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갑질

 


by 러뮤니케이션 

뭐가 미안한데?

미안할 짓을 왜 했는데?

나도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고 빨리 이 싸움을 풀고 싶은데, 이렇게 사과를 받지 않고 싸움을 연장시킨 경험 있으신가요?

상대방이 사과를 하는데도 내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때 괜히 하나라도 더 트집 잡게 되는 본인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 적은 없나요?

하지만 분노의 감정을 잘못 다스린다면, 본인도 모르게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사과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자신을 서운하게 만든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하기 어렵겠지만,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주는 것은 어떨까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갑질

  1. 자신의 감정 상태와 사과에 대한 노력은 별개로 구분

  2. 상대방의 노력에 대한 인정

  3. 구체적인 감정 상태 전달

위의 세 단계는, 상대가 사과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에 뒤덮일 때 상대를 인정해 줘야 하는 것들을 간과하게 됩니다.

주로 '넌 항상 그러더라?'라고 시작되는 일반화를 하게 되는 실수를 겪는 시점이죠.

상대방은 당연히 억울합니다.
'내가 항상 그랬다고? 지금 나는 사과도 했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상대방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자신의 감정이 풀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상태이죠.

상대방이 해준 노력을 인정한다고 자신의 감정이 반드시 풀려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당연히 상대의 노력이 당신에게 닿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노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냐, 또는 노력을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대화의 방향은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걸 사과라고 해? 내가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vs.

그래 그래도 미안하다고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감정이 나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

나의 화가 풀리지 않는 것을 전달할 때 자신의 감정 전달과 별개로 구분하지 않고 노력을 깎아내릴 경우, 두 가지의 부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1) 계속 사과한다.

2) 사과할 마음이 사라진다.

2번은 그렇다 쳐도, 1번이 왜 문제가 될까요?

여기서부터 계속 사과하는 것은 '을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이 표현해야 하는 정당했던 분노가, 나도 모르게 갑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반복되고 지속된다면 상대방은 부당함을 느끼게 됩니다.

부당함과 억울함을 또 계속 느끼게 된다면 이 연애에서는 피로감이 누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손 두발 다 들고 학습된 무기력함으로 미안함을 외치게 하는 것은 관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악화시킵니다.

감정적 갑질과 무기력한 사과의 악순환은, 갈등 상황 시 갈등 구도를 고착화시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가짜 공감 진짜 공감

풀리지 않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이제는 제대로 공감을 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사실 자신이 어떤 공감을 받아야 하는지, 또 받고 싶은지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기 전에, 공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공감'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고 비슷한 표현과 리액션을 취하는 것 등을 공감이라 여기곤 하죠.

그것은 공감 후의 반응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공감을 하려다 배척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자신이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지 못할 경우 당신이 생각하는 그 공감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공감이란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공감은 그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감정이 이입되지 않더라도,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그때 나온 그렇구나 가 비로소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과 헤아리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면 공감에 실패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웬만해서 일부러 못된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 이상 본인이 당했을 때 기분 나쁠 것 같은 일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행동했을 때 갑자기 상대방이 서운해하거나 화가 나거나 한다면 굉장히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대부분 이때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난 그러려던 의도가 아닌데 왜 화가 나..? '

상대의 기분 나쁜 반응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냥 그것은 그(녀)만의 감정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해는, 결과여야만 하지 시도가 되는 순간 큰 숙제가 되어버립니다.

감정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나서 비로소 되는 것이 이해입니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너에겐 그게 상처였구나.

내가 한 행동이 나도 모르게 너를 속상하게 만들 수도 있구나.

<함께 나누기>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서

당신의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달라고

요청해 본 경험이 있나요?

또는, 그런 공감을 받고 싶었는데 어려웠던 경험이 있나요?

