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임이네, 물가의 잡초 같은 탐욕의 여인

 


꽃이야기

흔히 볼 수 있는 꽃 위주로, 꽃이야기와 빛깔, 향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메일이 잘 안보이시나요?딸깍 하는 소리

타이틀 이미지 테스트

김민철 논설위원

‘토지’ 임이네, 물가의 잡초 같은 탐욕의 여인

고마리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고마리는 전국적으로 개울가·도랑 등 물가나 습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입니다.
너무 흔해서 잘 눈여겨보지 않는 풀이기도 합니다.
무성한 잎만 보이다가 8월 들어서면 예쁜 꽃까지 하나 둘씩 피기 시작하는데 흰색 바탕에 끝에 분홍빛이 살짝 도는 매력적인 꽃입니다.
어느 분 비유대로 ‘하얀 꽃잎 끝에 발그스레하게 연지를 찍은 듯한 작은 꽃’입니다.
분홍빛 없이 흰색 꽃으로만 피는 고마리도 있습니다.

고마리 꽃과 잎.

임이네, 물가의 잡초같이 무성한 생명력

고마리를 보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임이네가 떠오릅니다.
‘토지’에 임이네가 없으면 소설을 읽는 재미가 덜할 것이 분명합니다.
소설 1부에서 3부까지 임이네 역할이 적지 않은데다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임이네는 ‘매우 건강하고 이쁘게 생긴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임이네는 새벽에 몰래 남의 집 호박을 훔치다가 마침 용이를 만나고 가는 월선이와 마주칩니다.
임이네는 월선이가 다녀간 것을 동네방네 소문내 마침내 용이의 아내 강청댁 귀에까지 들어가게 했습니다.
강청댁은 삼십리 밤길을 달려가 월선이에게 행패를 부립니다.
임이네라는 호칭은 딸 ‘임이’ 엄마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엔 친정 마을 이름을 따서 ‘~댁’,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이름을 따서 ‘~네’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임이네는 훤칠하고 잘생긴데다 성격도 부드러운 용이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습니다.
이를 묘사하는 대목에 ‘물가의 잡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주빛 옷고름과 끝동을 물린 흰 무명저고리의 옷섶 앞이 벌어져 있었다.
검정치마도 불룩하게 솟아 있었고 몸 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임이네 얼굴은 좋았다.
뭣인지 불사조 같은, 물가의 잡초 같은 끈질긴 것을 느끼게 하는 이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건강하고 넘쳐 있는 것 같다.
(중략) 여자는 염치불고하고 용이의 눈을 더듬어본다.
풍만한 정기(精氣)를 풀어서 용이 얼굴에다 설설 뿌리는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그는 임신한 여자였을 뿐 어미가 아니었다.
음탕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었다.
>

물가에서 자라는 고마리.

그런 임이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생깁니다.
남편 칠성이가 김평산의 꾐에 빠져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 살인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창졸간에 살인자의 아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험한 일을 겪은 임이네는 몇 년 후 돌아와 용이의 도움으로 다시 마을에 자리를 잡습니다.
월선이가 마을을 떠난 후 실의에 빠져있던 용이와 사이에서 아이를 갖습니다.
그리고 강청댁이 호열자(콜레라)로 죽자 임이네는 용이와 같이 삽니다.
작가는 이즈음 임이네를 다시 ‘물가의 잡초’를 동원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한 이부자리 속에 지낸 것도 벌써 사 년이 지나갔다.
칡넝쿨같이 줄기찬 생활력과 물가의 잡풀같이 무성한 생명력을 지닌 임이네, 식욕과 물욕과 성욕이 터질 듯 팽팽한 살가죽에 넘쳐흐르듯 왕성한 임이네는 대지에 깊이 뿌리박은 여자, 풍요한 생산(生産)의 터전이라고나 할까. (중략) 그러나 용이는 홍이를 얻은 뒤 다시 자식을 바라지 않았다.
>

서희 일행과 함께 간도 용정으로 갈 때 용이는 월선이와 임이네를 함께 데리고 갑니다.
월선이 작은 아버지 공노인의 도움을 받아 국밥집을 차리자 임이네는 식당 일을 돕습니다.
그 전까지는 임이네 언행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동정할 측면이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탐욕과 악의 화신입니다.
읽다보면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임이네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 임이네는 식당 수입 중 상당부분을 빼돌립니다.
빼돌린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며 재산을 불리는데 혈안입니다.
임이네는 손님이 오면서 사오는 고기나 곡식도 감추고 몰래 자기만 먹습니다.
다시 진주로 돌아와서도 임이네 악행은 끊이지 않습니다.
아들 홍이가 아버지 약값으로 쓰려한 돈도 빼돌립니다.
그러다 쉰다섯에 복막염에 걸려 죽음을 예감하고 광태를 부리다 용이보다 먼저 세상을 뜹니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이 다한 것입니다.

