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낮은 곳에 있다


  

행복은 낮은 곳에 있다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 조현 기자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 조현 기자

야생화(野生花)라고 하면 왠지 무겁고 학자의 말투처럼 들리고 들에 사는 꽃이라고 하면 가볍고 포근하게 들린다.
야생초(野生草)와 들에 나는 풀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것을 표현해도 중국 글자와 우리 글자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자 상용이 잦다.
야생화와 들꽃,
야생초와 들풀 그대는 어느 쪽 말을 택할 것인가? 한자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굳이 한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한글을 쓰자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겉멋 인생은 아무 쓰잘머리 없는 짓이었다.
나라가 하는 일을 봐도 쓰잘머리 없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치우는 것도 그렇고,
일 제대로 하지 않고 온갖 혜택 다 누리는 국회의원도 그렇고,
거둔 세금 펑펑 새 나가는 것도 그렇다.
옛날에는 얼굴이 잘생긴 사람이 배우 하고 목소리 좋은 사람이 성우하고 가수하고 그랬다.
요즘엔 그래도 많이 나아져서 얼굴이 못생겨도 배우 할 수 있고 목소리가 좋지 않아도 가수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얼굴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사람만 찾다가 정말 훌륭한 배우와 가수를 놓쳐 버렸는지 모른다.
잘난 꽃 못난 꽃이 어디 있겠냐만은 향기 좋은 꽃만 기억하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로 살아온 것 같다.
들에 살았으면서도 들꽃을 모르니 말이다.
사람들은 예뻐 보이려고 화장품을 바른다.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향수를 뿌린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사람 냄새가 사라져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 되었다.
사람은 마음에서 향이 나야 하는데 몸에다 향수를 뿌리고 있으니 글 향 없는 책과 다를 바 없다.

다움은 없고 모방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백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를 대단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숫자놀음을 하고 있다.
향기 없는 꽃들이라도 군락을 이루면 사진작가들이 모여들고 길 잃은 철새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산이 아프고 강이 아픈데도 사람들은 그저 세상이 변했다고만 한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
척 예술 뒤에 숨은 사람과 그것에 물든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은 변했다고,
변해야 한다고. 그게 사람이 변한 거지 세상이 변한 게 아니지 않는가. 들꽃을 함부로 밟고 눈길을 주지 않아도 들꽃은 변함없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예전엔 나도 그랬다.
늦었지만 이제는 들꽃을 존중하며 하나둘 사귀고 있다.
향기 없는 꽃은 지나쳐버리고 향기 있는 꽃은 아는 척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참으로 밉다.
산이 아름다운 건 아주 작은 들꽃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26살 때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좀 했다.
찌든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시골 가서 밭 일구며 살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배움터. 조현 기자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배움터. 조현 기자

가끔 순천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나는 사람 모두가 들꽃이다.
그 들꽃들은 단 한 번도 예쁜 척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꽃병에 꽂힌 꽃도 아니고 잘 가꿔진 정원에 핀 꽃도 아니고 그냥 들에 핀 평화로운 꽃들이다.
내가 다른 들꽃 이름은 잘 몰라도 앵무산 기슭에 피어있는 들꽃 이름은 거의 다 외운다.
나마스테꽃,
노라꽃,
다정이꽃,
댕댕이꽃,
동백이꽃,
두더지꽃,
무무꽃,
무심꽃,
무지개꽃,
민들레꽃,
반디불이꽃,
보리밥꽃,
빛바람꽃,
소리샘꽃,
은가비소정꽃,
신난다꽃,
언연꽃,
원담꽃,
함박꽃,
향아꽃,
현동꽃,
혜리꽃 등 여러 꽃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혹시 내가 까먹은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 꽃들은 서운해하거나 삐지지 않으리라. (이름을 까먹은 꽃은 나중에 짜장면 한 그릇 약속함.)