 

공감의 올바른 이해와 스키마 차이에 대한 갈등 해결 

by 러뮤니케이션 

공감의 오류와 감정 수용의 중요성

사람들은 종종 공감을 상대방과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감하려다 오히려 상대방을 배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된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이 당신과 다르게 느낄 때 진정한 대화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슬퍼하거나 화가 났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감정을 그렇구나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공감의 시작입니다.

공감을 하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감은 '존중'에서 시작되며, 이는 서로 다른 의견과 감정을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가치관과 다른 의견을 꺼낼 때에도 이를 무조건 수용해야 할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수용'이라는 것은 당신이 '옳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의견이 내 생각에는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네 생각은 그렇구나.입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말이 바로 내 생각은 달라입니다.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생각과 감정의 자유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떠한 생각이든 어떠한 감정이든, 그 생각이 다소 비효율적이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그것은 각각의 자유라는 것이 전제에 깔려있어야 온전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스키마(Schema)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경험한 일들과 환경에 따라 '스키마'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상황을 해석합니다.

스키마는 우리가 정보를 처리하고 적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개인마다 다른 스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와 저녁 식사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함께 드라이브하거나 산책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스키마에 따라 같은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며, 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이러한 스키마 차이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한 커플이 '애정'에 대한 스키마가 달라서 다투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여성 A 씨는 '헌신'과 '배려'를 애정의 표현으로 여기고, 남성 B 씨는 '즐거운 시간'과 '함께하는 경험'을 사랑의 표현으로 여깁니다.

같은 데이트에서 A 씨는 남자친구를 위해 희생했다고 느꼈지만, B 씨는 자신이 계획한 데이트가 즐거웠으니 사랑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믿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각자의 스키마를 바탕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서로가 기대하는 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애정에 대한 스키마가 다른 두 남녀의 싸움: 넌 날 사랑하긴 하니?

[사랑에 대한 두 남녀의 스키마]

여성 A 씨와 남성 B 씨는 '사랑'에 대한 스키마가 각각 다릅니다.

  • 여성 A 씨: '헌신하는 모습', '매너 있는 모습',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

  • 남성 B 씨: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선물을 주고받는 것'

위의 두 남녀는, 데이트가 마무리될 때쯤 이 데이트가 완벽했다고 속으로 뿌듯해하던 B 씨와 달리 A 씨는 어딘가 뾰로통해 보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고, 데이트 전부터 데이트하는 순간까지 일어나 일련의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성 A 씨의 입장]

  1.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고름

  2. 약속시간에 20분 먼저 도착함

  3. 상대방이 원하는 시간대를 맞춰줌

  4. 식사할 때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양보해 줌

[남성 B 씨의 입장]

  1. 데이트 전 꽃을 준비함

  2. 맛집을 미리 알아봐둠

  3. 즐거운 데이트를 위해 드라이브 코스를 계획함

  4. 식사할 때 여자친구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건네줌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어긋났던 것일까요?

알고 보니 B 씨가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를 A 씨의 집과 거리가 먼 곳으로 짰던 것입니다.

배려와 희생 그리고 매너가 '애정'이라고 느끼는 A 씨에게는 어떤 선물이나, 맛있는 식사는 단순히 기분 좋은 요소였을 뿐, 정작 받을 때 애정이라고 느끼는 것들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A 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하니까 너의 시간도 맞춰주고, 네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도록 양보했는데...

왜 너는 다 너의 위주로만 했어?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니?

B 씨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너랑 맛있는 거 먹고 싶고 너랑 즐거운 시간 보내고 싶으니까 다 이렇게 한 거지 나만 좋자고 한 게 아니잖아.

누군가는 이 다툼에서 A 씨가 이해가 가기도 하고, B 씨가 이해가 가기도 할 것입니다.

또는 둘 다 이해가 되거나 안될 수도 있죠.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아주 당연합니다.

연인의 싸움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각자가 가지는 스키마가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운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B 씨는 서운해하는 A 씨에게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요?

네 위주로 맞춰주지 않아서 미안해라고 해야만 이 다툼이 좋게 끝날 수 있는 것일까요?

