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플라자 호텔, 입시를 마친 딸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꿈꾸던 뉴욕 여행을 선물한 지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마워하지 않는 딸을
마주하니 돌연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이 오랜 고민의 레퍼토리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리어왕’으로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뱀의 이빨보다 날카롭구나!”라는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사랑과 미움이
얼마나 강력히 연결되어 있는지는 최근 부쩍 늘어난 이혼 예능의 법정 싸움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맹렬한 안티 팬은 한때 그를 사랑했던 팬이다.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의 입에서 “너무 적다!”란 불평이 아니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는 건데 생색을 낸다!”는 말을 들은 후, 아예 보너스를 없앴다는 사장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한 아이가
고가 명품 패딩을 구입해 입고 다니는 걸 안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기버’와 ‘테이커’의 당연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중년의 동창회에서 흰머리가 늘었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탈모인 친구의 심정은 어떨까. 분명 그는 남아 있는 친구의 흰 머리카락이 부러워 부아가 날 것이다.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산책하는 공원에는 저녁이면 청년 한 무리가 모인다.
인사 외에 거의 말이 없는 이 모임은 러너스 클럽인데, 공원 트랙을 한 바퀴 뛰면 별 대화 없이 각자 흩어진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같이 있으면 괴로운 시대의
MZ식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노리나 허츠의 책 ‘고립의 시대’에는 감옥을 숙식과 돌봄이 있는 공동체로 인식해 일부러 경범죄를 저지르는 일본 노인 이야기가 나온다.
영국에는 외로움부 장관이, 일본에는 고립을 담당하는 장관이 있다.
이미 외로움이 국가 문제로 인식된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공동체의 붕괴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현대적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24시간 연결된 세상과 연관돼 있다.
외로움은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자기 돌봄과도 직결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타인이 아닌 자신과 이룬 관계다.
하지만 나를 가장 소외시키는 게 자신인 경우가 많다.
최근 자기 돌봄을 자기 계발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보디 프로필을 찍고 특별한 곳을 여행하는 등 경험을 인증하는 게 자기 돌봄이라 믿는 것이다.
‘갓생’을 살면 정말 자존감이 올라갈까. 문제는 과도한 인증 문화가 경쟁을 부추겨 자신을 더 소외시킨다는 데 있다.
자기 돌봄은 보디 프로필 사진에 붙은 ‘좋아요’ 수보다, 불가능했던 푸시업 한 번을 해냈을 때의 뿌듯함에 가깝다.
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나를 돌보는 건 그러므로 일정 부분 타인과 단절함을
전제한다.
홀로 일기를 쓰고 명상하듯 타인과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 내 안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응답하는 것이다.
3세대 항암제가 표적이 아닌 면역 치료제이듯, 외로움은 타인이 아니라 나와 건강하게 연결이 복원될 때 치유된다.
사실 외로움은 존재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부족한 나를 비난만 하지 않고 다독여 기다려주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될 때, 외로움은 끝내 견고한 고독으로 진화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주인공들의 사랑이 아니었다.
대탈출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끝까지 배에 남아 연주를 멈추지 않던 연주자들이었다.
실제 이런 일은 1992년 2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분쟁에서도 일어났다.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 덥수룩한 수염의 한 남자가 가방을 든 채 나타났다.
빵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이 가해진
다음 날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그가 가방에서 꺼낸 건 첼로였다.
사라예보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그는 전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 차림으로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연주는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22일간 이어졌다.
빵가게 폭격으로 사망한 22명 희생자의 숫자와
동일했다.
놀라운 건 죽은 자를 위한 위로였던 연주가 산 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발포 명령에도 세르비아 점령군 중 누구도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지 않았다.
긴급한 수술실, 배를 열자 온 장기에 퍼진 암세포를 발견한 외과 의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술은 크게 의미가 없다.
안타깝지만 수술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수술을 시작한다.
“밥은
먹게 해드려야지”라는 말이 수술의 이유였다.
하지현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먹먹해졌다.
상황이 얼마나 나쁘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결 가능한 문제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오랜 임상 경험을 가진 그의 직업 윤리였을 것이란 문장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민으로서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음악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스마일로비치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때 기적은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 일이 꼭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행동만으로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기적은 죽은 나무에 핀 꽃이 아니다.
진짜 기적은 절망의 그날에도 당신이 정원에 매일 준 물이다.
관심이 돈인 세상이다.
관심경제, 관종, 어그로 같은 단어 역시 일상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방송이나 언론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거나 정치권의 콜을 고사하는 식인데,
모두 지금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흥미로운 건 그들 모두에게서 등장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싫다’는 말이었다.
나락은 불교에서 지옥을 뜻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로 산스크리트어인 ‘나라카(Naraka)’에서 왔다.
몇 년 전부터 캔슬 컬처(cancel culture)라는 말이 등장했다.