버려진 학교에 들꽃이 날아들어 거친 땅을 갈아 비옥한 땅을 만드니 학교가 숨을 쉬고 뒷산도 덩달아 되살아나 흘러가는 구름도 웃고 넓은 저 들판도 웃고 평화가 스며들었다.
들에 펴서 들꽃이 아니라 들을 지켜서 들꽃이로다.
행복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평화로우면 그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행복이겠지만 그보다는 근심 걱정을 다스릴 줄 아는 게 더 큰 행복이겠다.
행복은 낮은 곳에 있으므로 높이 올라갈수록 멀어진다.
하지만 근심 걱정이 있으면 행복이 잘 보이지 않으니 그걸 잘 다스리면 하루하루 행복을 곁에 둘 수 있다.
행복의 화룡점정은 맞울림(共鳴)이다.
내가 노래를 하면 내 눈에 보이는 것들도 나와 같은 노래를 한다.
내가 행복할 때 나뭇잎이 살랑살랑 춤추면 나도 행복하고 나뭇잎도 행복한 것이니 바로 그런 것이 맞울림이다.
꽃이 시들었는데 나 혼자 기쁘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 도취다.
들꽃은 부잣집 정원에도 있고 임금님이 사는 궁궐에도 있다.
도취에 빠지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집도 즐겁게 해주고 사람도 즐겁게 해주고 벌,
나비,
나무들까지도 즐겁게 해주는 들꽃! 꽃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들길을 걸으며 오늘도 나는 행복했네.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배움터. 조현 기자

전남 순천사랑어린마을배움터. 조현 기자

깊은 산 속에 산다고 자연인은 아니지. 마음만 먹으면 도시에서도 자연인으로 살 수 있다.
들꽃이 도시에서 살지 못하면 들꽃이 아니고 자연인이 도시에서 살지 못하면 자연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향기 좋은 꽃들은 잘 알면서 들에 핀 꽃들은 잘 모른다.
그래도 들꽃은 서운하다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들꽃으로 산다는 것,
그건 행운이다.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에 사는 들꽃들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들꽃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부는 저 바람은 어디로 갈까

그리운 님을 찾아서 헤매는 걸까

장미 화원에는 향기가 넘쳐

벌들이 찾아와서 사랑을 속삭이네

아 장미는 아름답지만

거친 저 들판에 가난한 꽃들은

장미보다 아름다워 내가 나비라면

들에 핀 저 꽃들에게 머무르겠네

-‘들에 핀 꽃,
1980

글 한돌(작사작곡가·가수)

*이 시리즈는 순천 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돈은 얼마 만큼 있는 게 가장 좋은가

픽사베이

픽사베이

#어제 먹은 밥은 있어도 어제 먹는 밥은 없다 .
내일 먹을 밥은 있어도 내일 먹는 밥은 없다 .
지금 너에게 있는 건 지금 먹는 밥이 전부다 .
먹은 밥이나 먹을 밥은 세상천지에 없는 밥이다 .
어찌 밥만 그러랴 ? 없는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있는 것이나 고맙게 받아들여 그것으로 살아라 .
아멘 . 방금 이 말씀을 저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주십시오 .게서 온전히 이루어주십시오 .

# 꿈꾸면서 내용을 메모하는데 글자가 자꾸 바뀐다 .
여러 번 쓰고 다시 써보지만 그럴 때마다 보면 어느새 바뀌어 있다 .
결국 다음 세 마디를 메모 아닌 기억으로 남겨둔다 .
“ 아무의 길 → 아무의 죽음 → 아무의 삶 아무의 육(肉)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지만 영(靈)은 죽음을 거쳐 삶으로 간다 .
사람은 영을 담은 육이 아니라 육에 담긴 영이다 .
이 진실을 어디에 적어두지 말고 가슴에 새겨두라는 말씀 ?

지금 여기에 현존하라는 말은 모든 것을 한님께 맡기라는 말이다 .
이 쉽고 좋은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 있지도 않은 어제와 내일에서 헤매는 오랜 버릇의 힘이 실로 막강하구나 .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못한다 해도 한님이 그것을 못하실 리 없다 .
오 ,
어머니 한님 ! 저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
어머니 .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다짐하고 다짐한다 .
오냐 ,
한님을 진실로 믿는다는 게 어떤 건지 반드시 체득하고 말리라 . 우선 언제 어디서나 먼저 말하지 않는 것부터다 .
아무야 ,
이제부터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 두 마디가 있을 뿐이다 .
묻지 않은 말에 답하지 말라는 스승님 유언 말씀을 철두철미 지켜보자 .

