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라는 선물

인간이 두 번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에게는 과거의 특정 순간으로 돌아가 기존의 선택을 뒤집고 싶은 순간이 있다.
화끈거리는 실수의 순간도 있고,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쳤던 순간도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중 20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니다.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지만 젊은 시절 지독한 실패의 기억들이 몸 안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무조건 허락할 것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이런 경우이다.
드라마는 1988년 올림픽, 2002년 월드컵처럼 기성세대에게는 노력하면 대다수가 성장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보여주면서, 젊은 세대에게는 노력하면 많은 것이 가능했던 세계에 대한 판타지가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초고속 압축 성장을 한 나라의 사람들에겐 후회가 더 많기 마련이다.
폭등과 폭락의 시절 속에서 그때 사지 못한 주식, 채권, 강남 아파트와 땅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런 심리를 꿰뚫어 1997년 ‘외환 위기’와 2001년 ‘9·11 테러’ 속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많은 기회를 포착하는지 보여준다.
몇 년 전부터 웹툰과 웹소설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타임슬립물’의 인기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의 불안감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는 젊은이들에게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성장이 말라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은 괴롭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이다.
시간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미래는 현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고, 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 ‘Present’의 다른 뜻은 ‘선물’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물은 현재이다.
두 번의 인생은 없다.
오늘이 나의 가장 어린 날이다.

감사함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플라자 호텔, 입시를 마친 딸에게 청소년 시절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꿈꾸던 뉴욕 여행을 선물한 부모가 당연하다는 듯 고마워하지 않는 딸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는 지인의 말을 들었다.
이 오랜 고민의 레퍼토리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리어왕’으로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뱀의 이빨보다 날카롭구나!”라는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사랑과 미움이 얼마나 강력히 연결되어 있는지는 최근 부쩍 늘어난 이혼 예능의 법정 싸움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맹렬한 안티 팬은 한때 그를 사랑했던 팬이다.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의 입에서 “너무 적다!”란 불평이 아니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는 건데 생색을 낸다!”는 말을 들은 후, 아예 보너스를 없앴다는 사장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한 아이가 고가 명품 패딩을 구입해 입고 다니는 걸 안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기버’와 ‘테이커’의 당연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중년의 동창회에서 흰머리가 늘었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탈모인 친구의 심정은 어떨까. 분명 그는 남아 있는 친구의 흰 머리카락이 부러워 부아가 날 것이다.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에세이의 맛

올여름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귀여운 문장에 꽂혀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요즘 ‘아네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뻥’이라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는 재미로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에선 빵 터졌다.
문득 ‘니체’와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주말이면 ‘반드시 끝내는 힘’ 같은 자기 계발서와 ‘나는 솔로’를 보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담는다고 말하는 내가 상상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마음으로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비만 클리닉 의사 같은 기분이랄까.