한국에선 주로 손절 문화를 뜻하고, 어떤 인물이나 집단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단하거나 구독을 취소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파급력이 큰 유명인의
발언과 행동에 책임을 요구하는 건 긍정적이다.
문제는 때로 그 기준이 다르고 너무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표가 찍힌 인물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유명세(有名稅)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세금이다.
평범한 개인은 약하지만 군중은 강하다.
나쁜 일일수록 혼자하면 두렵지만 함께 하면 더 강력해진다.
팩트 체크를 우선시하는 기성 언론과 달리 사이버 멍석말이는 마녀사냥에 가까워 누군가를 불태워야 끝난다.
군중은 그들의 스타를 높은 나무 위에 올려놓고 우러러보다가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으면 다 같이 몰려가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우러러볼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이때 환호와 미움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다.
어쩌면 신선한 환호와 미움의 대상을 사냥하는 것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군중 심리를 이용해 조회 수 이상의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엄청난 악플에도 끊이지
않는 연예인 부동산의 비포 애프터 기사가 대표적이다.
왜 이런 일이 빈번해졌을까. 성장이 멈추고 성공이 희귀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추락을 바라보며 자신이 상승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시대는 모두에게 비극이다.
그 부메랑이 언제 나를 칠지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흑백 요리사’의 최종회를 봤다.
흙수저 무명 요리사와 백수저 유명 요리사 사이에서 우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개인적으로 이 모든 경연이 ‘졌지만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압축 서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자보다 오히려 패자에게 훨씬 더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이 흥미로웠던 건 기존의 클리셰를 뒤집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게 많은 사람과 잃을 게 없는 사람 중 누가 더 리스크가 클까. 위험할 수도 있는 과감한 모험을 선택한 건 무명의 신인이 아닌 기득권자인 백수저 셰프였다.
많은 성취를 이룬 사람은 왜 매번 성공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 성공의 착시 현상은 왜 나타날까. 나는 그것이 실패를 대하는 그들 특유의 태도에 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가 각인되려면 무명일 때 성공보다 오히려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실패가 성공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오롯이 몸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성공의 방정식은 과거와 달라진다.
실패가 ‘시도’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것만큼 중요한 건 멋지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실패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진 ‘하타무라 료타로’는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를 구분한다.
도전 과정에서 배움이 있으면 좋은 실패고, 부주의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나쁜 실패다.
가장 나쁜 건 실패가 두려워서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는 없을지 몰라도 그런 태도 자체가 바로 실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가진 의문 하나가 풀렸다.
성공을 향해 올라가려는 노력과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력 중 어떤 게 더 절실할까. 내 예상을 뒤집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훨씬 더 집요하고 강박적이란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를 마친 뒤 적었던 문장이 생각난다.
눈에 보이는 나무의 높이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이에 비례한다.
더 어려운 쪽은 언제나 노력의 ‘강도’가 아니라 ‘지속’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대가가 된 이유다.
마트의 시식 줄에 서 있던 친구에게 “먼저 드세요!”라며 자신이 받은 컵을 건네던 앞사람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고마움이 분노로 바뀐 건 종이컵에 담긴 고기를 본 순간이었다.
컵에는 커다란 비계가 박힌 고기가
들어 있었다.
친구는 자기 몫이 됐을 고기를 가로챈 앞사람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옆에 아이가 있어 화를 참았다.
어른 보폭으로 한 걸음 남짓한 수로를 건너지 못하는 여동생을 일곱 살 남짓한 오빠가 자기 몸을 눕혀 등을 밟고 건너게 하는 영상을 봤다.
내가 놀라자 함께 영상을 본 친구는 “평소 아빠가 엄마에게 하는 행동을 본 거야.
여러 번 봤겠지. 아이는 자기가 본 걸 따라 하거든” 하고 답했다.
철학자이자 예술가인 칼릴 지브란은 관대함을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자부심을 “필요한 것보다 적게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리스 마르틴의 책 ‘아비투스(Habitus)’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값을 묻는 아이가 나온다.
25센트라는 점원의 답을 듣고 손에 쥔 동전을 세던 아이는 셔벗 아이스크림의 값을 다시 묻는다.
점원이 20센트라고 답하자 아이는 셔벗을 고른 후 동전을 탁자에 올려놓고 나갔다.
계산서와 동전을 본 순간, 점원의 코끝이 빨개졌다.
탁자에는 25센트가 놓여 있었다.
팁을 주려고 아이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포기한 것이다.
아비투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행동과 태도, 습관을 뜻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매 순간의 선택은 지난 삶의 궤적을 압축한다.
이 단어를 사용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당신은 볼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이야말로 결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내향성, 외향성 같은 기질은 타고나지만 태도나 습관은 꾸준한 교육으로 키울 수 있다.
관대함이나 자부심 역시 그렇다.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선행도 악행도 서로 보고 배운다.
좋은 부모와 친구를 가진 사람이 좋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이유다.
향수 가게에 들어가면 향수를 사지 않아도 내 몸에 향기가 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