감정과 인지의 조화: 성숙한 관계를 위한 필수 요소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 무조건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야만 감정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서운한 감정은 상대방이 그 감정을 인정해 줄 때 충분히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B 씨는 A 씨에게 너에게는 그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구나라고 말해줌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사과를 요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고,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관계는 이러한 감정과 인지의 조화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방의 스키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감정을 온전히 존중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고 깊게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무리:

B 씨는 A 씨를 덜 사랑한 게 아닙니다.

이기적이지도 않죠.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A 씨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 우리의 부부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시선이 희미해지고,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상대방의 사랑에 결핍을 느끼곤 하죠.

정작 상대방은 나에게 사랑을 줬는데도 말이에요.

연인 간의 갈등은 대부분 서로 다른 스키마와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공감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시작입니다.

나르시시스트 이야기

왜 나르시시스트와 사랑에 빠질까? 

by 나르시시스트 심리 

그들은 연인으로서 최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빠지는 걸까? 이는 실제로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따분하고 지루할수록 그들의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간다.

꿈 같은 환상을 이루기 위해 뛰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이라는 지루한 세상을 잊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평화 이거나) 더군다나 새로운 것, 흥미가 끌리는 것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기대에 빠진다.

거기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찬사를 얻기 위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칭찬해 줄 것이다.
이 상황은 언듯 보기에 꿈은 현실같고 이 인연은 진정한 사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이러한 행동들은 당신의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란 기분, 당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자존감이 낮고 리더십이 강한 사람에게 쉽게 매력을 느낀다면 나르시시스트의 오만한 태도나 이루기 불가능한 수준의 꿈 같은 이야기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서로 공통점이 너무 많고 서로 잘 맞는 것이 많은 느낌,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 열정적인 감정 표현, 이에 따르는 운명이라 느껴지는 황홀한 기분,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들었을 때 완벽한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이 요소들은 자기애적 성향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빠졌을 땐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그의 연기)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시기 연인이 나의 감정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어떻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도록 만든다고 가스라이팅이라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르시시스트의 연애 초반이 워낙 극적이라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구분하기 위해 먼저 나르시시스트가 맺는 관계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나르시시스트의 모든 관계는 이익을 기반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관계에서 '이익'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의 성격 특성과 연관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는 관계는 애초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이익이 되는지 여부가 우선인 거다.

여기서 '무언가와 이익' 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이익을 포함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존경이나 인정, 높은 평가와 같은 감정적인 요소도 포함된다.
이러한 이익이 보장되지 않거나 자신의 기대와 다를 경우 관계를 빠르게 버리거나 상대를 적대시 한다.

또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부풀리기 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르시시스트는 ‘존경’을 표하는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친분을 과시하지 못하거나 목적(투자 유치, 금전 거래 등)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그 존경은 갑자기 비난으로 바뀐다.

나르시시스트가 선택하는 대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빛 내주거나, 인정, 존경과 같은 감정적인 요소를 충족시켜주지 않는 대상이라면 그들의 기대가 엇나가는 순간 관계도 엇나간다.

그 엇나가는 순간은 나르시시스트의 ‘화합망상’1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연인과 자신이 완전한 ‘하나’ 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것도 영원히) 나르시시스트는 애착을 갖는 대상이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위협’으로 느낀다.
경계라는 것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연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서로 주고 받는 호혜성 자체가 없으니 관계는 항상 지배자와 피지배자 형태의 불균형이 나타난다.
가끔 피지배자의 분노로 인해 지배자의 잘못이나 실수를 명분삼아 둘의 양상이 바뀌기도 하지만 관계의 불균형이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관계 특성이 경험적으로 볼 때 익숙하다면 앞으로의 애착 관계에서 어떻게 형성해 나아갈지 고민해야 한다.

공감의 올바른 이해와 스키마 차이에 대한 갈등 해결 

by 러뮤니케이션 

공감의 오류와 감정 수용의 중요성

사람들은 종종 공감을 상대방과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감하려다 오히려 상대방을 배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된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이 당신과 다르게 느낄 때 진정한 대화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슬퍼하거나 화가 났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감정을 그렇구나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한 공감의 시작입니다.