전문가들의 사적인 에세이를 읽는 건 솔직함과 취향 때문이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다”라는 문장에 꽂혀 읽은 김교석의 ‘아무튼 계속’에서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생활 습관을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집안 살림 개념이 모든 게 정확한 위치에 반듯하게 정리된 막 ‘체크인 한 호텔방’이라니. 잘 닫히지 않는 창문은 열지 않고, 깜빡대는 전구는 꺼서 결국 어둠에 익숙해지는 나 같은 게으른 적응론자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을 읽다가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란 문장을 보고 8월 달력을 넘기려다 혼자 흠칫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산 그리고 산 넘어 산!”이란 말 앞에선,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술술 풀릴 줄 알았던 청춘을 지나, 칠팔십이 돼도 살아보지 않은 나이는 영 모르겠다는 예감에 겸손을 떠올렸다.
“적성을 찾는다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종류의 괴로움을 찾는 것”이란 말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치킨에는 맥주, 햄버거에는 감자튀김처럼 여름은 에세이를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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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근데 저 같은 환자는 처음이시죠?”라는 걸 보고 팩폭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전작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역시 자신만 이상한 것 같다는 환자들의 말에 대한 세심한 답변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착하게 산 내게 왜! 왜 나만!’이란 비통함은 본인 얘기를 소설로 쓰면 책 한 권이라는 사람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내 남친과 바람이 났다거나, 은퇴 후로 미뤘던 세계 일주를 계획하던 순간 병을 진단받거나, 대출받아 투자한 가게가 폭삭 망하는 불행 역시 안타깝지만 흔하다.
이런 불행은 내가 전생에 죄를 지어서도, 잘못을 해서도 아니다.
100만 유튜브는 눈에 띄어도, 구독자 100명 미만인 수십 만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을 접고 떠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실패담은 뉴스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정신 치료는 비극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 보편적 불행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 것 역시 그런 이유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편안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나른하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불행하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며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인간의 부정 편향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에서도 맹수의 존재를 파악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의 원시 뇌 때문인데, 99개의 선플 속에 달린 단 한 개의 악플이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그냥’이란 대답이 헤어질 땐 구구절절 수많은 이유가 되어 나오는 것도 행복에 비해 또렷한 불행의 구체성 때문이다.
불행은 바다에 파도가 치듯 일어난다.
불행이 삶의 디폴트값이라 여기면 얻는 심리적 이득은 예상보다 크다.
자기 자신에게 지금 행복한가를 과도하게 묻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 스트레스로 불행해지기 쉽다.
차가 망가졌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행복을 희귀하다고 믿으면 작은 행복에도 깊이 감사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는 칠면조 우화가 나온다.
아침이면 먹이를 받아먹는 칠면조가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준다는 칠면조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농장에서 1000일을 보낸 칠면조에게 1001일 되던 추수감사절 전날이 찾아왔다.
그날 농장주의 손에는 모이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칠면조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칠면조의 운명을 결정한 건 평온했던 1000일이 아니라, 1001일이 되던 그 하루였다.

문학 포럼에서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리는데 시인의 입에서 냉장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상한 음식을 가장 많이 꺼낸 곳이 냉장고라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진짜 질문은 다음이었다.
왜 냉장고가 답이겠냐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냉장고 안에선 음식이 썩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이 안전할 거란 확신, 그것이 냉장고가 음식이 상하기 가장 쉬운 장소인 이유다.

1988년 옐로스톤의 궤멸적 화재는 확고한 기존 산불 방지 정책이 원인이었다.
번개에 의한 자연 발생적 산불까지 모두 진압한 탓에 산에 타기 쉬운 마른나무와 덤불이 너무 누적돼 오히려 불쏘시개가 된 것이다.
불은 무조건 꺼야 할까. 산에서 불길이 닥쳐 올 때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맞불을 놓으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역설은 뭘 의미할까.

‘심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문 ‘시인과 세계’에서 중요한 건 “나는 모르겠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광신자, 정치가의 특징이 당신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확신은 정치인과 선동가의 언어지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다.
확신은 쉽게 부패한다.
우리가 기존 신념을 깨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끝없이 의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 시인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게임의 법칙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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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 올림픽 관련 다큐를 봤다.
서울이 아니라 ‘쎄울’이었다.
“아 라 빌 드 쎄울!(à la ville de Séoul)!” IOC 위원장 사마란치의 88올림픽 개최지 발표가 아직 귀에 선하다.
최신 드론으로 오륜기를 만드는 요즘, 하늘에서 다이빙하는 인간을 띄워 오륜기를 만든 장면을 보니 그 시절의 결기가 느껴졌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군가풍의 출정가 ‘이기자 대한건아’는 ‘이기자, 이겨야 한다!’는 가사를 무한 반복하며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하던 개발도상국 시절의 비장함을 풍겼다.

2024 파리 올림픽의 선전을 보며 떠오른 건 장미란 선수다.
경쟁자인 중국의 ‘무솽솽’ 선수와의 일화를 소개한 그녀는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2007년 세계 선수권이 자신의 역도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메달을 바라면 상대의 실수를 바라기 마련인데, 시합 전 준비 운동을 하는 무솽솽을 보며 문득 그녀는 모든 선수가 죽도록 노력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경쟁자의 실패가 아니라 “너는 네 할 것을 해라. 나는 내가 준비한 것을 하겠다”는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그러자 상대의 실수를 바라며 생겼던 긴장이 사라지고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도 가슴이 두근거린 건 단지 메달 때문이 아니었다.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도 있고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도 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성공을 뛰어넘는 성장이었다.
어떤 경지에 오른 선수들은 ‘더 잘하겠다’가 아니라 ‘연습하던 대로 하겠다’라는 특유의 태도가 있다.
이번 양궁 대표팀 선수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게임은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과거에는 은메달을 따고도 죄 지은 표정을 짓던 선수를 여럿 봤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최선을 다한 멋진 패배에는 아낌없이 박수 치는 일이 많아졌다.
이기는 올림픽에서, 즐기는 올림픽으로 게임의 법칙이 바뀐 것이다.
서구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 투혼과 헝그리 정신을 유독 강조하던 시대를 지나온 황금 세대의 발랄한 자신감, 이 또한 우리 모두의 성장이다.

