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해진 자아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

혐오범죄나 폭력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 연구들에 의하면 정답은 그 반대다.<BR> 게티이미지뱅크

혐오범죄나 폭력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 연구들에 의하면 정답은 그 반대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에 살면서왜 총기난사범들은 다수가 백인인지가 궁금했다.
오랜 시간 동안 수탈당해온 흑인들이 백인을 미워해서 혐오범죄를 저지르는 쪽이 더 자연스러울 거 같은데 왜 혐오 범죄를 저지르고 특히 불특정 다수를 살해하는 행위는 백인들이 더 많이 하는 걸까? 오랫동안 교육의 기회나 투표권도 갖지 못한 채 착취당해온 것은 흑인들이요 아직도 주류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인이다.
정작 억울해하고 피해의식을 느껴야할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이 더 억울해하고 더 피해의식이 심한걸까?

비대한 자아의 해로움

혐오범죄나 폭력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 연구들에 의하면 정답은 그 반대다(Baumeister et al., 1996). 무시한다고 분노하는 건 자존감이 낮기보다 ‘근거 없이’ 높고 자의식이 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나는 남들과 달리 특별하며 따라서 좋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나르시시즘의 자격의식과 공격성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Reidy et al., 2008).

쉽게 말하면 그간 너무 우쭈쭈 받고 살아와서 현실감 없이 자기가 진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할 때, 쉽게 무시당했다 느끼고 공격성을 표출한다.
내가 가진 특권이 특권인 게 아니라 진짜 내가 대단해서 누리는 것인 줄 알고, 그런 내가 계속해서 많이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남들보다 우월하니까 당연히 더 많은 걸 누려야해’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회가 점점 평등해진다? 그러면 이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박해를 받는다고 느낀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내 것을 빼았겼다’고 느낀다(Bushman et al., 2003).

그 결과 마치 세상과 남들이 자신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맡겨놓은 대접과 인정 내놓으라며 때를 쓴다.
그 과정에서 왜 대단한 나를 알아주지 않냐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와 달리 비슷한 상황에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분노의 종착지가 타인에 대한 공격이기보다 내가 그렇지 뭐 류의 자책과 자기비난이다.

관련해서 권력이 없는 사람이 쉽게 분노할 것 같지만 연구에 따르면의외로 권력감이 클수록 조금이라도 손해보는 것 같으면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경향을 보인다(Ding et al., 2017). 권력감이 낮은 사람들은 실제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이게 다 내가 못난 탓이라며 남을 비난하기보다 자기 탓을 하고 입을 다무는 편이다.

인간은 환경과 권위, ‘자기 처지’에 꽤나 잘 순응하는 동물이어서 많이 가지면 그건 다 내가 잘난 탓이어서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고 적게 가지면 적은대로 그건 내가 못나서 그렇다고 순응하는 편이다.
힘이 없는 경우 내가 분노해봤자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노 표출도 내가 분노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나를 다르게 대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특히 각종 혐오범죄, 인종차별, 불링같이 타인에 대한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는 범죄들이나 백인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같은 것들은 자기비하가 심하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은 당연히 남들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이런 이유로 바우마이스터(Baumester), 부시먼(Bushman), 리어리(Leary) 등 많은 심리학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낮은 자존감보다 근거없이 부풀려져있고 따라서 불안정한(inflated and unstable) 자존감이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Leary & MacDonald, 2003). 자존감이 낮을 때는 본인이 괴롭고 말지만 고평가된 자아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지금 직장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스스로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이다.
모르는 데 안다고 빡빡 우기고 아니라고 하면 "감히 나한테 아니라고 하냐"며"한 수 가르쳐주겠다"고 부들거리는 사람이다.

우월감을 쫓다 타인을 해친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총기난사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결국 지나치게 비대한 자아가 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의 심리학자 브레드 부시먼 교수는30여년에 걸친 공격성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종교, 인종, 성별, 성적지향,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 학교, 국가 등)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심리전문 매체인 '사이포스트(PsyPost.org)'와의 인터뷰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본인에게 적합한 대우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주변 사람들을 응징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언급했다.
총기난사범들 역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행동은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보인다고 한다.
예컨대 1999년 일어난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의 경우 범행 전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총기난사범들은 자신을 '최상급의 젠틀맨', '우월한 자', '진정한 알파 메일(male)'로 소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많은 경우 흑인은 백인을, 여성은 남성을억압하고 있어 이를제거하는 투사나영웅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한다.
그러면서 자신을진심으로 사랑한나머지 거창한 성명서를 남긴다.
여러모로 작은 자아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다.