공감을 하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감은 '존중'에서 시작되며, 이는 서로 다른 의견과 감정을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가치관과 다른 의견을 꺼낼 때에도 이를 무조건 수용해야 할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수용'이라는 것은 당신이 '옳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의견이 내 생각에는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네 생각은 그렇구나.입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말이 바로 내 생각은 달라입니다.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생각과 감정의 자유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떠한 생각이든 어떠한 감정이든, 그 생각이 다소 비효율적이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그것은 각각의 자유라는 것이 전제에 깔려있어야 온전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스키마(Schema)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경험한 일들과 환경에 따라 '스키마'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상황을 해석합니다.

스키마는 우리가 정보를 처리하고 적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개인마다 다른 스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와 저녁 식사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함께 드라이브하거나 산책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스키마에 따라 같은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며, 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이러한 스키마 차이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한 커플이 '애정'에 대한 스키마가 달라서 다투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여성 A 씨는 '헌신'과 '배려'를 애정의 표현으로 여기고, 남성 B 씨는 '즐거운 시간'과 '함께하는 경험'을 사랑의 표현으로 여깁니다.

같은 데이트에서 A 씨는 남자친구를 위해 희생했다고 느꼈지만, B 씨는 자신이 계획한 데이트가 즐거웠으니 사랑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믿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각자의 스키마를 바탕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서로가 기대하는 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애정에 대한 스키마가 다른 두 남녀의 싸움: 넌 날 사랑하긴 하니?

[사랑에 대한 두 남녀의 스키마]

여성 A 씨와 남성 B 씨는 '사랑'에 대한 스키마가 각각 다릅니다.

  • 여성 A 씨: '헌신하는 모습', '매너 있는 모습',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

  • 남성 B 씨: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선물을 주고받는 것'

위의 두 남녀는, 데이트가 마무리될 때쯤 이 데이트가 완벽했다고 속으로 뿌듯해하던 B 씨와 달리 A 씨는 어딘가 뾰로통해 보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고, 데이트 전부터 데이트하는 순간까지 일어나 일련의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성 A 씨의 입장]

  1.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고름

  2. 약속시간에 20분 먼저 도착함

  3. 상대방이 원하는 시간대를 맞춰줌

  4. 식사할 때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양보해 줌

[남성 B 씨의 입장]

  1. 데이트 전 꽃을 준비함

  2. 맛집을 미리 알아봐둠

  3. 즐거운 데이트를 위해 드라이브 코스를 계획함

  4. 식사할 때 여자친구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건네줌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어긋났던 것일까요?

알고 보니 B 씨가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를 A 씨의 집과 거리가 먼 곳으로 짰던 것입니다.

배려와 희생 그리고 매너가 '애정'이라고 느끼는 A 씨에게는 어떤 선물이나, 맛있는 식사는 단순히 기분 좋은 요소였을 뿐, 정작 받을 때 애정이라고 느끼는 것들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A 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하니까 너의 시간도 맞춰주고, 네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도록 양보했는데...

왜 너는 다 너의 위주로만 했어?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니?

B 씨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너랑 맛있는 거 먹고 싶고 너랑 즐거운 시간 보내고 싶으니까 다 이렇게 한 거지 나만 좋자고 한 게 아니잖아.

누군가는 이 다툼에서 A 씨가 이해가 가기도 하고, B 씨가 이해가 가기도 할 것입니다.

또는 둘 다 이해가 되거나 안될 수도 있죠.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아주 당연합니다.

연인의 싸움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각자가 가지는 스키마가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운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B 씨는 서운해하는 A 씨에게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요?

네 위주로 맞춰주지 않아서 미안해라고 해야만 이 다툼이 좋게 끝날 수 있는 것일까요?