#방바닥 위를 작은 벌레가 기어간다 .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도르르 몸을 말아 죽은 시늉을 한다 .
살그머니 집어 창밖에 내려놓으니 조금 있다가 고물고물 기어간다 .
녀석 ,
아예 죽지는 않고 죽은 척 시늉하여 살아나는 길을 그 작은 몸으로 터득했더란 말인가 ?

픽사베이

픽사베이

# 관옥을 암살하라는 상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시인 X 가 종적을 감추었다 .
그가 머물던 곳에서 쪽지가 발견되었다 .
“ 사체에 총알을 박는 것은 시인 킬러의 자존심이 허락 않는다 .
꿈속에선지 깨어나선지 무슨 족쇄가 풀린 느낌이다 .
오냐 ,
오늘 하루만이라도 명실공한 송장으로 살아보자 . 슬기가 전화로 “ 오늘 예배는 ? 하고 묻는데 대꾸를 못한다 .
속으로만 ,
예배 ? 드리게 되면 드리지 뭐 ,
한다 .
효선이 건네는 주스를 마신다 .
배가 좀 고프지만 밥 먹자고 하지 않는다 .
속에서 누가 묻는다 ,
그럼 누가 시키지도 청하지도 않은 번역은 왜 하느냐 ? 답한다 ,
나에게 그 질문은 누가 시키지도 청하지도 않은 숨은 왜 쉬고 오줌은 왜 누느냐고 묻는 것과 같구나 .
조금 기다리니 낮잠 한숨 자고 난 효선이 밥상을 차리며 함께 먹잔다 .
된장찌개에 쌀밥 . 맛있다 .
… 현관문 열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
효선은 어디 깊숙한 곳에 유폐된 기분이란다 .

# 백척간두 에 진일보 란 무슨 말인가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온몸을 던지라는 말이다 .
할 수 있겠느냐 ? 그럴 수밖에 없으면 그럴 수밖에요 . 달리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 이 허수아비 같은 물건한테 . 맞다 ,
너는 허수아비다 .
하지만 그냥 허수아비가 아니다 .
내가 뜻이 있어서 공들여 만든 허수아비다 .
몸 함부로 굴리지 마라 . 아멘 .

#아침에 효선이 말한다 ,
수중에 있는 돈으로 오두막 짓자고 . 눈물 날만큼 고맙다 .
음 ,
이렇게 수도자의 간소한 삶에 대한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루어주시는가 ?
소인 ( 素仁 ) 친구라는 건축사를 성동에서 만나 점심 대접받고 헤어지면서 말한다 ,
단칸방 전셋집 한 채 지어달라고 . 어제 중노동으로 지쳤던 효선에게서 신선한 기운이 되살아나는 게 보인다 .

이현주 목사와 함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랑어린배움터 식구들. 사진 사랑어린배움터 제공

이현주 목사와 함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랑어린배움터 식구들. 사진 사랑어린배움터 제공

#꿈에 글을 읽었는지 썼는지 모르겠다 .
대강 이런 내용이다 .
…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말자 . 현실을 부정하려는 에고의 술책이다 .
일어난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났으니까 일어난 거다 .
그 원인을 캐지도 말자 . 이 일이 왜 일어났느냐는 질문은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
사실 우리는 본인이 왜 ,
어떻게 해서 ,
여기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 물으려면 이 일이 우리에게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
무엇을 일러주고 있는지 ,
그것을 묻자 . 여기에 창조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이 있다 .

# 번역하다 말고 드는 생각 . 돈은 얼마만큼 있는 게 좋은가 ? 많을수록 좋다 ? 천만의 말씀 . 경험이 말해준다 ,
그렇지 않다고 . 적을수록 좋다 ? 그도 아닌 말씀 . 쓸 만큼 있는 게 좋다 ?
말이 안 되는 소리 ! 그 ‘ 만큼 이라는 게 한이 없는데 어디까지가 쓸 만큼인가 ? 돈은 ,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
지금 있는 만큼 있는 게 가장 좋다 .
왜냐하면 그것이 저한테 있는 유일한 것이며 전부니까 . 게다가 ,
무엇보다도 ,
좋은 것밖에 없는 한님이 주신 거니까 .

