계급, 위계, 계층, 서열, 지위 등이죠. 각각의 의미는 논의의 맥락에 따라 상당히 의미가 달라집니다.
어떤 학자는 신분은 타고나는 것이고, 계급은 사회 구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급이야말로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생산 수단의 유무로 계급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수준이나 문화적 수준은 계층으로 차등화하기도 합니다.
영장류 사회나 뒷골목 하류 문화에서는 서열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정신 사나우므로 자세한 개념의 차이는 접어 두겠습니다.
‘인간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사다리 구조가 있다’는 정도로 해두죠.

아니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왜 이런 식으로 위아래를 나눌까요? 사실 서열을 정하는 것은 집단 생활을 하는 영장류의 본성입니다.
특히 침팬지, 고릴라는 모두 서열이 지배하는 집단을 이룹니다.
흔히 보노보 침팬지는 평등한 집단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일반 침팬지처럼 ‘폭력’으로 서열을 정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죠.

현대 사회엔 ‘타고난 신분’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분명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죠. 하지만 이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면, 위계 질서를 인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장군부터 이등병까지,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위계를 나누어 각각에 맞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서 복잡한 사회를 움직여 갑니다.

오마바 대통령이 청소 직원과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BR> 현대 사회는 타고난 신분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위계 질서가 지배하는 중층 사회다.<BR> 신분과 계급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BR>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BR> - 플리커 제공

오마바 대통령이 청소 직원과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현대 사회는 타고난 신분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위계 질서가 지배하는 중층 사회다.
신분과 계급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
- 플리커 제공

평등 사회에 사는 계급주의자

현대 사회의 지위는 사회를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기능상의 분화입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간주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9급 공무원보다 ‘높긴 하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공유된 믿음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러한 믿음은 ‘환상적 믿음’에 불과합니다.
사실 어떻게 봐도 대통령이 더 높거든요. 자동차도 더 좋고, 집무실도 더 좋고…

일종의 이중 사고입니다.
오늘도 역 앞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숙자가 ‘사람 났고 돈 났지, 돈 났고 사람 났냐’라며 주사를 부립니다.
평등이라는 당위와 계급이라는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하는, ‘실제로는 낮은 계급이지만, 명목상으로는 낮은 계급이 아닌’ 자의 비애가 있습니다.
거나하게 취한 취객은 높은 지위를 얻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경제적 지위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를 부정하려는 것일까요? 둘 다 일까요?

과거 부모님의 신분에 따라 위치가 정해지던 때는, 세상이 보다 단순했습니다.
노비로 태어난 자는 평생 그 신분을 벗기 어려웠습니다.
명문대가에서 태어난 출세한 양반이라도, 결코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갈 뿐이죠. 삶의 행복은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불평등한 세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구조였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좀 복잡해졌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신분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노력하지 않으면 출세하지 못합니다.
출세(出世), 즉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죠. 그래서 새벽밥을 먹고 나와 학원을 가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야근을 자청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등할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다집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외젠 들라르쿠아 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작.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로 기존의 전제 왕권을 무너뜨렸다.<BR> 하지만 무너진 왕권은 이내 다른 사람이 차지했다.<BR> 불과 15년 만에 프랑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BR> 찬성표는 360만 표, 반대표는 2500표였다.<BR> - 위키백과 제공

외젠 들라르쿠아 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작.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로 기존의 전제 왕권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무너진 왕권은 이내 다른 사람이 차지했다.
불과 15년 만에 프랑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찬성표는 360만 표, 반대표는 2500표였다.
- 위키백과 제공

노력하면 행복할까?

1학년과 2학년의 위계를 엄격하게 두는 대학 야구 클럽이 있습니다.
연배 중심의 클럽입니다.
그러면 1학년은 2학년이 되기 위해 노력할까요?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1학년이 2학년이 될 수는 없죠. 자연스럽게 1학년 회원 사이의 결속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같이 모여서 2학년 흉을 보기도 하고, 심지어 단체로 2학년을 보이콧할 수도 있죠. 정신의 에너지는 수평으로 흐르게 됩니다.
야구는 딱 즐거운 만큼만 합니다.
물론 실력은 조금씩 늘 뿐입니다.

