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1’ 집단 의식이 없다. ..‘인구 대국’ 인도, 중국과 비교해보니


[월간조선] ‘폭스콘 중국 공장’ 보는 시각으로는 인도 이해 못 해

중국은 집단, 인도는 개인이 발전의 동력
인도는 ‘바다의 나라’, 중국은 ‘땅의 나라’

필자는 30년 전인 1994년 중국 베이징(北京)에 장기 체류한 적이 있다.
일본에 머물던 중, 중국 열풍이 밀려들면서 필드 스터디와 중국 이해를 위해 아예 베이징에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처럼 반(反)간첩법을 가지고 외국인을 범죄자 다루듯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천안문 광장에서 동남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진송(勁松)이란 곳이 당시 거주지였다.
방 두 개 100달러짜리 아파트였다.
당시 숙식을 제공받는 24시간 건설 인력이었던 베이징 민공(民工)의 한 달 월급이 40달러 수준이었다.
중국 대륙 전체를 통틀어 에스컬레이터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것도 1994년이다.
당시 막 오픈한 일본식 백화점 내 에스컬레이터를 보려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손님들 때문에 경찰이 급출동하기도 했다.

2023년 가을, 필자는 인도에서 2개월간 머물렀다.
뉴델리·뭄바이·펀자브 지방을 비롯해 전부 6개 도시를 돌아보았다.
한층 가속화될 인도의 변화를 지켜보기 위해 필자는 4월부터 다시 인도를 찾을 계획이다.

2024년 벌어지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인도 국가 개조 프로젝트인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는 30년 전 중국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두 나라 사이에 대한 비교분석도 가능해진다.

30년 전 중국은 주식 시장과 무관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을 부정한다.
영국 통치하에 있던 홍콩은 당시 중국 투자를 위한 대외창구였다.
필자가 중국을 찾았던 1994년은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서방의 경제제재가 막 풀린 시기였다.
홍콩 증시가 폭등했다.
현재 뭄바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시 광풍(狂風)이 한 세대 전 중국에서 ‘똑같이’ 벌어졌었다.
필자의 눈에 비친 인도는 20세기 말 중국의 데자뷔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 2024년 인도의 하루는, 20세기의 한 달 아니 1년에 버금간다.
일본식 표현을 따르자면 ‘더 이상 20세기의 인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증명사진’ 없는 인도

그러나 초고속 경제성장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인도와 중국의 경제모델은 크게 다르다.
양국의 문화·문명·국민성이 다르듯,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인도와 중국 경제를 둘러싼 이미지부터 떠올려보자.

중국이라고 하면 수만 아니 수십만 노동자로 가득한 초대형 공장부터 떠오를 것이다.
아이폰을 만드는 폭스콘(Foxconn) 공장 모습은 중국 경제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명사진’이다.

인도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설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 부러지게 하나로 형상화된 증명사진이 없다.
인도라고 하면 갠지스강부터 떠오르고, 각종 종교축제에 맞춰진 무지갯빛 분말과 춤에 열중하는 힌두교 신자부터 떠오른다.
경제와 관련해서, 중국 노동자들처럼 일렬 생산라인에서 기계적으로 일하는 인도 노동자들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경제적 차원의 인도 이미지라고 하면, ‘인도’가 아닌 ‘인도인’부터 떠오른다.
미국 IT 회사나 초대형 생산업체의 최고 경영진이 인도 경제와 관련된 이미지다.
정치 영역으로 넘어가면, 영국에서는 인도계 총리, 미국에서는 인도계 공화당 여성 후보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도가 세계 최고의 인구 대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중국 중산층(中産層)에 비교될 만한 소비군단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인도가 초고속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신비의 힌두교가 그러하듯, 인도 경제 역시 안개에 싸인 비밀스러운 존재 같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중국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인도를 설명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인도와 중국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흥미도 없다.
히말라야산맥과 바다로 인해 두 나라는 전혀 별개의 대륙으로 떨어져 살아왔다.
양국 관계라고 해야 7세기 현장(玄奘)법사가 불경을 얻기 위해 당시 천축(天竺)이라 불렸던 인도를 다녀온 것 정도라고 할까?