#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진 글씨를 지우려고 가슴을 긁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
이런 글이다 .
“ 너는 무엇에 의하여 해방된 무엇에 의하여 해방된 무엇에 의하여 해방된 … 그러니까 작은 틀에서 나와 큰 틀로 들어가는 끝없는 과정이 네 인생이라는 말이다 .
그렇다면 안심이다 .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켜주는 틀 속에 네가 있다는 ,
태어남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을 통하여 작은 틀에서 나와 큰 틀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
게다가 네가 너를 해방하라는 게 아니고 먼저 해방된 무엇이 너를 해방시킨다는 얘기 아닌가 ? … 살려고 애쓸 것 없다 .

글 관옥 이현주 목사


거울에 비친 얼굴 말고 진짜 얼굴을 보는법

픽사베이

픽사베이

#일꾼들이 여섯이나 와서 트랙터로 뒷밭을 순식간에 갈아치운다.
그중 얼굴 깨끗한 사람이 여기 수행하는 곳 아니냐며 자기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웃으며 대꾸한다,
삶 자체가 수행 아니겠냐고. 그렇다.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건 결국 저마다 제 삶을 다듬고 가꾸는 거다.
다만,
자기가 배우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아이처럼,
자기가 수행하고 있다는 걸 모르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
새벽에 들은 한마디 말씀. “이십세기 지구에 두 선생이 살았다.
하나는 ‘이거다.
이렇게 살아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건 아니다.
이렇게 살지 마라. 하였다.
그 이름이 하나는 간디고 다른 하나는 히틀러다.
제대로 배우는 학생에게 둘 다 고마운 선생이다.
선생이라는 존재가 선생한테 있지 않고 학생한테 있다는 마이다 슈이치의 말이 옳다.
…효선이 구운 빵을 사겠다며 마을사람들이 찾아온다.
고맙고 정겨운 장면이다.

#효선 강의 들으러 학교에 가고 혼자 집을 보는데 괜히 마음 설레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읽고 있던 루빈의 책에서 한 문장이 마음의 손을 잡아준다.
“한창 펼쳐지고 있는 당신 인생 스토리에서 이만큼 떨어져있는 본인의 모습을 그려보라.
당신이 수년 동안 공들여 쓴 소설 원고가 불에 타버린다.
잘 되어간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가 순식간에 틀어진다.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일을 영화의 한 장면 보는 것처럼 겪어보라. 당신은 지금 견디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고 있다.
그는 당신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니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길고 복잡한 문장을 읽는다.
하지만 글에 담긴 뜻은 간단하다.
“세상에 작용하는 인간의 힘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할 경우 내가 죽겠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경우에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죽이겠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힘이라는 말 대신 ‘돈이라는 말을 쓰면 이 시대에 훨씬 설득력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누가 손해를 보아야 할 경우 내가 손해 보겠다는 마음과 나 아닌 다른 누구한테 손해를 입히겠다는 마음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투기심을 폭력으로 틀어막는 사회주의 체제라면 혹시 몰라도 투기(投機)를 경제활동의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부가 인간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으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공격하여 성공한(?)
윤석열 정부가 요즘의 전세 사기 파동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 같던데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조물주가 인간 마음에 탐욕을 심어주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그런다면 희망이다.
비로소 사람들이 온갖 파동의 원인을 제 속에서 찾게 될 터이니까.

픽사베이

픽사베이

#오후 3시경 효선과 뒷밭에서 모종을 옮기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다.
무엇이 탁! 하고 깨어지는 소리에 고개 돌려 바라보니 시커먼 연기가 부엌 쪽에서 솟아오른다.
어쩌나,
집 안에 치매 노모 혼자 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외마디 비명,
당황,
허둥지둥,
울부짖음,
망연자실,
달려온 마을 사람들의 우왕좌왕,
붉은 혓바닥 널름거리며 지붕으로 타오르는 검은 연기,
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소방차들이 뿜어내는 물줄기…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지금여기교회 식구들과 엄정 괴산에서 달려온 아이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복 입은 소방대원들과 국과수 요원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고…
아비규환의 절망과 원망과 허탈의 지옥 같은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
시신이 누워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장차 당신이 이루실 일에 관련하여 찰나의 비전을 효선과 아무에게 따로 동시에 주심과 더불어 …
짙은 먹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이 열리고 효선의 눈에서는 겁에 질린 엄마 얼굴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바뀌고 그리고… 마침내 한 음성 듣는다.
“네가 나를 믿는 척 시늉하는 건 여기까지다.
그러는 너를 더 이상 놔두지 않겠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내가 저지른 일이니 수습도 내가 한다.
이것은 낡아 무너진 과거의 마무리면서 새로이 펼쳐지는 역사의 첫걸음이다.
머리 굴리지 말고 눈 맑게 뜨고 지켜보아라. 지난 이박삼일 동안 네 속에서,
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 메아리로 울리던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이 노래가 어떻게 진실인지를 네가 진실로 알게 되리라. 아아,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국과수에서 화재 원인을 밝힐 수 없다고 원인불명이라고 잠정결론을 내렸단다.
그럴 거다.
한님 어머니가 하신 일의 원인을 사람이 무슨 말로 규명할 것인가?

