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와 평양냉면

 

두부와 평양냉면

이유 없이 처지고 열이 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 해열제를 먹듯 보는 드라마가 ‘심야 식당’이다.
좁은 골목 안 식당 주인은 재료만 있으면 손님이 원하는 음식은 뭐든 다 만들어 준다.
어느 날 ‘비프 스트로가노프’라는 이름도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손님이 나타난다.
볶은 쇠고기에 러시아식 사워(sour)크림을 넣은 요리인데, 맛을 묻는 주인에게 손님은 “그냥 그렇네요!”라고 답한다.
흥미로운 건 이 얘기를 들은 주인의 답변이다.
“다음에 혹시 그냥 그런 비프 스트로가노프가 먹고 싶어지면 미리 연락 줘요.” 작가 입장에서 이런 캐릭터는 줄거리에 지장을 준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아 이야기가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식과 ‘먹방’ 시대에 가끔 된장찌개 속의 두부나 고기를 감싼 상추 한 장처럼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흩어진 것을 조용히 감싸는 것들을 생각한다.

젊었을 때는 ‘단짠’의 강렬한 맛에 이끌린다.
하지만 점점 함흥냉면보다 심심한 평양냉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온다.
요리사 박찬일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평양냉면의 맛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 국민이 다이어트 중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먹방이다.
자극적인 먹방에 열광했다가 요즘 토끼나 거북이가 야금야금 딸기를 먹는 영상을 보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한 후배가 있다.
고작 밤톨만 한 딸기 하나를 씹고, 씹는 존재를 보면 자신도 고민도 잘게 부서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술 퍼마시고, 고래고래 노래 부르고, 울면서 친구에게 하소연하지 않아도 가능한 무해한 처방들. 나는 이것을 ‘두부적인 삶’이라 부른다.
두부적이란 건 일종의 태도다.
반찬 국물이 여기저기 튄 밥을 감싸는 잘 구운 김처럼 말이다.
도파민 범벅의 자극적인 것들의 시대에 내가 원하는 건 밥 옆에 가지런히 놓인 소금이나 김 가루 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싱거우면 치고, 부족하면 넣으라는 태도. 맛이 그저 그런 음식을 내놓아도 심야 식당이 롱런한 이유를 알겠다.
때로 중요한 건 맛 이전의 이런 무심한 상냥함이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기차 옆의 사람과 대화하면서 가는 것과 조용히 혼자 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떤 걸 선택할까. 나는 혼자를 택할 것이다.
혼자를 선호하기보다 혼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의 저자 ‘로버트 윌딩거’는 인간은 혼란을 과대평가하고 인간관계의 유익함을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오랜 연구로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는데 그 핵심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빈도와 질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이력서와 추도사의 차이를 “이력서에 언급되는 일은 세속적 성공이 지향하는 덕목으로 타인과 비교가 불가피하지만 추도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고인이 인정이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유튜브 팔로 숫자나 연봉처럼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80대에 자신이 어떻게 늙어갈지 예측할 수 있는 대표 지표가 중년기 혈압이나 당 수치가 아니라 50세 때 자신의 인간관계에 가장 만족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는 뭘 의미할까. 마흔을 넘어보니 맞지 않는 친구 때문에 쓴 시간을 자기 계발에 썼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50을 넘어 60대, 70대에 이르면 사람은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명확한 사실을 깨닫는다.
비로소 내 옆에 있는 사람들로 시야가 좁아지며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며 작은 것에 감사하는 능력이 강화된다.
예상 외로 70대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다.

호구와 손절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관계 복원을 말하는 건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하버드 졸업생과 그들의 후손까지 90년에 걸친 인류 최대의 행복 보고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게 뭔지 잘 모른다”는 진실을 말하며 “좋은 삶은 오직 좋은 관계”라고 말한다.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하는 건 여러 사람과 사랑에 자주 빠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곳이 아닌 저곳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바로 이 사람과 함께 말이다.

인생의 효자손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마음이 힘들어 명상 수업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수업에는 집에 돌아가 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는데 인상적인 건 이 닦기 명상이었다.
이를 15분간 닦으며 이빨에 칫솔이 닿고 거품이 일어나고 세척되는 전 과정과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칫솔질이 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했지만 평소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쓰기 위해선 속도를 늦춰야 했다.
결국 나는 평소 내가 분풀이하듯 이를 얼마나 세게, 빠르게 닦았는지 깨달았다.
그제야 치아에 파인 상처가 나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낸 것일 수 있겠다 싶었다.

오십견이 온 친구가 길을 걷다가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말하며 휴대용 효자손이 있는지 검색해봐야겠다고 말했을 때, 공감의 웃음이 터졌다.
오십에 이르자 갱년기를 겪는 지인들 사이에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고충이 늘어난다.
문득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팔의 가동 범위가 줄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고, 점점 귀가 어두워지는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노안이 오는 이유는 눈앞의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크게 보라는 뜻이며, 귀가 어두워지는 건 사소한 상처의 말은 맘에 담지 말고 흘려듣고, 오십견이 온 이유는 필요할 땐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평생을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산 친구에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흘려 보고 들으라는 말은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날카롭지 않게 둥글게 살라는 뜻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나이가 들수록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이를 본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대화하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
적절히 힘 빼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날 수 있다.
제 아무리 독립적으로 살던 사람이라도 지팡이를 짚듯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온다.
남에게 도움을 잘 청하고 받는 것도 일종의 능력인 셈이다.
그렇게 인생을 잘 살아낸 사람들은 말년에 도처에 효자손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기고용 / 백영옥 소설가

기고용 /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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