물가에서 꽃 핀 고마리.

고마리, 수질 정화하는 고마운 식물

작가는 임이네를 ‘물가의 잡초’라고만 표현했습니다.
물가의 잡초 중에서 어떤 잡초가 임이네에 가장 잘 어울릴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고마리가 떠올랐습니다.
고마리는 생명력이 왕성한 물가의 잡초이면서 꽃이 피면 상당히 예쁜 식물입니다.
작가가 물가의 잡초, 그러니까 수생식물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고마리라고 특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마리는 손가락 정도의 길이인데, 잎의 모양이 로마 방패 모양으로 아주 개성 있어서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마리를 보거나 만질 때 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며느리밑씻개처럼 고마리에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줄기에 긁히면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도 한 성깔 있는 임이네와 닮은 것 같습니다.
고마리는 한해살이풀이지만 계속 같은 자리에서 나는 것은 뿌리의 폐쇄화(꽃잎을 열지 않고 자가수정해 씨앗을 만드는 꽃)로도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고마리는 제 욕심만 채우는 임이네와 달리, 다른 식물과 세상을 위해 수질을 정화해주는 고마운 식물입니다.
오염된 축산폐수를 고마리가 살고 있는 수로를 거치도록 했더니 1 급수가 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마리와 함께 수질을 정화하는 식물로 여뀌와 부레옥잠 등이 있습니다.
수질 정화 기능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고, 예쁜 꽃으로 우리 눈까지 정화하는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마리라는 독특한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마리가 수질 정화 효과가 커서 ‘고마우리 고마우리’ 하다가 고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마리가 물가에서 워낙 무성하게 퍼져 나가니 이제 그만 되었다고 ‘그만이풀’이라고 하던 것이 고마니를 거쳐 고마리가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둘 다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이름 유래입니다.
이처럼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운 우리 식물 이름이 적지 않습니다.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 들어볼까요? [김민철의 꽃이야기]

길가 등 여기저기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했다.
달맞이꽃을 보면 박완서 단편 ‘티타임의 모녀’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부자집 아들인 운동권 남편과 사는 여공 출신 아내의 소외감과 불안을 그린 소설인데, 달맞이꽃이 중요한 상징으로 나오고 있다.
1993년 발표한 소설이므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달맞이꽃 필 때처럼 신경 곤두세우는 남편

주인공은 파출부인 엄마가 자신이 사는 대형 아파트에 와서 이것저것 감탄하며 파출부 티를 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위장취업한 남편을 만났다.
아들 지훈이를 낳아 서울 변두리 3층집 옥탑방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
집 주인은 옥상에 여러 야생화를 심어놓았는데 달맞이꽃도 피어 있었다.
다음은 달맞이꽃이 나오는 대목이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중략)

가만, 가만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입도 뻥긋 안 했건만 그이는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지훈이의 나스르르한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끼는 걸 보았다.

아아,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였어.

그이가 비로소 긴장에서 해방된 듯 가뿐한 소리를 냈다.>

달맞이꽃.

달맞이꽃.

소설에서 남편은 “이름을 알면 꽃이 다르게 보인다”며 도감을 찾거나 집 주인에게 물어 어떻게든 꽃 이름을 알아내 아들 지훈이에게 가르쳤다.
들꽃 지식은 남편이 주인공보다 많이 아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주눅들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편이 들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 주인공은 어디 가서 남편과 농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 지훈이가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남편은 으리으리한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켰는데, 남편 집안이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아들 용태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은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참담하다.

아들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가족은 곧바로 대형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다가라도 이 집이 내 집이라는 편안함을 맛본 적이 없다.
’ 엄마는 ‘치마폭에 안겨준 복도 누리질 못하고 조바심을 해쌓냐’고 타박한다.
‘장손을 낳아준 아들 며느리한테 이 정도가 뭐 대수냐’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 친구들이 ‘전화위복이지 뭐냐고 그이의 어깨를 치면서 하는 말은 지훈이의 회복만은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편도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남편이 계속 운동권에 머물러야 남편과 관계도 유지될 것 같은데, 한번 안락한 삶으로 돌아온 남편은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남편의 쏠림을 달맞이꽃 필 때 귀 기울이던 모습에 비유하며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절묘하게 담고 있다.

달맞이꽃이 막 피기 시작했다.
박완서 단편 '티타임의 모녀'엔 달맞이꽃이 중요한 상징으로 나오고 있다.

◇달맞이꽃 피는 소리는 어느 정도 크기?