과거 중국에서 살면서 관찰한 바로는 중국인의 인도에 관한 이미지는 ‘돼지고기를 안 먹는 나라’라는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사실 인도인들은 돼지고기만이 아니라 육류 대부분을 멀리하는 채식주의자들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네 다리와 두 다리 달린 동물은 전부 ‘식(食)’의 대상이다.
이 가운데 돼지고기는 중국의 문화·전통·경제 그 자체다.
돼지고기는 중국 실물 경제 상황을 알려주는 핵심 경제지표 중 하나다.
한국의 짜장면이 그러하듯, 돼지고기 가격을 보면 경제 현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돼지고기가 없는, 고기 자체를 멀리하는 인도는 애초부터 중국의 관심 밖이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육식을 멀리하고, 소[牛]를 존중하는 인도인들에게 생명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중국은 미개국이다.

지난해 인도 뭄바이에 머물 당시 찾아갔던 중국 사찰은 인도 전체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21세기 현재 차이나타운이 단 하나도 없는 나라가 인도다.
관광 목적으로 차이나타운 비슷한 것을 만들려 하지만, 인도에 거주하려는 중국인 자체가 극히 드물다.
양국 간 갈등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돼지고기 없이 살 수 있는 중국인이 극히 드물다는 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사는 인도인도 극소수다.
인도가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이 되었다지만, 중국에서 사는 인도인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수천 명 규모인 인도 거주 중국인보다는 많기는 하지만, 두 나라가 서로를 보는 눈은 ‘소와 닭 관계’ 그 자체다.


한국, 인도를 너무 모른다

돼지고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한국 역시 인도를 멀고도 먼 나라로 대한다.
인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알고 싶어 하는 한국인이 극히 드물다.
필자가 인도에 머물 당시 한국인 친구들이 보여준 대부분의 반응은 너무도 단순하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인도=성(性)폭행’으로 집약된다.
“그 위험한 나라에 왜 갔느냐”고 걱정한다.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다.
언론의 자유가 있고,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도 가능하다.
같은 14억 인구 대국이지만, 중국은 철저히 통제된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다.

인도에서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성폭행 뉴스는 집단적 범죄이고, 주로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사건이란 점 때문에 주목을 끄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가도 범죄는 있다.
중국과 같은 공산 독재국가에서의 범죄의 수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철저한 통제에 의해 외부에 보도되지 않을 뿐이다.

필자가 현지에서 체감(體感)하는 바로는 ‘인도=성폭행’은 과장된 뉴스다.
가끔 서울 지하철에서 칼부림이 난다고 해서 ‘한국 지하철=사무라이 무대’로 보는 식이다.
인도인 대부분이 독실한 힌두교도란 점을 감안하면, 거꾸로 인도의 범죄율은 한층 더 낮을지 모른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으로 움직이는 인도

앞에서도 말했지만 ‘폭스콘 중국공장’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인도를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은 시각에 익숙한 나라다.
사실 한국부터가 폭스콘 스타일의 공장에서 수출품을 생산하고 자본을 축적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모델은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멀리 기원을 따진다면,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개발된 미국식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한국·일본·중국 공장의 기준이자 모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인도는 어떨까? 포드 자동차식 경영이나 공장, 일사불란한 로봇 시스템과는 거리가 먼 나라다.
미국식 모델에 대한 동경도 없고, 미국식 생산체제나 경영 공장도 없다.

앞서 인도 이미지를 하나로 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는 행동의 주체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기 때문이다.
인도는 인도인 ‘집단’이 아니라, 인도인 ‘개개인’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한국·일본·중국은 부분적인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집단으로 움직인다.
적어도 일에 관한 한, 집단을 기본 단위로 한다.
인도에는 이런 세계관이 없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인도와 중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애국주의(愛國主義)의 유무(有無)다.

인도에는 ‘세계 최고의 나라 인도’라는 발상이나 개념 자체가 없다.
‘인도 넘버 1′을 부르짖으며 전 세계를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세계관이 없다.


인도를 무시하는 중국

중국은 정반대다.
나라 이름부터 ‘전 세계 한복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한 ‘중국 넘버1′이 중국의 국가 신앙이다.
‘장차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보통 중국인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오십보백보겠지만, 한국이나 일본도 중국과 비슷하다.
2024년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K-자화자찬,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제국주의는 ‘우리나라 넘버1′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집단은 이 같은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동력(動力)이다.

