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행복’이란 주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으로 갈수록 이런 행복 찾기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해진다.
이는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되어 있기에 마음의 풍요로움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에서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와 가장 밀접한 변인은 최근 들어 ‘자존감'과 '정서’도 새롭게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지만, ‘성격’이라 한다.
나는 이런 여러 선행연구를 참고하여 성격, 자존감, 정서, 경제력, 학력 중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성격이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부정적인 사건을 경험할 땐 자존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대부분 상황에서 성격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작가 셰익스피어는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 등의 작품을 통해 성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인간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이 운명이라 여겼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운명이 아니라 성격이 인간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고 주장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뭐죠?”라고 질문하면 보통 제일 먼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답한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 모두 죽으니 당연 4대 비극 중 하나라 생각들겠지만, 4대 비극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왜 로미오와 줄리엣이 포함되지 않지? 이런 의문에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햄릿의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성격, 리어왕의 오만, 맥베스의 권력에 눈이 먼 탐욕, 오셀로의 의심과 질투는 모두 건강하지 못한 성격을 반영한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모두 파탄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같은 죽음이란 결말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앞선 작품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4대 비극에 속하지 않는다.
이처럼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성격'임을 강조했다.
만약, 당신의 친한 누군가가 새로운 이성을 만나고 왔다면, 어떤 질문을 제일 먼저 하는가?
여성에게는 “그 남자 돈 많아?” 남성에게는 “그 여자 예뻐?”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다음 질문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그 사람 성격 어때?”라고 물을 것이다.
이러한 첫 질문은 남성과 여성의 원초적인 본능과 관련한다.
남성은 본능에 따라 ‘종족 번식’에 주력하고 여성은 ‘안정적인 육아’에 주력한다.
그러나 남녀의 원초적 본능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 사람 성격 어때?”라고 질문한다.
이렇게 우리는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성격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성격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면, 성격이 답이다.
삶이 공허한 사람들의 특징
공허에서 헤쳐 나오는 법
20대엔 문득 이런 생각에 자주 사로잡혔다.
지금은 이렇게
인간관계가 힘들어도, 취업준비가 힘들어도, 경제적으로 돈이 없어도, 좌절된 꿈에도, 연애가 힘들어도, 불안정한 이 모든 삶이 죽을 만큼 열받고 짜증 나도 저 멀리 보이는 빛 하나만 보고 그저 견디면 다해결될 거라고. 그리고 난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기만 하면 이 모든 걱정과 근심이 동시에 해결될 찬란한 30대가 너무 기대됐거든.
소름 돋게도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30대가 들어서자 이 모든 게 한 번에 해결됐다.
내겐 더 좋은 사람들이 와 날 좋아해 줬고, 원했던 만큼 돈도 벌어보고,사랑하는
여자도 만나 안정적인 삶을 조금씩 하나둘 만들었다.
20대 때 기대했던 바람들 중 단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룬 나 자신이 한편으로는 대견했고, 자기 객관화가 결여되어 한때는 자아도취에 빠져 살기도 했다.
사실 자아도취도 아니다.
실제로
스스로 행복했거든.
근데 이 행복은 가면에 불과했다.
그 껍데기가 벗겨지고 진짜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는 굳이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재테크’로 예를 들어보자. 과거의 내가 더 많은 돈을 벌길 원했다면 그럼 미래에 더 많아지겠지 당연히. 왜? 내가 노력하고 그걸 목표로 삼았으니까.
이 세상엔 안 되는 건 없다.
20대 때 내가 원했던 것처럼, 목표를 실천에 옮긴다면 당연히 더 많아지겠지. 이직을 할 수도 있고 사업을 할 수도 있고. 근데 그다음은뭐? 목적어가 빠진 거다 목적어가. 미래에 당연히 돈은더 많아질 텐데 행복한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비단 회사 안에서의 직급이나 승진, 자영업에서의 매출향상, 사회적 명성 이런 게 아니라 그 돈으로 결국 뭘 해야 행복한데?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 거울 속 내 모습을 나는 사실 꽤 오랫동안 혐오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게 더 좋은 사람들이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일 약속에 나가 술 마시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의리를 다져나간다는 건 찰나의 즐거움뿐이다.