감정과 인지의 조화: 성숙한 관계를 위한 필수 요소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 무조건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야만 감정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서운한 감정은 상대방이 그 감정을 인정해 줄 때 충분히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B 씨는 A 씨에게 너에게는 그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구나라고 말해줌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사과를 요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고,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관계는 이러한 감정과 인지의 조화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방의 스키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감정을 온전히 존중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고 깊게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무리:

B 씨는 A 씨를 덜 사랑한 게 아닙니다.

이기적이지도 않죠.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A 씨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 우리의 부부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시선이 희미해지고, 온전히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상대방의 사랑에 결핍을 느끼곤 하죠.

정작 상대방은 나에게 사랑을 줬는데도 말이에요.

연인 간의 갈등은 대부분 서로 다른 스키마와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공감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시작입니다.

허공에 첫 발을 내딛는 용기 

by 김동규 

산에 온 지도 1년이 넘었다.
거주지를 서울에서 울산으로 옮기면서 생긴 가장 뚜렷한 변화는 지인이 거의 없는 곳에서 살다 보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가족끼리 산책 겸 자주 가는 곳이 집 근처 태화강이다.
집에서 강변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온갖 다양한 동식물들을 만난다.
깨끗한 강물에는 ‘물 반 물고기 반’이라 말할 정도로 물고기가 많고, 그걸 잡아먹는 백로, 까마귀, 오리, 각종 철새 등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서울의 한강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울산에 와서 딸의 그림 솜씨가 많이 늘었습니다.
딸래미의 최신작, <판타지 아이유>랍니다.
아이유는 딸애의 영원한 본진 최애라네요.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를 사귀는 중인 딸을 응원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이윽고 ‘태화강 국가정원’에 도착한다.
이곳은 도시 근린공원으로 2019년 순천만에 이어 두 번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봄에는 빨간 꽃양귀비와 장미 등 각종 꽃들이 피어나고, 가을에는 드넓은 정원이 국화와 억새들로 뒤덮인다.
11월 즈음 이 부근에는 추위를 피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떼까마귀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약 10만 마리 가량!). 일전에 하늘을 온통 검게 물들인 까마귀 무리의 군무를 보면서, 감격한 나머지 울산에 온 보람을 느낀다고 아내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이 광경 하나로 타향살이의 시름이 몽땅 사라진 셈이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철새 까마귀

태화강 국가정원 가장자리에는 강의 남쪽과 북쪽 둔치를 잇는 다리가 있다.
차들이 오가는 ‘국가정원교’가 그것인데, 바로 그 아래 설치된 인도교가 ‘은하수 다리’이다.
이 인도교의 특징은 다리를 건널 때 강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투명 바닥으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다.
그 투명 다리를 건너다보면 공중에 붕 뜬 느낌이 난다.
아이들은 그걸 무서워하면서도 재미있어 한다.
투명하게 비치는 허공에 선뜻 발을 내딛기가 망설여지지만, 일단 발을 뻗으면 공중을 나는 듯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투명 발판의 내구성을 믿지 못하면, 이 자유를 결코 구가(謳歌)할 수 없다.

‘은하수 다리’는 시민 공모로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투명한 바닥과 잘 어울린다.

시인 정현종은 「섬」이라는 짧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초판), 1992. 「섬」 65쪽.

옛사람들 말처럼, 저마다 자기만의 별이 있다면, 그 별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있어 커다란 별 무리가 만들어진다.
그 무리의 형체를 두고 은빛 강줄기(銀河水)라 부르기도 하고 우윳빛 길(milky way, via lactea)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기 헤라클레스가 너무 세게 헤라의 젖을 빨아서 그 천하장사의 입을 뿌리치면서 생긴 젖줄기라고 상상했다).

