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가 한강의 작품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을까?


by 김동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작품을

과연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평론가가 있을까?

아래의 글은 이런 질문에 회의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밝히고 있다.
늦었지만,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학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한강(2014) 출처-위키백과

일찌감치 한(恨)은 한국인의 고유한 슬픔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한에 관한 지적 담론은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크게 융성했다.
문학, 미술, 철학, 종교, 사회학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이 담론에 대거 참여해서 백가쟁명을 꽃피웠다.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다 이 담론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90년대부터 한 담론은 급격하게 쇠락하여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놀라움을 넘어 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나의 담론이, 그것도 공동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반성하는 지적 담론이 이처럼 단기간에 명멸한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정상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위 한국인의 ‘냄비근성’ 때문일까? 자주 듣는 자조적인 목소리처럼, 우리 지식인들이 담론 수입상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한이라는 자생적인 담론이 취약한 것은 오로지 그 때문일까?

한(恨) 담론이 소멸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 담론이 더 이상 한국인의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 근대화 이후 담론의 유효기한이 만료된 셈이다.
90년대 이후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한으로는 한국인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한 담론은 근대화 직후 ‘한시적으로’ 회고를 통한 현재의 비판 및 반성에 그 존재의미가 있던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리 지식인들은 (한이 아닌) ‘우울(melancholy)’로써 한국인의 마음과 한국사회를 진단하고자 한다.
멜랑콜리로 두 권의 책을 낸 나로서는 반길만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체질화된 감성은 특히 그렇다.
사회 문화 변동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과거 문화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억압될 뿐이다.
혹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면 깊숙이로 주름질 뿐,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에 관한 담론은 사라졌을지언정, 오랜 시간 축적된 한은 상흔의 형태로나마 남아 있다.
철저히 극복 대상으로 한을 보았던 고은 시인마저도 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한은 우리에게 유전이다.
이 말은 너무 극단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가장 변질될 수 없는 민족 심상의 체질인 것만은 틀림없다.

고은, 「恨의 극복을 위하여」, 『恨의 이야기』, 서광선 엮음, 보리, 1988. 32쪽.

지금까지도 한은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잠복해 있거나, 아니면 다른 형태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의 우울을 논하는 자리에서 한을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다듬어 가는 작업을 위해서도 한에 대한 논의는 필수불가결하다.

한 담론이 소멸할 무렵, 한국인에게는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담론의 밑불마저 꺼트린 거센 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돌이켜 보자면, 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이어 IMF 외환 위기와 거기에서 탈출하려는 내부의 처절한 바람이 있었으며, 그 결과 혹독한 신자유주의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2002 월드컵이 상징하는 ‘신바람’과 어느덧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되었다는 자신감이 더해졌다.
이 와중에 조선 시대나 일제 강점기에나 있을 법한 한은 점차 망각되었다.
글로벌스탠더드의 광풍에, 한 담론은 순식간에 스러졌다.

사실 한 담론이야말로 맹목적인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에서 싹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잠재울 수 없었고, 결국 반성의 새싹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한 담론은 시대착오적인 담론, 박물관에서나 보존해야 할 골동품 담론이 되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한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린다.
‘낙후하다’라는 말은 발전과 성장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최대 악평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멜랑콜리가 한을 대신하여 우리의 심정과 처지를 대변하는 말로 부상했다.
한국인의 마음은 바람 든 무처럼 푸석푸석해졌고 한 담론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기에, 썰렁하고 팍팍해진 마음을 읽고 위무하고자 서양의 멜랑콜리 담론을 도입했다.
그런데 과연 멜랑콜리 담론이 한국인의 우울을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멜랑콜리 연구자인) 나의 생각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서양인과 다르다.
잠시 외국 여행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수 천 년 동안 형성된 서양인의 기질을 단기간에 완벽히 모방하고 내면화할 수 있겠는가? 지금 한국인이 겪는 우울은 과거의 한과도 다르며, 서양의 멜랑콜리와도 다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어디쯤일까? 전보다 멜랑콜리와 친숙해졌다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다만 서양적 생활세계에서 배태된 멜랑콜리가 한국인의 우울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우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과 멜랑콜리를 각각 살펴보아야 하며, 둘의 비교를 통해서 한국인의 우울이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혹은 둘의 화학적 결합으로 새로운 무엇인가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를 면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런 작업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K-정서’를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에 관한 연구는 허무할 정도로 급격히 시들해져 버렸지만, 아직 연구의 ‘필요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외국 지식인들이 한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맨부커 국제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해 미국 여성 작가인 다이앤 존슨(Diane Johnson)은 한(恨)을 키워드로 삼아 한강의 작품을 분석했다.
그녀에 따르면, 한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은 일종의 유니크한 한국인의 민족적 특성 혹은 정신 상황으로서 타인들이나 나라의 적 혹은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특유의 분노이다.

유종호, 『그 이름 안티고네』, 현대문학, 2019. 205쪽 재인용

그녀가 보기에, 한은 한국 고유의 민족적 특징이면서 약자(약소민족)의 강자에 대한 역사적인 원한 감정이다.
한강의 작품을 굳이 이런 한으로 분석해야 하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존슨의 한 개념이 평면적이고 소박한 것임은 분명하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처음부터 한 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존슨 같은 외국 지식인의 한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면서도 이렇게 자성(自省)한다.

통속적․축약적으로 한을 파악하고 있는 외국인이 있다면 무책임한 풍문의 교정을 꾀하지 못한 우리의 불찰도 작은 일이 아니다.

유종호, 같은 책, 207쪽.

나는 유종호 선생의 비판과 자성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한 담론의 유효성과 역사적 가치를 지나치게 저평가하는 부분은 아쉽게 생각한다.
어쨌든 이 에피소드는 한국 문화가 세계 문화의 한복판으로 진입하면 할수록, 한의 독특성과 보편성에 대한 관심이 세계시민들로부터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최소한 한국학 내부에서라도 한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한국의 ‘K-문화’가 세계 곳곳에 깊숙이 확산되기를 소망한다면, 소중한 자산인 한 담론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 이 글은 졸저 <철학자의 사랑법>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