인도는 ‘우리나라 넘버1′이라는 세계관이 없을 뿐 아니라 집단과 같은 동력도 없다.
인도 종교는 개인적 수양을 중시한다.
인도 전통 요가는 개인 명상의 연장선에 있다.
부처의 열반(涅槃)은 개인의 각성(覺醒)에 기초한 것이다.
인도 기업이 ‘폭스콘 스타일’의 기업 이미지와 무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식 세계관으로 보면, 인도 경제 성장을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비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공장으로 연결시킬 만한 환경이나 능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인의 99%는 인도를 무시한다.
자신들의 성공 신화(神話)에 도취된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중국 폭망, 인도 비약’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미중(美中) 디커플링(Decoupling) 때문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 인도 열풍도 곧 끝날 것이고 중국의 세계 제패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믿고 있다.
이런 생각은 세상이 변하고 새로운 시대가 닥친다는 것을 부정하는 ‘쇄국(鎖國) 마인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도로 가는 일본

현재 전 세계 경제의 하이라이트는 인도다.
일본도 있지만, 수익률이란 측면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하다.
안정적인 수익은 일본에서 얻을 수 있겠지만, 일확천금을 얻으려면 역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맏형 격인 인도다.
세계의 돈이 인도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 같은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 성장론에 익숙한 탓인지 ‘낯선 세계’ 인도의 오늘과 내일을 의문시하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지난해 한국의 인도 투자는 2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 한국인들이 보여주었던 중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는 대조적이다.
‘폭스콘 중국’ 세계관에 갇혀, 갠지스강 이미지만 떠오르는 인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은 어떨까? 사실 일본도 중국식 성공 신화에 익숙한 나라다.
투자관련법 정비가 안 되었다든지, 주(州)정부마다 행정법이 다르다든지 하는 ‘인도 리스크’가 거의 매일 언급되고 있다.
인도의 미래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도의 미래를 밝게 보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일본의 2023년 아시아 직접투자 현황을 보자. 2023년 일본의 아시아권 최고 투자 대상지는 싱가포르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해 보면, 330%나 늘어난 700억 달러다.
2위는 베트남으로 210% 증가한 60억 달러다.
3위는 인도로 91% 증가한 65억 달러다.

반면 2019년에 비해 투자액이 줄어든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으로 20% 줄어든 90억 달러다.
한국에 대한 투자도 47%나 감소했는데, 액수로는 13억 달러에 불과하다.
일본의 아시아 10개국 상위 투자 지역 가운데 가장 많이 떨어진 상태다.
투자액으로 보면, 싱가포르의 6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해 일본의 인도 투자 규모는 한국의 30배 정도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한국에 비해 360배 정도인 765억 달러에 달한다고 보아야 한다.
싱가포르에 대한 일본의 투자는 인도를 향한 ‘쿠션 투자’라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550만 싱가포르 인구의 13%인 인도계를 통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인도의 미래를 불안하게 보는 사이에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은 엄청난 속도로 인도로 진출하고 있다.


‘땅’의 중국, ‘바다’의 인도

필자는 ‘땅’과 ‘바다’라는 말로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곤 한다.
땅은 중국, 바다는 인도다.

중국과 중국인의 대명사인 돼지고기는 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돼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양이나 소와 같은 유목민의 동물과는 달리 한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는 동물이다.
땅에 붙어 사는, 정주(定住)민족의 대명사인 중국인 유전자 그 자체가 다리도 짧은 돼지라는 동물에 녹아 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땅은 물론 바다 나아가 우주를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데 익숙한 나라다.
인도 힌두교의 최고신(最高神)은 시바다.
관련된 신화가 엄청나게 많다.
흥미로운 것은 신화의 상당 부분이 땅에서 벗어나 바다와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가장 유명한 바다 관련 얘기는 산스크리트어로 ‘사무드라 만타나’로 불리는 천지창조 신화다.
유해교반(乳海攪拌)이란 낯선 한자로 풀이되는 얘기로, 시바가 창백한 얼굴이 된 이유도 ‘사무드라 만타나’에 들어 있다.