그런데 옆 대학의 야구 클럽은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년은 관계없이 야구를 잘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야구만 잘하면, 2학년도 1학년에게 존댓말을 해야 합니다.
능력 중심의 클럽입니다.
1학년 사이의 동기애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언제 동기가 나보다 높은 계급에 오를 지 모르는데요. 정신적 에너지는 수직으로 향하게 됩니다.
불철주야 연습에 매진합니다.
실력이 쑥쑥 늘어납니다.
하지만 야구는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역설은 우리의 정신 세계의 신분제가 아직 공고하기 때문입니다.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게놈 지연 현상입니다.
한국 사회는 오랜 옛날부터 엄격한 반상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화기에 반상이 철폐되었지만 사실 용어와 제도를 없앤 것이지, 그 정신적 잔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의 위계가 금새 빈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반상 철폐의 역설

조선의 과거 시험은 능력에 기반한 관리 등용 제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이 벼슬에 따라 연동되면서, 그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양반과 평민의 구분은 벼슬의 유무에 따라 정해지는데, 벼슬은 과거에 합격해야 얻을 수 있었죠. 그래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과거 시험에 몰렸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매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응시자가 몰렸죠.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평민 출신 합격자가 약 절반에 달했고, 노비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양반이라도 대를 이어 과거 시험에 계속 불합격하면, 평민이 되었습니다.
과거 시험에 대한 사회적 집착은 일종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보통 5살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는데, 문과의 경우에는 평균 35세가 되어야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30년을 글공부만 한 셈입니다.
노인이 되어서야 합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죠. 과거 낭인입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신분제도는 그 이름을 달리하여 여전히 존재합니다.
고급 공무원이나 법관, 교수, 의사, 고위 임원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계급은 ‘노력만 하면’ 얻을 수 있게 되었죠. 조선 시대는 한번 벼슬길에 오르면, 증손주까지는 양반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으로 귀속됩니다.
경쟁이 치열하니 ‘양반’이 되기도 어렵고, 간신히 되어도 언제 밀려날까 전전긍긍합니다.
동료애는 사라집니다.
모두가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반상 철폐의 역설입니다.

작자 미상. 18세기 민화. 조선의 과거 시험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BR> - 위키미디어 제공

작자 미상. 18세기 민화. 조선의 과거 시험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 위키미디어 제공

한국인은 부지런하고 근면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과거 부모 세대의 근면함은 어떻게 해서든 더 높은 신분을 얻고 싶었던 절박함에도 일정 부분 기인합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노비 집안’이라고 욕하면 칼부림이 날 정도 였습니다.
한국인의 뿌리 깊은 ‘상놈 콤플렉스’는 근대 사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노력해서 명문대만 들어가면, 사법 고시만 붙으면, 사장님만 되면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으니 전국민이 단체 경주라도 하듯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죠. 조선 시대 선비들은 일생 동안 과거 시험만 준비하느라 곤궁하게 살았습니다.
매 시험마다 수만, 수십만의 선비들이 몰렸으니 전국민의 평균 학식은 높아졌겠죠. 하지만 그들이 원래 학문을 즐긴 것인지, 아니면 단지 벼슬길에 오르고 싶었던 것인지는 자명합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죠. 대학은 학문을 닦는 곳이 아니라, 신분을 높이기 위한 통과의례로 전락했습니다.
교수나 의사, 법관은 연구나 교육, 진료, 정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택하는 직업이 아니라, 전국민 레이스에서 승리한 사람이 가지는 전리품이 되었죠.

무엇을 위한 노력인가?

현대인은 기회의 평등성과 과정의 공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금수저, 흙수저 담론이 크게 유행합니다.
불공정한 채용 비리에는 전국민이 공분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삶이 만족스러워질까요? 아무리 공정한 시험이라고 해도, 불합격자는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경쟁으로 점철된 상승 열망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달픕니다.

흔히 ‘노오오오력하면 성공한다’며 위트 있는 말로 현 시대를 비꼬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진짜 문제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노력은 해야죠. 문제는 오히려 ‘성공’에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 향상이 성공의 유일한 척도라면 곤란합니다.
도대체 왜 성공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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