달맞이꽃은 이름 그대로 달을 뜨는 저녁에 꽃이 피었다가 아침에 시든다.
바늘꽃과 두해살이풀로, 여름에 4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밝은 노란색 꽃이 잎겨드랑이마다 한 개씩 달린다.
저녁에 꽃이 피는 이유는 주로 밤에 활동하는 박각시나 나방 등 야행성 곤충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꽃잎이 축 쳐진 모습을 보지만 밤 8시 정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듯 싱싱한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반전을 볼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대로 달맞이꽃이 필 때 실제로 소리가 나는걸까. 필자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식물책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 달맞이꽃 피는 밤에 몇번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꽃은 피는 소리를 듣기 전에 어느새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분꽃 피는 것과 같다고 할까. 서울 시내여서, 아주 고요한 곳이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였을까.

하지만 꽃잎이 벌어지는 움직임이 있으니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지인 중에서도 “분명히 들었다”고 하는 분이 있으니 달맞이꽃 피는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크기의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법정스님이 전남 순천 불일암에 거처할 때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달맞이꽃 피는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겨울에 공터 등에 가보면 땅바닥에 잎을 방석 모양으로 둥글게 펴고 바싹 엎드려 있는 식물들을 볼 수 있다.
냉이·민들레·애기똥풀·뽀리뱅이 등이 대표적으로, 그 모양이 마치 장미 꽃송이 같다고 로제트(rosette)형이라 부른다.
그 중 잎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색으로 자라는 식물이 달맞이꽃이다.
이런 형태로 겨울을 견디다 봄이 오자마자 재빨리 새순이 나와 쑥쑥 자라는 식물이다.

달맞이꽃. 겨울에 땅바닥에 잎을 방석 모양으로 둥글게 펴고 바싹 엎드려 있다가 봄이 오자마자 재빨리 새순을 올려 쑥쑥 자란다.<BR>

달맞이꽃. 겨울에 땅바닥에 잎을 방석 모양으로 둥글게 펴고 바싹 엎드려 있다가 봄이 오자마자 재빨리 새순을 올려 쑥쑥 자란다.

달맞이꽃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아주 친근한 식물이지만 고향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남아메리카 칠레인 귀화식물이다.
하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잡고 씨앗을 퍼트려 이제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아주 우거진 숲에는 들어가 살지 못하고 사람들이 파헤쳐 공터를 만들어 놓았거나 길을 만든 가장자리 또는 경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길쭉한 주머니같은 열매 속에 까만 씨앗이 들어 있는데, 한때 이 씨앗으로 짠 기름이 성인병에 좋다고 유행을 탄 적이 있다.

요즘에는 낮에 꽃이 피게 개량한 낮달맞이꽃도 주택가 화단 등에 많이 심고 있다.
그냥 달맞이꽃보다 꽃이 좀 더 크다.
낮에 피면서 꽃이 분홍색인 분홍낮달맞이꽃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낮달맞이꽃.

낮달맞이꽃.

분홍낮달맞이꽃.

분홍낮달맞이꽃.

해피트리, '마음에 없는 소리'에서 생기 주는 반려식물로 [김민철의 꽃이야기]

 

‘마음에 없는 소리’는 김지연 첫 소설집의 표제작입니다.
작가 고향인 거제로 보이는 해안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할머니가 운영하다 휴업한 작은 식당을 이어받아 소고기뭇국과 멸추김밥을 메뉴로 개업하는 35세 여성 이야기입니다.

◇”해피트리 잘 가꾸어야 식당도 안 망할 것”

고향 또래들은 어느덧 번듯하고 안정적인 삶을 찾아가는데 화자는 ‘아무 것도 안 하지는 않았는데 딱히 무얼 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시에서 지원해 주는 청년 사업의 커트라인에 딱 걸리는 나이 만 35세지만 생일이 보름 정도 지나 지원금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식당을 개업합니다.

고향 좁은 동네엔 서로 십대, 이십대 때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 친구들과 가끔 만나 티격태격하는데, 그 친구들 중 하나가 개업 선물로 해피트리를 가져옵니다.

<개업 날 커다란 화분을 들고 나타난 화영은... (중략) 화영이 가지고 온 식물의 이름은 해피 트리라고 했다.
너무 재미없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과업을 떠맡은 기분도 들었다.
길을 걷다보면 완전히 시들어버린 화분들이 가게문 앞에 놓여 있고 유리문에는 ‘임대 문의’라는 종이가 붙어 있는 광경과 종종 마주칠 때가 있었다.
(중략) 그 장면을 떠올리자니 해피 트리가 시들지 않도록 잘 가꾸어야만 식당도 망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겨났다.>


해피트리(행복나무). 잎 가장자리가 매끄럽고 물결 모양을 이루고, 굴곡이 촘촘한, 울퉁불퉁한 수피를 갖고 있다.