스토리는 신과 악마와의 싸움에서 시작된다.
악마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영생(永生)의 약, ‘암리타’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영생의 약은 우유로 된 수천 킬로미터 깊이의 바다 밑바닥에 있다.
신들은 우유 바다의 밑바닥을 파내기 위해 초대형 회전축을 바다 한가운데 설치한다.
초기에 우유 바다를 파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독(毒)이 퍼져나간다.
힌두 최고의 신 시바는 바다의 독을 전부 마신다.
얼굴이 푸른색으로 변한 이유다.
이후 영생약을 꺼낸 뒤 악마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신들이 승리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힌두교 창조 신화 ‘사무드라 만타나’는 중국식 세계관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스토리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무대로 하고, 신들이 가져온 높은 산을 회전축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중국식 ‘뻥’은 상대조차 안 된다.
영생의 약을 위해 무려 천 년 동안 바다 밑을 파고, 회전축을 밀고 당기는 동아줄로 초대형 뱀을 사용했다는 점도 중국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서유기》와 《아라비안나이트》

인도와 대조적으로 중국의 경우 바다에 관한 이야기가 극히 드물다.
중국이 내세우는 14세기 명(明)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도 내막으로 들어가면 ‘뻥’이다.
우선 정화는 중국인(한족)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계이다.
바다 유전자와는 거리가 먼 중국은 정화의 대항해 이후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원양(遠洋) 항해를 중단했다.
이후 해금령은 사실상 중국의 국시(國是)가 된다.
명나라를 상전으로 한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땅의 유전자로 똘똘 뭉친 쇄국 마인드는 당연한 결론이다.

중국에도 모험과 미지의 세계를 다룬 스토리가 있기는 하다.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西遊記)》가 그것이다.
7세기에 불경(佛經)을 얻으러 천축으로 가는 삼장법사 모험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중국 외부, 즉 인도와 그 주변국을 배경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하지만 서유기조차도 바다와 전혀 무관하게 땅에서만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너무도 중국적이다.

반면 인도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가 넘친다.
잊기 쉬운 일이지만,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무역을 좌우한 상품은 인도의 후추·금·보석이었다.
인도인이 그 주역이었지만 중동(中東)의 아랍인들도 보조 역할을 했다.
7번이나 해상 대모험에 나섰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드바드의 이야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이 인도를 멀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땅의 유전자, 다시 말해 바다를 모르고 멀리하려는 중국식 세계관에 젖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연이자 필연이겠지만, 인도의 중심이자 대외(對外) 최대 창구인 뭄바이는 한국·중국이 있는 동쪽이 아니라 유럽과 중동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이든, 對中전선에서 인도를 가장 먼저 꼽아

3월 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의회 국정 연설을 했다.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게 밀리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67분에 걸친 바이든 연설은 격정적이고도 감동적이었다.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연설 마지막 부분에 행한 중국 관련 부분이다.
바이든은 중국과의 갈등이 아닌, 공정한 경쟁이 미국의 방침이라고 공언하면서도 공산 독재국가 중국에 대한 반감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그는 아시아권에서의 대중(對中) 연합전선을 강조하면서, 4개국을 미국의 협력 국가로 지목했다.
가장 먼저 언급한 나라는 인도였고, 호주, 일본, 한국이 그 뒤에 언급됐다.
한국이 가장 나중에 언급된 셈이다.
미국에서 보는 한국의 위상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굳건한 한미동맹’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보면 인도, 호주, 일본 다음에 불과하다.

현재 미국의 아시아 안보 정책, 아니 글로벌 군사 정책의 핵심은 중국이다.
우크라이나 문제나 가자 분쟁도 중요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자기 일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주장처럼, 극단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손에 넘어간다고 해서 미국의 피해가 당장 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다르다.
중국이 미국을 적(敵)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해외 진출은 미국 안보에 직결된다.
인도는 이 같은 미국의 생각과 주장에 적극 찬동하고 있다.
기존의 비동맹 중립 정책을 버리고, 반중연대(反中連帶)인 것이 분명한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인 쿼드(Quad)에도 참가하고 있다.

바이든이 인도를 미국의 친구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미국 안보 최대 이슈로 떠오른 중국 문제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과 대만해협에서 충돌할 경우, 인도의 역할과 위상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인도가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인도의 군사력이 남중국해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국을 위축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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