낯선 곳에서 살다보면 모든 게 다 새롭다.
새로운 게 아무리 좋더라도, 새로운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힘들기 마련이다.
특히 낯선 사람과 만나는 일은 매번 어렵다.
상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와 관계를 맺는 일에는 언제나 위험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저이가 이방인을 환대하는 착한 이웃일지 손님을 배척하고 갈취하는 악당일지, 단박에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 자체를 주저하게 되고 피하게 된다.
지금이야 엄마 아빠보다 더 잘 적응하고 친구가 많아졌지만, 우리 집 아이들이 처음에는 집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던 이유다.

하기야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야 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낯선 타인을 만날 때에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단한 돌다리마저 그러한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투명 다리를 어떻게 쉽게 믿고 건너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낯선 타인에 대한 공포, 즉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생명체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습득한 생의 본능적 지혜에 가깝다.

서양에서 이런 신중한 지혜를 잘 겸비한 최초의 사람이 오뒷세우스이다.
그는 트로이 전쟁 후 10년 동안 지중해 전역을 떠돌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
외눈박이 식인 괴물 폴뤼페모스도 만나고 마법으로 사람을 돼지로 바꾸어 놓는 키르케도 만난다.
개중에는 나우시카 같이 이방인을 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위험천만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구사일생 귀향하고 나서도 집안 재물을 축내는 구혼자들은 차치하고라도 자기 식구들, 즉 아버지, 아내, 아들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다.
거지 행색의 나그네로 위장한 채 먼저 그들의 신의를 확인한다.
오뒷세우스는 현실의 위협에 대처하는 꾀 많은 사람의 전형 그대로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오뒷세우스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의심도 만만치 않다.
오랫동안 108명이나 되는 구혼자들에게 시달려서인지, 그녀는 오뒷세우스가 남편임을 밝혔는데도 선뜻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남편하고만 공유했던 비밀을 통해 그를 시험한다.
남편이 들으라고 페넬로페는 하녀에게 부부의 방 밖으로 침상을 내놓으라고 명하는데, 이것을 들은 오뒷세우스가 역정을 내며 이렇게 말한다.

여보! 당신이 하는 말은 정말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려. 누가 내 침상을 다른 데로 옮긴단 말이오? 아무리 솜씨 좋은 자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 정교하게 만든 그 침상의 구조에는 남모를 비밀이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그것을 애써 만들었으니 하는 말이오. 우리 안마당에는 잎사귀가 긴 올리브 한 그루가 한창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줄기가 기둥처럼 굵었소. 그 나무 둘레로 나는 돌들을 촘촘히 쌓아올려 방을 들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것이 완성되자 그 위에 훌륭하게 지붕을 씌우고 튼튼하게 짜맞춘 단단한 문짝들을 달았소. 그러고 나서 잎사귀가 긴 올리브의 우듬지를 자르고 밑동을 뿌리 쪽부터 위로 대충 다듬은 뒤 청동으로 훌륭하고 솜씨 좋게 두루 깎고 먹줄을 치고 똑바르게 말라 침대 기둥으로 만들었지요. …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제시하는 우리 침상의 비밀이오.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2019. 540-41쪽.

워터하우스 Penelope and the Suitors

오뒷세우스는 낯선 이방인을 조건부로 환대하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 얼마만큼 이득이 되는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환대할 손님과 쫓아낼 사람을 구별한다.
해를 입힌 자(구혼자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도 불사한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명대사가 등장하는 영화 <킹스맨>의 한 장면, 즉 술집에서 시비를 거는 동네 양아치들을 응징하기 위해 먼저 술집 문을 걸어 잠그는 장면은 『오뒷세이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하인을 시켜 자기 집 문을 걸어 잠근 후, 구혼자들을 무참히 도륙한다.