집 돌아가는 길 그 공허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아니,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인간관계였는데 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왜 안 행복하지? 이렇게 그냥 계속서로 늙는 거다.
큰 기대 없이.
매사가 그랬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새로 겪어보는 것들이 하나둘씩 줄어들고 신체 그리고 감정선이 조금씩 무뎌진다.
이제 더 많은 돈이나 더 좋은 관계가 곁에있어도 20대처럼 설렘이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20대의 풋풋했던 사랑은 30대의 소개팅에서는 온데간데없고 정신 차려보면 어느덧 서로의 조건만 재고 있다.
기대는 그 기대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주기보다 그반대, 실망만 안겨줬다.
큰 기대가 큰 보상으로 똑같이 돌아오는 경우는 훨씬 더 희박했다.
지인 중 소개팅에 매일 실패하는 여성분이 있다.
이 여성분은 실제 모습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의 괴리감이심한데, 상대편에서 사진만 보고 갔다 실제로 만나 실망하고 잘 이어지지
못한다.
거의 그게 주된 이유다.
몇십 번째. 근데 안타깝게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본인만 모르고 있다.
이참에 이 글을 읽는 미혼인 여자구독자분이 있다면 꼭 참고하길 바란다.
사실 99% 남자들은 인위적으로 티 나게 얼굴을 깎거나, 부자연스러운 보정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극도로 혐오한다.
나는 그녀가 안타까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 여자가 보정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으로 한 그 행동 자체는 남자에게큰 기대를 심어주기에 다분하다.
만약 사진을 보지 않고 갔더라면 소개팅에 성공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현대인은 기대에 매몰돼 있다.
30대엔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겠지, 더 이쁘고 잘생긴 상대를 만날 수있겠지, 더 인생을 재밌게 살 수 있겠지라는 기대. 이런맹목적인 기대보다 더 나은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그 결괏값을 활용해서 의미를 찾느냐. 목표했던 그 돈이 진짜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나만의 일과
가치관을 찾는 것. 내게 있을 공허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본질을 찾는것에서부터 진짜 행복을 느끼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과연 무엇을 하면서 내 공허를 제거할 수 있냐. 그걸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애초에 기대도 사라지고, 인간관계, 돈, 건강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부터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세 개가 있다.
이건 아주 쉬운 대신 전제조건이 하나 있는데, 무조건 꾸준해야만 한다.
꼭 매일 하라는 게 결코 아니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바로,
읽고, 쓰고, 운동하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부터 싫증을 느끼고, 공허를 느끼는
순간이 올 때 이 세 개만 꾸준히 반복해도 쉽게 부정적인 감정은 제거된다고 믿는다.
너무 쉬운 거 아니냐고? 꾸준히 하는 건 꽤나힘들다.
중간에 다 떨어져나간다.
이 세 가지가 가장 리스크 적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생에 우상향을 그릴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무조건 기회비용이 수반된다.
하나를 쟁취하면 또 다른 하나는 잃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포기하거나. 주식도 그렇다.
손실을 미리 고려하고 그 리스크를 안고 투자하지 않나. 근데 이건 리스크도 없다.
그냥 틈내서 계속하면 그만이다.
나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거나, 자기 전 일기를 쓰거나, 새벽에 일어나 혹은 퇴근 후 운동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끔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도 글을 쓸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다.
대통령도 글을 쓸 수 있다.
사고현장에서 불을 끄는 소방관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글은 쉽게 어디서든 쓸 수 있다.