부시먼은 일반적인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고 싶어하지만 혐오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언급했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들이 그러하듯 온 세상이 자신에게 주목하길 바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인건 맞지만 낮은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반대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의식 축소와 현실감각 챙기기가 필요하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네가 가진 것이 모두 너의 노력으로 인한 것도, 너에게 합당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에게 대접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타인을 땔감으로 네 기를 펴려고 하면 안 된다.
네가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가 알아주고 박수쳐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구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같은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자격의식이 넘치는 사람에게 너는 대단하고 멋지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자존감 높이기 교육을 하면, 역시 내가 나쁜게 아니라 날 몰라주고 대접하지 않는 세상이 나쁘다며 되려 더 오만방자해지고 더 억울해하고 더 공격적이어 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시행되어온 자존감 향상 처치들이(나는 사랑받을만한 사람. 나를 더 사랑하자!) 당초의 예상과 달리 공격성을 낮추는 효과가 없었다는 보고가 나온 바 있다(Baumeister et al., 2003). 이미 거품이 잔뜩 낀 자존감에 비행기를 태운 격이기 때문이다.

자아 중독에서 벗어나자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 배터지게 먹는다고 좋은 게 아닌 것처럼, 나를 존중하면 되지 나를 대단한 존재로 포장하고 뻥튀기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는 방법은 건강한 자존감 추구법이 아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그 높이나 세기보다 건강한 추구법에서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건강한 자존감을 위해서는 나를 더더 좋아하려고 애쓰기보다 반대로 나에 대한 관심을 줄여야 한다.
'내가' 뭘 어쨌고 사람들이 '나한테' 어떻게 했고,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 모든 걸 나 필터로 해석하지 않을 것. 또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특별해서 나는 절대 인생의 쓴 맛을 보아선 안 되고 항상 꽃길을 걸어야 한다는 자격의식적 사고방식을 버리는 게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타인의 삶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내 삶에도 내리막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실패할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아 또한 현실감 없이 부풀려진 자아인 것이다.

인간만큼 자아 중독인 동물이 없다.
나 혼자서 자꾸 내가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해서 뭐하겠는가? 나를 포장하겠다는욕심과 나에 대한 평가를 관두고 어차피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 나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나 더 하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용서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타인에 대한 미안함을 굳이 나를 향한 미움으로 바꿀 필요가 없는 이유.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어떻게 저런 사람을 용서할 수가 있지?”라는 질문이 생길 때가 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가해자를 향해 피해자나 유족들이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들을 볼 때면 늘 그렇다.
용서란 이해하기 어렵고 다루기 어려운 주제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던 중 최근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 라는 연극을 봤다.
폭력 사건으로 인해 동생이 죽고 나서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형이 주인공이었다.
형은 용서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더욱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만다.
이런 형에게 (죽은) 동생은 이제 그만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형의 인생을 살라고 당부한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용서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가해자에 대한 용서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시급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우리는 다들 크고 작은 후회를 짊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내가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있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 것, 더 잘해주지 못한 것,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하고 위로해주지 못한 것 등이 주가 된다.
또는 내가 나를 실망시킨 일들, 예컨대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거나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기억들로“이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은 자신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 때에도 나타난다.
내가 그 때 거기에 없었더라면, 좀 더 조심했더라면 등 현실과 다른 다양한 가정들을 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후회에 빠지곤 한다.
실제로 나쁜 일을 막을 수 있었을 지 알 길이 없고 책임은 그러한 일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있음에도 많은 피해자들,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을 책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 못지 않게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고 자신을 미워하며 고통받곤 한다.

사실 가해자는 용서하지 않더라도 안 볼 수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흔히 타인에 대한 용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일로 소모되지 말라는 의미에서 미움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고도 감정 소모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조금 다르다.
용서하지 못한 자신과는 안 볼 수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등의 다양한 후회로 인해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책망하는 경우 내가 미워하는 자신과 24시간 함께해야 하는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한 미움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주로 가족에 대해 좀 더 따듯하게 대할 걸 같은 후회들을 지니고 있다.
특히 어린 동생에 대해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충분히 챙기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크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아가 내가 나를 지나치게 책망하는 일은 어쩌면 동생을 챙기는 행동을 방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자기 비난에 빠지면 한정된 에너지를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데 쓰느라 정작 중요한 건설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는 스스로를 비난하게 만드는 일로부터 아예 도망치게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느라 바빠서, 즉 내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느라 동생은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나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나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나를 지키겠다고 결과적으로 계속 내 생각만 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타인에 대한 미안함을 굳이 나를 향한 미움으로 바꿀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적갈등 겪으면 남을 이해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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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읽으면 다양한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한 등장인물의 복잡한 내적 갈등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고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하고 또 한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타인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흔히 인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꿈을 함께 꾸는 모순된 존재라고 이야기하지만 멀리 갈 것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많은 목표와 가치관들이 서로 충돌하며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간다.

시험 공부를 해야 하지만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변화와 재미를 따라가고 싶기도 하다.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동시에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되고 과감하게 도전할 줄 알아야 하지만 실패는 너무 두렵다.