여기에서 듣기

심리 상담을 하는 지인에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줘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잘 들어줘요”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위로’와 ‘공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상담을 하면 답을 얻어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한두번의 상담으로 해답을 얻는 ‘매직’은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답은 이미 내담자 자신이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담의 출발은 경청이라고 했다.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고, 말주변이나 유머, 경제력도 평범한데 유독 인기 있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늘 함께하자는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그는 참 잘 듣는 사람이었고 상대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잘 듣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매력자본을 축적한 것이다.

야마네 히로시의 책 ‘히어 hear’에는 “이야기를 듣는 목적은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공감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흥미롭게도 ‘듣다’를 뜻하는 영어 ‘hear’와 같은 발음인 ‘here’는 ‘여기’라는 뜻을 가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려면 ‘여기’ 가까이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신통하기만 했다.

관계를 표현하는 재밌는 단어가 더 있다.
영어 ‘close’는 가깝거나 친밀함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문을 닫다’ ‘종료하다’라는 뜻도 있다.
잘 듣기 위해서는 가까이(close) 가야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좋은 관계가 종료(close)되는 것이다.
상대가 부담을 느낄 정도로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차가울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좋은 관계의 핵심이다.
나이 60세를 이순(耳順)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말한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다.
귀가 순해진다는 건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자신에게 오는 말을 공감하고 경청하는 능력 아닐까.

변치 않고, 고여 있는 풍경

얼마 전 일본 여행 중 책가방 무게로 힘들어하는 저학년 초등학생을 보았다.
‘란도셀 오픈런’ 기사를 읽다가 일본은 참 변하지 않는 나라구나 싶었다.
란도셀은 일본 초등학생들의 국민 가방으로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도 이 가방을 메고 다녔다.
비싼 가격에 한눈에 봐도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기 때문에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가 많은데도 왜 저 가방을 수십 년째 고집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본 총리가 나서 ‘팩스 시스템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메일은 팩스에 비해 보안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공무원 사회 때문에 개혁이 난항 중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본은 CD 플레이어가 장착된 노트북이 여전히 많이 팔리는 나라다.
100년이 된 우동 가게와 온천 여관, 카페도 많다.
오래된 가게에서 파는 커피나 우동 값 역시 크게 변함이 없는데, 이는 장기 침체로 30년째 오르지 않는 월급과 관련이 깊다.

일본으로 자주 여행을 가는 친구가 일본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0년 전에 우연히 갔던 라멘 집이 여전히 영업 중이고, 20년 후에도 계속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1년만 지나도 사라지는 가게가 즐비하고, 10년이면 아예 동네 지도가 바뀌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변함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일본의 한 대형 마트에서 직원이 물건에 세일 마크 붙이는 장면을 봤다.
처음 10퍼센트 할인 스티커가 붙은 초밥 가격은 사람들이 집어 들지 않자 3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내려갔다.
대부분의 신선 식품은 물론이고 즉석식품 전체에 덕지덕지 붙은 할인 스티커를 보며, 싸지 않으면 선뜻 사지 않는 일본인들의 실생활을 목격한 셈이다.
높은 월급보다 종신 고용이 주는 안정감을 선호하는 일본의 풍경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빠르게 변하는 대한민국 풍경과 느리게 고여 있는 일본의 풍경 속에서 50퍼센트 세일 스티커가 붙은 350엔짜리 초밥을 먹었다.
변해서 좋은 것과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 사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하여