꼭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야만,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소설가'라는 명함과 근사한 본인이쓴 저서 몇 권과 서재가 있는 사람들만 작가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그냥 쓰면 된다.
그럼 어느샌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본인을 작가라고 불러준다.
20대 때 '아,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하겠지',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면 행복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일차원적인추측들은 늘 어떤 일정치 이상의 기대를 동반해 왔다.
근데 읽고, 쓰고, 운동하는 건 대단한 걸 이룬다는 기대로 시작한 것이 아닌데도
돌아보면 더 큰 무언가가 일구어져 있다.
더 건강해지고, 사고의 폭이 확장되고, 인생에 있어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왔을 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한 근사한 목적자체가 없다.
책을 출간하고자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다독왕이 되고자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헬스 트레이너를 하고자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많은 게 이미 이뤄져 있다.
앞서가고 있다.
결국은 이 세 개다.
30대에 이 세 가지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시야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큰 리스크 하나를 헷지 할 수 있다.
바로 호기심을 잃지않는 것.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로운 것에 흥미가 없다 보니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
여행도 체력이 없어 점점 더 미루게 된다.
조금 더 피부로 와닿게 설명해 보겠다.
부모님과 대화가 안 통한다고 투정 부리는 철없는 이들이 많다.
근데 부모님은 왜 그러시는 걸까. 사실은 진짜 슬픈 얘기다.
그동안 우리를 키우려고 온갖 노력과 체력을 소비했기때문에 새롭게 다른 걸 배우고, 적응해 가는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인만의 기존의 경험과 지식이 만든 세계로만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이다.
사실 진짜 슬프고 무서운 거다.
그래서 우리가 이젠 알려줘야 한다.
부모뿐만 아니라 나이가 드는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다 새로운 것에 무뎌지고 호기심을 잃어간다.
근데 뭐라고? 쓰고, 읽고, 운동하면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이 지구라는 거대한 자연 속 하찮은 인간 한 명이 평생 생애동안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한정돼 있다.
넓게 보면 그냥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 한 명의 인간은 결국 그 세계밖에 보지 못하고 죽는다.
얼마나 억울한가.
근데 호기심이 생기면 내게 원래 익숙했던 것에서 벗어나 계속 새로운 걸 할 수 있는 동기가 생기고, 그 행동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삶에 유희가 따라온다.
이런 사람은 30대가 돼도, 40대가 돼도 남들과 달리 모든 게 무뎌지고, 허무하고, 재미없는 인생이 아니라 더 특별해진다.
자, 순간이
특별해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사소한 것도 소중해진다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감정자체를 더 자주느낄 수 있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행복의 역치가 낮아진다는 말이다.
내가 시궁창 안에 있더라도 만약 행복을 자주 느낀다면? 결국 내가 위너다.
억만장자 부럽지않다.
돈? 돈 많아서 뭐 할 거고 어쩔 건데. 그 사람은 그 돈으로 행복을 못 느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걸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말해 세 가지. 읽고, 쓰고, 운동하면 된다.
난 이걸 늦게 알아 한탄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안 것에 위안이 된다.
언제 가장 행복하신가요.
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올해가 백일도 안 남은 지금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까. 떠나보낸 삼백일 가까운 기간 동안 적어도 내 머릿속에 있다는 건 좋든 싫든 어쨌든 ‘남아있는‘ 일 년의 결과물일
것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언제 난 행복하고 불행했는지를 스스로 물어본다.
어떻게 남은 올해를 행복한 순간으로 더 잡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을 마주하는 일은 늘 어색하고 쑥스럽다.
순간의 괴로움은 송곳이 되어 후벼 파 흉터가 돼 흉터로써 기억한다.
이는 예상했던 정량적 지표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 즉, 예상에 없던 가변성을 띠는 것에서 대개 생긴다.
맘대로 할 수 없는 관계라던가, 건강이라던가, 불의의 사고라던가. 내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올 수 없는 것들.