이렇게 늘 정답은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사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최대한 이런 내적 갈등 없이 평탄한 삶을 살고 싶은데 또 그러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데에도 어떤 즐거움(?)이 있는 것 같고 어쩌면 그것이 삶의 묘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라면 이러한 내적 갈등에도 순기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연구들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서로 충돌되는 목표를 떠올리게 하거나(공부 vs.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기),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무언가 달리 했다면 어떤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을 지 따져보게 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의 극단적인 버전에 노출되도록 하는 등 (예를 들어 낙태를 반대하는 편이지만 모든 종류의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같은 질문 던지기) 상반되는 생각들로 내적 갈등을 겪게 하면 자기와 다른 타인, 외집단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과 한 쪽으로 치우친 사고방식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내적 갈등을 거치면서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반되는 가치관, 삶의 방식에 대해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사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민과 선택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뿐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는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통점이 더 많은 것도 같다.
나의 내면과 삶이 복잡한 것 만큼 타인의 내면과 삶 또한 복잡하며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서로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소속 욕구가 강할수록 상처받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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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이 갈등을 잘 풀어갈까

어떤 관계에서든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적어도 한 번 이상 부딪힐 일이 반드시 생기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 못지않게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비슷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어도 어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잘 얘기해서 풀어나가면 된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갈등은 결코 존재해선 안 되는 양 호들갑을 떨고 상대의 가벼운 실수에도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그랬다거나 '원래 저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며 파괴적인 해석을 내려 결국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파국을 맞이하곤 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선 연구들에 의하면 기본적인 성격 특성(높은 신경증)과 애착 유형(불안정 애착), 사람은 (따라서 관계 또한) 잘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관계에 대한 성장적 관점과 운명론적 관점),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향한 비판적 완벽주의, 또 여러 상황적 요소(많은 스트레스와 걱정거리로 인해 정신적 소모가 심한 상태, 소외감) 등이 한몫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글에서 함께 살펴본 것들이기도 하다.

인격과 사회심리학 공보(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지나치게 강한 '소속 욕구' 또한 너그럽지 않은 모습과 관련을 보인다고 한다.

● 소속 욕구가 강할수록 쉽게 상처받고 상처가 오래간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소속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나는 쉽게 상처받는다", "사람들이 나를 빼고 뭔가를 하는 것이 싫다" 이는 소속 욕구(need to belong)를 묻는 문항들이다.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애정과 인정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달라서 위의 문항들에 높은 점수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비교적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모리시오 카발로 등의 연구자들은 사람들에게 지난 3개월 사이에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에 의해 상처받거나 화가 났던 일에 대해 적어보라고 했다.
그런 뒤 상대에게 얼마나 보복하고 싶은지, 상대가 얼마나 망했으면 좋겠는지, 앞으로도 계속 볼 것인지 아니면 피해 다닐 것인지 등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소속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상대에게 화가 많이 났고 사건의 심각성을 크게 지각하며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응답하는 경향을 보였다.
소속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이 사람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 미래에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내가' 채워지는 것이 목적일 때 나타나는 보상 심리

언뜻 생각해 보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면 상대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더 잘 포용하고 관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 같다.
하지만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목표가 간절할수록 많은 애를 쓰기 때문에 목표 달성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간과되는 점은 간절할수록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의 '실망'이 크며 때로는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해 '이게 다 xx 때문'이라고 외부에 책임을 돌리는 현상도 나타난다는 것이다(Mauss et al., 2011).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
적당히 애를 쓰는 것은 좋지만 강박적으로 애를 쓰는 경우 자연스러운 갈등과 내리막에도 필요 이상의 충격을 받으며 자신 외에 비난할 무언가를 찾으러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의) 소속 욕구를 채우고 싶다거나 (내가) 외로운 게 싫다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이유가 관계의 핵심 동기가 되면 관계에 과한 노력을 쏟고서도 정작 상대는 요청한 적 없는 '필요 없는 오지랖'이나 '부담스러운 친절'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한다(Feeney & Collins, 2001).

이 과정에서 나는 이만큼 했는데 상대가 하나도 알아주지 않는다던가 되려 나를 피한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더 많이 받고자 할수록 보상 심리도, 서운함도 커지는 법이다.

관계를 위한 노력과 자신의 희생에 주로 억울함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애초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사랑을 주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서운함이 컸던 관계를 돌아보면 그 중의 상당수가 상대에게 주기보다 내가 받아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컸던 관계들이다.

내 안의 결핍은 내가 알아서 채워야 한다.
누가 시켜서 또는 외로워지기 싫다는 수동적 이유가 아니라 내가 주길 원해서 내가 주고 싶은 만큼 맘껏 주고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을 할 것을 기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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