‘이제는 계란부터 먹으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냉면 안의 계란, 튀김 세트 속에 새우튀김처럼 좋아하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었던 내가 이제 그 순간의 행복을 미루지 않고 살겠다는 이야기였다.
“모둠 초밥을 먹는다면 이제 참치 뱃살부터 먹으리~”라는 선언으로 끝나는 이 칼럼을 읽은 친구에게 “그냥 섞어 먹어! 배고플 땐 노른자, 배부를 땐 흰자랑~!”이라는 메시지가 와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문요한의 책 ‘오티움’에는 심리학자 대니얼 네틀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등장한다.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건강이나 가족 관계, 돈, 지위가 아니라 ‘현재의 행복 지수’라는 것이다.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가 미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저자의 따르면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 역시 녹슬며 행복은 우리가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행복이 ‘세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심리학의 지혜를 담은 좋은 처방이다.
하지만 요즘의 소확행은 자칫 광고업계의 천재적인 마케팅 용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긴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과 쾌락은 분명 다르다.
사랑하는 아이와 실컷 놀아주고 찍은 사진은 언제 봐도 즐겁다.
하지만 한밤의 라면과 치킨은 그 순간 짜릿하지만 아침에 부은 얼굴이 보여주듯 지속 가능하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해로운 행복은 손쉽게 얻는 특징이 있다.

계란부터 먹겠다는 말을 선언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친구의 말에 웃었지만 나는 행복이 일종의 ‘자기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닌, 지금 당장 행복해지겠다는 결심 말이다.
지금 손에 쥔 커피 한 잔에서 느끼는 따스함과 향기에 행복해지는 건, 곧 봄이 올 거란 예감 때문이다.
아직 피지 않았어도 곧 꽃이 필 것을 기대하는 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

잠은 왜 중요한가

OTT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재미 때문에 시간을 너무 쉽게 빼앗겨서다.
흥미로운 건 넷플릭스의 창업주 ‘리드 헤이스팅스’가 자사의 경쟁 상대를 ‘인간의 수면 시간’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기업의 수익 구조는 우리의 관심과 직결돼 있다.
이것이 ‘관심경제’라는 말이 나온 맥락인데, 추천 목록부터 자동 재생 기능까지 온라인 세상은 점점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의사들은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수면 박탈’이라는 현대적 질병의 유발자라고 비꼬기도 한다.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 수면 시간부터 줄인다.
마거릿 대처나 로널드 레이건, 윈스턴 처칠 같은 인물이 하루 4~5시간만 자고도 많은 일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
이들 모두가 ‘낮잠러’에 시간 관리의 달인이었지만 말년에 모두 치매에 걸렸다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찰스 스펜스의 책 ‘일상감각 연구소’에는 불면증이 만성 통증에 이어 둘째로 흔한 정신 질환이며, 유병률이 33퍼센트라고 밝힌다.
여섯 시간보다 적게 자는 사람이 1942년에는 8퍼센트 미만이었지만 2017년에는 두 명 중 한 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만약 청소부나 관리인이 사무실을 청소해놓지 않는다면 아침 사무실 풍경은 어떨까. 교체하지 않은 전구는 여기저기 깜빡일 거고 쓰레기통마다 오물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의 뇌를 사무실이라고 가정하면 수면은 청소부 역할을 한다.
청소부가 밤새 사무실의 이곳저곳을 청소해 리셋하지 않으면 상쾌한 아침은 물 건너간다.
고도의 주의력을 요하는 중요한 일에 실수를 거듭하는 건 수면 부족과 연관이 깊다.
필립스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일 평균 수면 시간은 6.7시간이다.
2016년 OECD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51시간으로 회원국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31분이 부족한 꼴찌다.
수면 부족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적은 게 안타깝다.
잠은 낭비가 아닌 투자다.