이에 비해 행복은 크기보다 적립하는 개념으로 가져갈때 더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국 빈도다.
행복한 삶이란 포인트 적립하듯이 일상에서의 소소함에 집중하는 저축성일 때 실현성이 높아진다.
가령, 일 년에 몇 번 없는 연봉인상이라던가,
생일이라던가, 상을 받는다거나, 청약에 당첨된다거나, 삶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당장 오늘 먹은 아이스크림, 어제 퇴근 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홀로 했던 산책, 사우나를 하고 나올 때의 개운함, 힘껏 달리고 나서 마시는 물한잔의 달콤함, 친구가 잘 됐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더 자주 있을 때 삶은 핑크빛 미래로 서서히 바뀐다.
그것이 내 주변의 것과 내 삶이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명징한 징표가 아닐까 한다.
이 세상 현대인은 서서히 이 논리를 알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주) 좋은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자기 객관화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영리하다.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한마디로 그냥 약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라도 높이기 위한 포장을 그럴싸하게 하는데 이럴수록 이 행복의 빈도수는 점점 더 짧아져 개개인은 매일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진짜 행복들 속 가짜행복이 자리하는 것이다.
마치 뽑기 게임에서 중간에 ‘꽝’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세상은 이 행복이 진짜 행복이 맞다고 종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 자녀가 중간, 기말고사에 백점을 맞으면 행복해하고, 아이는 부담에 점점 지쳐간다.
실은 이건 행복이 아니라 본인의 자아실현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그들의 욕심에 불과한 것을.
좀 더 비싼 브랜드의 옷과 시계와 안경을 차고, 외출 전거울을 보며 만족감을 얻는다.
‘자기 관리’라는 가짜 행복에 둘러싸인다.
사실은 온갖 치장으로 주변보다 본인이
낫다는 우월감과 과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속된 말로 뭣도 아닌 것들에 우린 행복이라는 포장지를 싼다.
그걸 선별하는 나만의 지혜가 미래의 더 질 높은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이 나만의 지혜는 쉽게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고, ‘행복’이란 건 결과론적 관점이라 지나고 나서야 그게 행복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 아침식사, 아내와 자기 전에 마시는 한잔의 따뜻한 티는 그 순간 당연한 편안함이라 받아들이고 행복인 줄 모른다.
이래서 순간의 행복을 끌어들이는 일은 여러모로 어렵다.
내년엔 올해의 무엇을 두고 가고, 무엇을 들고 갈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더 많은 걸 들고 가기 위해 남은 세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에도 큰 관심이 없다.
어떤 그럴싸한 물건이나, 일, 인간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나만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그 ‘홀로서기’의 정의는 앞서 말했듯, 흉터는 약을 발라새살이 돋게 관리하는 것 그리고 진짜
행복을 가려내는 통찰을 더 키워가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겠지.
행복은 삶의 과정이다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하지 마라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하지 마라
우리는 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더 좋은 집, 더 안정된 직장, 더 풍요로운 삶.
하지만 가끔은 이런 질문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이유는 단지 행복하기 위해서인가?”
그러다 문득 들은 말이 떠오른다.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하지 마라.”
행복은 산 정상에 꽂힌 깃발 같은 게 아니다.
정상에 다다르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이 밀려올 거라 기대하지만,
사실 정상은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오는 곳일 뿐이다.
행복은 깃발이 아니라, 우리가 오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작은 순간들이다.
힘든 길을 걷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동안 발견한 야생화 한 송이,
목이 말라 우연히 마신 시원한 물 한 모금.
이 모든 것이 행복이다.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다.”
그 말처럼, 행복은 어디엔가 도달해서 얻는 보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의 작은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공기, 따뜻한 햇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웃음 속에 말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자.
우리 곁에 있는 작은 것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해 보자.
달콤한 커피 한 잔, 좋아하는 노래 한 곡,
그리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나 자신에게 건네는 작은 칭찬.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삶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오늘도 행복은 당신 주변에 숨어 있다.