영화 <킹스맨>

타자에 대한 철저한 무지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조건을 따지면서 선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무조건적인 환대를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유나 조건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만큼 감격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은 낯선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더욱 사랑할 수 있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고독한 (인간) 별들이 투명 다리로 이어져 장대하고 아름다운 은하수가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신뢰trust’라는 단어는 ‘보호하다’, ‘의지하다’, ‘안전하고 강하게 하다’라는 뜻의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트레이스타treysta’에서 나왔다.
신뢰는 전설 속의 투명 다리 같은 것이다.
다리의 존재를 믿고 첫 발짝을 내디디면 그제서야 눈앞에 나타나는 그런 다리 말이다.
떨리는 두 발 아래 그 다리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경계하고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
… 언제 어떻게 타인을 신뢰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까다로운 기술이다.
그러나 신뢰를 거부하고 모든 가능한 관계를 거부하면 취약함 속에 홀로 남게 된다.
그러니 아무런 보장 없이 몸을 덜덜 떨며 투명 다리 위로 한 발짝을 내디딘다.
일이 잘 풀리면 심연으로 추락하는 대신 전보다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도착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윌 버킹엄, 『타인이라는 가능성』, 김하연 옮김, 어크로스, 2022. 62-63쪽.

그렇다.
신뢰란 투명한 은하수 다리와 같은 것이다.
미지의 타자를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용기가 그나마 안전을 보장해 주는 최선책이다.
필승의 전략은 적과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적을 아예 친구로 만드는 길이다.
그 길로 향한 출발점은 바로 ‘없어 보이는’ 투명 다리를 믿고 내딛는 첫 발걸음이다.
믿을만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눈 질끈 감고 허공에 한 발 내딛는 용기가 관계의 시작이다.
다음부터는 한 걸음 더 다가설 때마다 신뢰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근거 없는(위험천만한) 첫 믿음, 바로 이것이 시인이 말했던 사람들 사이의 섬이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가?

* 이 글은 <웹진 한국연구>에 실린 것을 조금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자유를 무서워한다 - 에리히 프롬 

by 김동규 

간은 자유를 원한다.
자유로운 존재다.
한편에서 보면, 분명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당연히 자유롭기만을 원할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자신있게 고함칠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글이다.
194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니까, 34년 미국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7년 후의 작업이다.
그래서 아마 영어로 쓰인 것 같다.
이 글의 핵심은 머리말에 있는 다음 문장들에 담겨 있다.

자유는, 비록 우리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우리를 고립시킴으로써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립은 견딜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유일무이함과 개성에 기초한 적극적인 자유의 충분한 실현을 위해 전진하느냐, 이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되었다.

Fromm, Erich (2013-03-25T22:58:59.000). Escape from Freedom . Open Road Media. Kindle Edition.

에리히 프롬

이 책의 내용은 하나의 예측이기보다는 진단-즉 해결보다는 오히려 분석-에 가깝지만, 독서의 결과 우리들의 행동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왜냐하면 자유를 버리고 전체주의에로 도주하려는(예컨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들)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고자 노력하는 행동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생각(창공을 사뿐히 날아가는 새라고 상상)만큼 가볍지 않다.
외려 무거운 짐이다.
프롬도 하이데거도 그렇게 정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회피하고픈 무게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동시에 저주한다.
원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워한다.
자유가 고대 그리스 비극 영웅들(자유로 인해 파멸했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의 전유물인데 반해,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영웅이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그런 자유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어려움은 거기에 있다.

동양 사상도 마찬가지다.
지배-피지배 구조를 가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지배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되어야 덕치주의가 성취될 수 있다.
자유든 덕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편안함, 통속적으로 이해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장벽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자유는 인간의 이상이고 목적이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황무지를 건너가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자발적으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고독과 불안 없이 자유의 왕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낱 '도둑놈의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관건이다.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프롬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두 가지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을 말한다.
하나는 생리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고립과 정신적 고독(곧 자유를 말한다)을 회피하려는 요구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거슬러서 어느 정도까지 헤엄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유라는 망망대해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떼 지어

누군가를 추종하지 않고,

홀로 헤엄쳐 나아갈 수 있는가?