나이듦의 기술

어릴 때, 이웃집 할머니 자매 두 분 중 일곱 살 연상의 언니가 훨씬 더 젊어 보이는 게 늘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분은 자전거를 탈 정도로 건강했고, 다른 분은 기운이 없어 늘 집에 누워 계셨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엘렌 랭어의 책 ‘늙는다는 착각’에는 ‘시간 거꾸로 돌리기 연구’라는 실험이 등장한다.
이것은 70~80대의 노인들을 20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일주일간 독립적으로 생활하도록 한 실험이다.
그 시절의 뉴스와 영화를 보고, 그때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일주일 만에 놀라운 결과가 도출됐다.
실험 전까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포기했던 독서나 관절이 아파서 하지 않았던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까지 노인들은 ‘스스로’ 그 모든 일을 해냈다.
청력, 기억력, 악력, 유연성, 자세나 걸음걸이까지 현저히 ‘젊어진 것’이다.
저자는 “노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신체가 아닌 신체적 한계를 믿는 사고방식”이라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건 아이를 늦게 낳은 여성이 아이를 일찍 낳은 여성보다 평균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이와 생활하며 젊고 건강한 신호에 더 자주 노출되기 때문이다.
연상 연하의 배우자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무의식중에 내뱉는 “아이고, 허리야~” “이제 늙었나봐!” 같은 말 역시 우리 뇌에 쌓여 고스란히 각인된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한 탓에 20대에는 취업, 30대에는 결혼,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한다.
하지만 신체 나이에 맞는 올바른 생활방식과 태도가 있다고 믿으면 60대와 70대에 남는 건 은퇴와 노화뿐이다.
그러나 노화와 퇴화는 다르다.
기억력 퇴화 역시 그동안 쌓인 데이터가 젊은 시절에 비해 많아서 생긴 정체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결국 태도다.
노년의 기억력이 좋아지려면 늘 먹던 것, 가던 곳을 갈 때가 아니라 새로운 음식을 먹고, 가보지 않은 곳을 갈 때다.
구부정해지려는 마음을 한 번 더 펴는 것 말이다.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는 서류상 나이를 고쳐주지 않는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건 69세 네덜란드인이 등장한다.
자신이 느끼는 나이는 49세인데 법적 나이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이유였다.
올해부터 한국인의 법적, 사회적 나이는 ‘만 나이’로 통일된다.
사람들이 대체로 이 변화에 긍정적인 건 젊음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개인 차가 있지만 나이가 들면 체력도 기억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노인의 기억이 반짝일 때가 있다.
바로 과거를 이야기할 때다.
72년간 하버드 입학생들의 생애를 추적한 ‘그랜트 연구’에 관한 글을 읽다가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대하는 것처럼 과거를 대한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미래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처럼 노인은 과거의 불가피성을 밝혀내려 애쓰며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는 과거를 곱씹는 ‘반추’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에게 기쁨이 될 때만 과거를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회고적’이 된다는 건 멈춰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의 시간에 이르면 과거는 미래처럼 역동적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특히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 과거의 시행착오와 통찰을 보존해 젊은이의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는 미래적 욕구를 느낀다.
50대에 급격히 낮아졌던 행복도가 70대에 높아지는 것도 이런 맥락 안에 있다.

일본에는 적추(赤秋)라는 말이 있다.
붉은 가을이라는 말로, 푸른 봄을 뜻하는 청춘과 비교해 노년의 청춘을 뜻한다.
꽃이 아름다운 건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일찍 지기 때문이라는 지혜는 적추의 시절에 찾아온다.
황인숙의 ‘송년회’는 이때, 곁에 두고 보면 좋을 시다.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그게 내가 살아본/가장 많은 나이라서’

행복의 조건

 

새해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이다.
개인적으로 “해피 뉴 이어”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복’이 물질적 만족에 가깝게 느껴지는 반면 ‘행복’은 좀 더 심리적 만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근거는 없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2022년을 돌이켜보면 마음이 고달팠다.
직접 불행을 당한 건 아니지만 가족과 친구의 불행과 생로병사에 괴로웠다.
친밀한 사람의 불행은 침습적이라 우리들의 행복은 나뿐만 아니라 친밀한 타인들의 행복에 철저히 빚지고 있다.
게다가 행복은 바랄수록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행복을 ‘다행’이라 바꿔 불렀고, 행복한 삶의 조건을 걱정이 적은 삶이라 정의했다.
‘좋은 일’이 많은 삶보다는 ‘나쁜 일’이 적은 삶 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담담한 말 중에 ‘낫 배드(not bad)’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불행이다.
행복은 불행과 멀리 동떨어진 것 같지만 실은 짝패처럼 붙어 찾아올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골몰한다.
술과 담배를 피하고 운동을 하며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다.
행복학의 대가 조지 베일런트 박사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조건 중 으뜸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다.
시인 잭 길버트는 이 지혜를 자신의 시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회화는 ‘창작의 예술’이고, 사진은 ‘발견의 예술’에 가깝다.
흰 캔버스에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넣는 창작이 회화 작업이라면,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해 프레임에 담는 것이다.
행복은 사진 작업과 닮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이미 우리 주위에 있는 행복을 발견해 내 프레임에 담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기다리는 한 시간이 불행이 될지 행복이 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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