친구들은 종종 찾아와 김밥을 포장해가고 여기저기 전화해 손님을 모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식당은 침체된 재래시장에 위치해 손님이 많지 않았고 감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유동인구는 더 줄어듭니다.
하루종일 오롯이 해피트리와 식당을 지키는 날도 있습니다.

<식당 일은 해피 트리를 돌보는 일과 함께 돌아갔다.
어느 날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어 해피 트리와 나만 식당을 지키기도 했다.
그래도 해피 트리가 무사했으므로 식당도 망하지 않았다.>

개업날 해피트리를 가져온 친구 화영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대도시로 이사 갑니다.
화영은 이사 간 후에도 가끔 전화해 “보고 싶다”고 하는데, 화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지만 그 친구가 보고 싶어집니다.

소설에 표현이 나오진 않지만 화자가 해피트리를 나름 아끼며 잘 돌보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겉흙이 마를 때마다 물을 주는 등 많은 공을 들였을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고 거기엔 아주 많은 공을 들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해피트리는 화자의 반려식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친구가 ‘마음에 없는 소리’하듯 개업 선물로 보냈을지 모르지만 해피트리가 세상을 함께 견디는, 생기를 주는 반려식물이 된 셈입니다.

해피트리(행복나무). 수피에 굴곡이 있고 잎에 톱니가 없다.

큰 사건이 생기는 것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소설은 술술 읽힙니다.
담담하면서도 가벼운 농담과 능청이 나와 재미있습니다.
요즘 청년 세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의 장점입니다.
중간에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들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살다가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하는 것이 일종의 에티켓,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닐까 싶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상심이 크시겠습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영혼 없는 소리 하지 마라”는 말을 들을망정 마음에 없는 소리는 세상 사는데 윤활유 같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단편 ‘작정기’로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이번 책 ‘마음에 없는 소리’에는 등단작을 비롯해 2021년, 2022년 젊은 작가상을 받은 ‘사랑하는 일’, ‘공원에서’ 등 9편을 담았습니다.
그중 ‘마음에 없는 소리’를 택한 것은 해피트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제일 마음에 가는 소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굴 드라이브’도 고향에 내려가 주변 사람들과 얽히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과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등엔 레즈비언 커플 얘기도 나옵니다.

◇해피트리 수피엔 굴곡이 촘촘

소설에 나오는 해피트리는 녹보수와 함께 사무실이나 식당, 거실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관엽식물 중 하나입니다.
해피트리는 행복나무라고도 하고, 녹보수는 ‘녹색의 보석 나무’라는 뜻입니다.
근래 도입된 나무들인데, 식물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전에 유통업자들이 이름을 잘 지어서인지 승진이나 식당, 카페 등 개업 선물로 많이 쓰는 나무입니다.
금전수, 고무나무 종류도 개업 선물로 많이 쓰는 식물입니다.

해피트리와 녹보수는 비슷하게 생겨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해피트리와 녹보수는 전혀 다른 나무입니다.
해피트리는 두릅나무과, 녹보수는 능소화과여서 과(科) 자체가 다릅니다.
과가 다르다면 꽃과 열매 등 생식 방법이 전혀 다른 나무라는 뜻입니다.

녹보수.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어서 뾰족뾰족하고, 수피는 잔무늬가 없지 않지만 매끄러운 편이다.<BR>

녹보수.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어서 뾰족뾰족하고, 수피는 잔무늬가 없지 않지만 매끄러운 편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먼저 잎 모양을 보는 것입니다.
해피트리 잎은 가장자리가 매끄럽고 물결 모양을 이루지만 녹보수는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뾰족뾰족합니다.
그러니까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으면 해피트리, 있으면 녹보수입니다.

잎 모양을 보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수피, 특히 나무 아래쪽 수피를 보는 것입니다.
해피트리는 굴곡이 촘촘한, 울퉁불퉁한 수피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녹보수 수피는 잔무늬가 없지 않지만 매끄러운 편입니다.
그러니까 수피에 잔 굴곡이 촘촘하면 해피트리, 골곡 없이 매끄러우면 녹보수입니다.

인터넷 등을 검색하다보면 해피트리에 꽃이 피었다는 글과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제가 본 것은 전부 녹보수 꽃이 핀 것이었습니다.
녹보수는 국내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꽃이 피는데, 능소화과 꽃답게 능소화 비슷한 연노랑색 꽃이 피더군요. 해피트리는 두릅나무과여서 두릅나무처럼 잎자루 기부가 부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대·아열대 지역에서 핀 꽃 사진을 검색해보면 정말 두릅나무 꽃과 비슷한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