마음에 관하여 - 소세키 

by 김동규 

나츠메 소세키(1867-1916) (출처: 위키백과)

츠메 소세키라는 일본 작가의 글을 읽고 있다.
그는 책을 멀리하고(작가가 하는 이런 말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자기 본위”라는 화두를 가지고 고민했다고 소회한다.
책을 읽다 말고, '나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망설이다가 “마음”을 꼽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마음이다.
세상의 법칙까지 가지도 않는다.
거기까지 확대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사람들의 말과 행동, 또 다양한 산물들을 이해하는 지평으로 설정된 마음,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주위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싶다.
다른 누구보다도 나의 마음을...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의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넓고, 욕망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이성이나 감정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깊으며, 정신과 육체 어느 하나에로 귀속시키려 하면, 거기에 너무 완강히 저항한다.

사전에는 “마음”이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나츠메의 작품에 『마음心(こころ)』이 있다.
일본 말 코코로는 어떤 의미일까? 일단 눈에 띄는 특징으로 일본어에서 마음은 “기분”과 연결된다.
마음이란 어떤 기분, 느낌, 감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일본인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지폐 속 소세키 (출처: 위키백과)

①心(こころ)。mind

②気分(きぶん)。 気持(きも)ち。 mood 「─이 상쾌하다:気分が爽快(そうかい)である」

③人情(にんじょう)。 heart 「─이 후한 사람:人情の厚(あつ)い人(ひと)」

④考(かんが)えていること。 心(こころ)の中(なか)。 thought 「─에도 없는 말:心にもない言葉(ことば)」...

그렇다면 우리말 사전에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예상대로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①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마음이 좋다/아내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어진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②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몸은 멀리 있어 마음으로나마 입학을 축하한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③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 ¶안 좋은 일을 마음에 담아 두면 병이 된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마음을 비워라./친구에게만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④사람이 어떤 일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 ¶마음을 떠보다/오늘은 날이 추워 도서관에 갈 마음이 없다.
/그는 이번 일은 꼭 이루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나는 너의 호탕한 성격이 마음에 든다.
/하루 종일 백화점을 돌아다녀 봐도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가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

무엇보다 마음은 시간이다.
거꾸로 '시간은 마음이다'라고 말해도 된다.
물론 이렇게 하면 의미 변화가 발생한다.
통상 주어는 술어를 통해 해명된다.
해명된다는 것은 여기에서 술어의 카테고리에 술어가 포섭됨을 뜻한다.
마음을 시간의 범주로 포섭하면,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
마음을 무엇이라 하기 어렵다.
통상 마음을 영혼이나 의식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철학자의 고답적 이해에 불과하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마음은 그렇게 좁은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말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 혹은 생각 혹은 열정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때문에 내가 아무리 그 개념을 정밀하고 엄격하게 사용한다고 해도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왜냐하면 그 개념이 계속 시선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하하!

마음을 준다.
” 이 말에서 우리는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상대에게 준다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마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무엇이다.
“마음을 빼앗긴다.
” 이 말은 내게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겨 그것에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다.
두 어법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이라는 수식어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최상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가장”이라고 손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중요하다라는 말도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 중요하다는 것인지, 왜 그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중요하다는 말은 “귀중하고 요긴함”을 뜻하는 말이다.
귀중하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요긴하다는 것은 그와 연관하여 유용성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존재의 핵심과 유용성이 동일하지 않다.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후자의 경우에 유용성은 언제나 어떤 기준이 전제된다.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유용할 수도 있고 무용할 수 있다.
다른 기준에서 보면, 유용한 것이 무용한 것이 될 수 있고, 무용한 것이 유용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귀중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양자 모두 자기 존재에 걸려 있다.
다시 말해서 양자 모두의 궁극적 기준은 자기 존재다.

이 점에서 마음은 자기 존재의 핵심을 일컫는 말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결국
마음이란 타자와 함께 자기 존재가 드러나는 시간의 지평이 아닐까? 시계에 갇힌 시간 개념만 걷어찰 수 있다면, 이런 마음 규정도 가능할 것 같다.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에서도 시간이 중요하다.

1 댓글

Welcome

  1. 관심과 간섭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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