#효선 언니가 다니는 서울 지구촌교회 주관으로 장례 마치고 충주 화장장에서 유골을 수습한다.
고인 생전에 “천국이 따로 없네. 여기가 낙원일세.라고 자주 말하던 노은(老隱) 집 벚나무 아래에서 지금여기교회 식구들과 아랫집 내외 그리고 한상렬,
이병창,
서산,
소함 목사 등이 안장 예배를 드린다.
광주로 떠나는데 ‘마을언니들이 모여와 인사 나눈다.
모두들 고맙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효선 말대로,
고마움과 사랑 말고는 아무 남은 게 없다.

전소(全燒)하여 검은 잿더미로 바뀐 집에서 건져낸 것들이 있다.
관옥 신약성서 한 권,
효선이 농업인으로 받은 각종 자격증과 수료증 그리고 땅문서. 컨테이너하우스 두 채에 있던 몇 권의 책과 밀가루와 오븐도 멀쩡하다.
효선이 말한다,
밀가루하고 성경이 있으니 말씀과 밥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네. 웃으며 대꾸한다,
그래 그 둘만으로 살아보자. 유소(幽素)가 잿더미에서 숯이 된 나무토막 하나 건졌단다.
그것으로 십자가를 깎아보라고 하니 자기도 그럴 생각이라고 답한다.
절묘하다.
소인(素仁)이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장인이 돌아가셔서 서울 적십자병원에 가는 중이란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죽으로 저녁 먹고 교회 서재에서 잠자리에 든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는데 한 말씀 주신다.
“좋은 생각이냐,
안 좋은 생각이냐,
이건 더 이상 너에게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너에게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
네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건 네 마음이지 내가 준 마음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오직 생각을 비워라. 아아,
청강(靑江) 선생께서 사십여 년 전에 처음으로 주신 휘호가 유수식견(唯須息見)이었지. 그 말이 오늘 이렇게 실현되는가?
소인(素仁) 장인 장례식장에서 한마디. 부디 예수 가르침대로 살자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생각은 생각이다.
믿어 의지할 게 못 된다.
한님은 빈틈이 없으시다.
돼가는 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법이다.
완전 능동인 완전 수동!

#잠에서 나오는데 슬며시 드는 생각. …본인의 거울에 비친 얼굴 말고 진짜 얼굴을 본 사람 있을까? 없을 거다.
본인의 진짜 얼굴에 그나마 가까운 얼굴을 보고 싶으면 사랑하는 사람 눈동자에 비친 얼굴을 보면 된다.
그 순간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면서 ‘사랑의 얼굴일 테니까. 사람은 사랑일 때 비로소 마침내 사람이다.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나옹선사는

 

조현 기자 

오늘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보조사상연구원 공동주최

나옹 선사 진영.

나옹 선사 진영.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시를 남긴 고려 후기 고승 나옹 선사(1320~1376)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승보종찰인 순천 송광사에서 24일 오후 1시 열린다.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이 기획한 이 학술대회는 송광사와 보조사상연구원(원장 김방룡)이 공동 주최한다.

나옹 선사는 경기 양주 회암사에서 견성하고 중국 옌징(베이징의 옛 이름)으로 건너가 인도에서 온 지공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귀국해 훗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에게 법을 전했다.
주로 양주 회암사에 주석했지만,
송광사에서 3년간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방장 현봉 스님의 법문에 이어 ‘여말선초 송광사의 위상과 나옹의 법맥을 주제로 진행되는 학술대회에서 황인규 동국대 교수,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
이철현 동국대 교수,
중앙승가대 교수 정각 스님 등이 발표한다.