그걸 찾아낼 준비가 되었나요?
눈이 안 보인다니
노화가 일어나고 있다
올해 초였다.
갑자기 눈이 안 보인 것은.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인물들처럼 눈이 아예 안 보인 건 아니다.
바로 눈앞의 가까운 물체가 잘 안 보이기 시작한 것. 피곤해서 그랬거니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
한 달쯤 지났을까. 증상은
더 심해졌다.
책을 읽는데 글자들이 잘 안 보이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볼 때도 글자들이 왠지 더 작아 보였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친 생각.‘아! 나도 노안이 왔구나’
보통 마흔 중반부터 노안이 온다던데, 드디어 올 게 왔구나.음. 뭐 남들 다 오는 노안이니까 괜찮겠지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노안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글자를 읽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책을 읽을 때나 스마트폰을 볼 때는 아예 안경을 벗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시작되는 잔소리(당연히 아내로부터). “안경 안 쓰면 눈 더 나빠진다니까.” 안경을 쓰면 오히려 안 보이는 노안의 애환을 당신이 알아?
그래도 참았다.
노안쯤이야.
불편하긴 해도 그럭저럭 살 만했으니까(나도 참 무던하다). 그런데, 운전할 때 노안의 영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바로 눈앞 네비게이션이 잘 안 보이는 게 아닌가.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이건 참을 게 아니구나. 안전과(나뿐 아니라 가족의)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구나.’
며칠 후, 안경점을 찾았다.
역시 이곳엔 노안용 특별 안경이 있었다.
일명 다초점 안경. 안경렌즈에 2개의 시력이 담긴 것이다.
렌즈의 하단은 도수가 높아 가까운 거리의 사물을
볼 때 용이하고, 나머지 부분은 원래 도수와 비슷해 산책하거나 풍경을 바라볼 때 문제없이 볼 수 있다.
시력
검사를 하고 다초점 안경으로 바꾸었다.
일주일 뒤,새 안경을 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바꿨을까. 아직 적응이 안 되어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노안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책을 볼 때도, 스마트폰을 볼 때도, 운전할 때도.
노화가 일어나고 있다
마냥 청춘인 줄 알았는데, 동안이라 노화도 더디 올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얼마 전엔 코가 간지러워 코털을 손으로 뽑았다(할 짓이 못 된다.
너무 아프다). 흰 털이었다.
원래 새치가 많아 30대부터 염색을 했다.
그런데, 흰 털이라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턱밑에도 흰
수염이 삐쭉 나와 있었고, 구레나룻에도 선명한 하얀색이 보였다.
이제 염색도 소용없을 정도로 흰 머리카락이 내 머리 전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면역력도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평소에도 감기에 자주 걸려 병원을 자주 찾았다.
보통은 잘 쉬고 약 먹으면 1~2일이면 괜찮아졌다.
그런데 올해 여름, 감기에 걸렸다.
오뉴월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에 말이다.
약 먹고 괜찮아졌지만, 며칠 지나니 다시 기침과 재채기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다시
병원행. 이러기를 3~4번을 반복했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오히려 나는 병원을 출퇴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뿐 아니다.
집중력도 떨어졌다.
평소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 주말 저녁 간만에 스트레스라도 풀 겸 OTT의 영화를 검색한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예전에는 거뜬히 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 시간 지나면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아프다.
언제 끝나는지 타임라인을 확인해본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무슨 큰일이라도 치른 듯 온몸이 뻐근하고, 곧바로 침대행으로 직행한다.
나는 늙고 있다.
노화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내게 무관하지 않다.
씁쓸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다.
며칠 후면 새해가 밝는다.
특별한 바람이나 소망은 없다.
이젠 나와 가족의 건강이 일순위 아닐까. (당연한 소리지만) 이젠 건강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디 생각으로 그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