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는 글 대신 그림으로 17세기 종교 미술이 마주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에 반대해 권위를 지키려는 반 종교개혁의 움직임으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니 평화롭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예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죠. 이런 가운데 카라바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밀라노의 대주교는 성직자들을 매주 집합시켜 고해성사 방식을 감시하거나, 교구 내 모든 교회의 그림들을 검사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이에 어떤 화가들은 ‘검열’을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죠.
이렇게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로마에서는 성매매 여성이 너무 많아 교황이 칙령을 내려 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흑사병으로 충격을 받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믿음을 다지는 ‘고행 신앙’이 유행합니다. 폭력과 고통, 성이 뒤섞인 극단의 시대. 카라바조는 사람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연극 무대 위에 올리듯 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드러냅니다.
순례자를 거리 위의 부랑자처럼 표현한 ‘로레토의 성모’, 세상을 떠난 예수의 육중한 몸을 버거워하며 땅에 묻는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토마스의 의심’ 등이 그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