고려시대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운동을 펼친 보조 지눌 선사를 조명하기 위해 1987년 창립된 보조사상연구원은 연구 주제를 놓고 나옹 선사를 비롯해 송광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들로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해인 수녀 “안아만 주기에도 인생이 모자라요

 

조현 기자 

해인글방서 만난 이해인 수녀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2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첫번째는 가톨릭 수도자이자 시인인 이해인 수녀시인(77) 입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는 지하철 금련산역에서 내려 5분가량 금련산 쪽으로 가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보인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원이다.
60년 전 수도원이 들어설 때만 해도 산골이었고,
주위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 이 일대는 천지개벽했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수도원 건물 맞은편에 있는 해인글방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맞아주는 이해인 수녀다.
해인글방은 마치 폐교가 되어 이젠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교처럼 낡았다.

시인일 뿐 아니라 수도자인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유명세에 주눅이 들지만 스스럼없는 그의 천진함에 금세 놀라게 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 같은 파릇함은 여전하다.
그가 2008년 대장암에 걸려 항암 주사를 30번이나 맞고,
방사선 치료를 28번이나 할 만큼 지독한 투병 과정을 거쳐 지금도 암세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도 한때는 가시 달린 장미와 다를 바 없었던 때가 있었다.
20대 때 이미 자신의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지만 세속의 조명 세례가 밝아질수록 수도원에선 고난거리가 되곤 했다.
“제발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안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도 했다.
차라리 ‘대중들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수도자가 되길 바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고,
흰머리가 늘면서 이젠 출세간의 속박을 끊어낸 듯 자유롭다.
세속에서 너무 유명해져 수도원에서 쫓겨날까 봐 숨죽이던 해인 수녀가 더는 아니게 된 것이다.
스스럼없는 그다움을 마주하다 보면 더불어 무장이 해제돼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해인글방에 있는 그의 책상은 깔끔할 새가 없다.
정리하자마자 어느새 또 슬픈 하소연들이 켜켜이 쌓인다.
전국에서 보내온 편지와 엽서들이다.
해인글방 뒤 창고엔 그렇게 쌓인 편지글들이 한방 가득하다.
거기엔 더 이상 세상을 살 희망이 없다는 청년들이나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운 중년들의 글이다.
사형 고를 받고 날마다 죽음의 순간과 씨름하는 사형수의 편지도 있다.
그 많은 고통을 다 읽다 보면,
아무리 수도자라지만 그의 몸인들 남아날까. 하지만 무거운 동토를 뚫고 나온 새싹 같은 편지도 있다.

‘수녀님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지요.
엄마에게 버림받고 동생까지 세상을 떠나자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던,
어린 소녀를 기억하시는지요.
수녀님은 제게 따뜻한 은총을 보내주셨어요.
수녀님이 보내준 한 통의 편지가 제겐 큰 힘이 되었답니다.
제게 살 희망을 주셨어요.
열심히 살기로 하고,
지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잘살아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 곧 결혼할 겁니다.
수녀님의 작은 편지 한 통이 씨앗이 되어 저란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었어요.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원 건물 앞에 선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원 건물 앞에 선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해인 수녀는 이런 이들에겐 정성스러운 위로와 격려의 시와 글을 꾹꾹 눌러 써 마음을 전한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아이들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그는 손을 내민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와 그 유가족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이 두번 세번 죽음과 같은 순간을 겪는 게 가슴이 아파서다.

“극단적 선택도 우울증의 일종일 수 있어요.
그렇게 했다고 해서 종교 예식조차 안 해주는 경우도 있어,
더 마음이 쓰였죠.

그는 나이,
성별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위로에 나선다.
2001년 도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가 숨진 유학생 이수현씨의 부모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 시민으로서 고맙다는 감사와 위로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다.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비통한 고인의 모친은 불자였지만,
해인 수녀의 뜻하지 않은 위로에 감격해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시와 글을 쓰고,
정성을 들여 종이 나비를 오려 붙이느라 도무지 자신의 통증엔 관심이 없다.
그 고통에 매달릴 짬도,
지루할 틈도 없는 해인 수녀다.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있고// 내가 살아있으므로/ 다시 당신을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그는 희망이란 시에서 신에게 자신의 불민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쓴 엽서와 편지 한 통에 울며 마음속 고통 덩어리를 녹였는지 모른다.
최근 해인 수녀의 눈길이 머문 곳은 튀르키예와 시리아다.
그곳에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향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에게 최엘라라는 독자가 만들어 보낸 하트 문양 사진 .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해인 수녀에게 최엘라라는 독자가 만들어 보낸 하트 문양 사진 . 조현 종교전문기자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서만 탯줄에 감긴 채 구조된 갓난아기,
동생과 함께 돌 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시리아 소녀 등의 보도를 본 뒤 마음은 한없이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처참한 지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을 위로할 방법을 뭘까 밤새 고심도 했다.
그가 모진 암과 싸우면서도 명랑투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신의 아픔에만 매몰될 짬을 없애고 시선을 타인의 고통으로 향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비록 그곳이 바다 건너 먼 곳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는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해 위로의 글을 건네면서도,
정작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만담으로 풀어낸다.
​ “방사선 치료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리 겁부터 줘요.
어떤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병원 간판을 보자마자 구토부터 나니까 미리 검은 봉지를 들고 다니라고 권하죠.
방사선 기사들은 치료 전에 방사선 빛이 몸에 잘 스며들도록 힘을 빼는 연습을 30분간 미리 시켜요.
방사선 기사들이 수녀님 힘을 빼라니까요.
왜 힘을 더 주시나요라고 해요.
힘 빼는 게 그렇게 힘이 들더라니까요.
그러면서 “남들은 항암 치료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데 나는 전혀 살이 안 빠지니 원! 하며 혀를 찬다.
몸이 아프면 짜증이 늘고,
부정적인 말도 많이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해인 수녀의 시엔 암 투병을 한 뒤로 기쁨이나 행복 같은 단어가 더 많아졌다.

이해인 수녀가 직접 쓴 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이해인 수녀가 직접 쓴 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신의 암 투병 경험을 들려주며 위로하던 분들 가운데 먼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요.
탤런트 김자옥씨도 친절하게 방사선 맞는 법까지 알려줬는데 먼저 가고 말았어요.
병원 생활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많이 보다 보니 우리 삶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너무도 다가와요.
오늘 하루 한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지 않을 수 없지요.
내일은 없을지 모르니까요.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할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당연시했던 것이 모두 행복이란 걸 알게 되니까요.

그는 암 환자나 사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겐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바다 같은 자비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환자 자신도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노력과 마음 공부를 할 것을 권유한다.
자기 연민에만 빠지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 더욱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으니,
자기 아픔을 좀 떼어 놓고 객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다 보면 가족과 의사와 간병인 모두의 감사함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결 마음도 나아진다는 것이다.

국민 우울 시대라고 할 만큼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 대한 진단도 마찬가지다.
“돈이나 성공에만 기준을 두고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우울을 벗어날 수 없어요.
좀 더 시야를 돌려 보면 지금도 더 어려운 가운데서도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죠.
행복의 기준을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에만 두면 우울해 질 수밖에 없지요.

전국에서 온 편지들을 보는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전국에서 온 편지들을 보는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 아니라 암이,
고통이 있음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듯 해인 수녀는 다시 만담을 이어간다.
문학적 교류를 하면서도 가끔은 티격태격하기도 했던 법정 스님과의 일화도 털어 놓았다.
해인 수녀가 오랜만에 법정 스님 거처인 송광사 불일암을 찾아 갔을 때 일이다.
“법정 스님은 펑퍼짐해진 나 자신을 보고 ‘고뇌하는 시인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했어요.
두 사람은 맑은 하늘을 이고 진 산사에서 살가운 바람 맞으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해인 수녀는 수녀원에만 있긴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요.
밖(세속)에서 살았으면 멋만 부리는 자유부인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놀리면 저는 정색을 하고 분명 현모양처가 되었을 거라고 열심히 변명하곤 했지요.
(웃음) 자신을 희화화할 만큼 병마에도 넉넉해진 것일까.

그는 가끔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과 행동을 어쩌지 못하며 막다른 길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도 의례적인 종교적 윤리 같은 걸 들이대지 않는다.
얼마 전엔 형부를 사랑해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던 여성이 찾아와 고통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해인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 여성은 자신의 고백을 듣고 그냥 안아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제 포옹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 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는 그가 건네주는 마지막 말이 봄 햇살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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