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침묵과 최고의 대화


대화만 하면 피곤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대화에서 공감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자신의 얘기를 하느라 상대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환반응’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대화를 ‘나’로 전환시켜 자신의 얘기만 하는 것이다.
가령 “요즘 몸이 좀 안 좋아”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도 안 좋은데!”라고 말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바꿔 버리는 이런 식의 대화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좋은 대화는 “어디가 안 좋아?”라고 물으며 상대의 마음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과 문턱이 높을 때, 유독 사람들이 점집을 많이 찾던 이유 역시 꼭 그럴 듯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점쟁이야말로 내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로를 받는다.
그러니 대화 중 잘못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

늘 징징거리는 사람은 정작 타인의 울음은 듣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가 너무 시끄러우면 타인의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건 적당한 양의 침묵이다.
대화에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상대가 나의 어떤 말을 ‘기억’하느냐다.
말없이 친구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 대화가 끝날 무렵 친구에게 “오늘 조언 고마워. 정말 도움이 됐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친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가 울 때 손을 잡은 게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대화에서 침묵은 제3의 청자다.

“내가 이야기꾼이라면 그건 내가 듣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꾼은 전달자라고 생각돼요.”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 나는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을 떠올린다.
대개 좋은 이야기꾼들은 잘 듣는 사람이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결국 상대도 침묵에 깃든 내 마음을 듣게 된다.
잘 듣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구분하는 법

midjourney·조선디자인랩

midjourney·조선디자인랩

결혼 생활의 힘듦을 가장 유머러스하게 말한 사람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다.
“결혼은 힘든 거야.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다고! 27년간 감옥에서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그도 출소 후 6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했다고!” 알랭 드 보통은 ‘독신에는 외로움’이 ‘결혼에는 괴로움’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처럼 인생은 외로움과 괴로움 사이 어느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녀가 만나 한평생을 해로한다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산책하는 공원에서 청춘 남녀들보다 아름다운 건 두 손을 잡고 느리게 걷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해질 녘 그 모습을 보면 사람도 좋은 풍경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북 콘서트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좋을지를 묻는 분을 만났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마다 ‘좋음’의 기준이 다르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는 거창한 말보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을 본다고 말한다.

운전할 때 양보해 주는 사람, 문을 열 때 뒷사람이 오는지 확인하는 사람, 식당에서 일어설 때 의자를 밀어 넣는 사람, 비 오는 날 상대에게 우산을 더 기울여 주는 사람, 약속 시간에 5분 먼저 오는 사람, 헤어질 때 한 번쯤 뒤돌아봐 주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잘하는 사람. 그러나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에게만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팁을 더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는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오직 그 사람의 ‘행동’만 보라고 충고한다.
나쁜 행동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질 때라야 좋은 사람에 대한 안목이 생긴다.

오래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에 정말 중요한 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배웠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거대 담론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합이 우리의 인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먹는 비만 치료제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인류 역사에 비만이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중국 시안에 있는 양귀비 동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풍만한 것이 미의 기준인 시대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아이가 토실토실하면 “복스럽다” “장군감이다”고 칭찬했다.
1983년까지 몸무게 등이 주요 기준인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려 큰 인기를 끌었다.

▶비만 치료제가 처음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것이 1959년이었다.
나비약으로 잘 알려진 펜타민은 뇌 식욕조절 중추에 작용해 식욕을 덜 느끼거나 포만감을 증가시키는 약물이었다.
그러나 의존성 위험에다 부작용도 커서 단기(4주 이내) 처방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엔 장에서 지방 분해를 차단하는 지방흡수 억제제가 등장했다.
그러나 효과가 크지 않았고 대변실금 등 부작용이 있었다.
2008년 나온 백영옥 소설 ‘스타일’에서 주인공 31세 여성은 하필 애인을 만났을 때 이 약 부작용이 나타나 낭패를 겪는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는 당뇨약 임상시험 중 시험 대상자 체중이 감소하는 ‘부작용’을 발견했다.
‘GLP-1 유사체’가 체내 인슐린 분비를 촉진할 뿐 아니라 포만감을 주어 식욕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회사는 곧바로 임상시험에 들어가 2014년 주사 방식의 비만 치료제 ‘삭센다’를 FDA로부터 허가받는 데 성공했다.
현재 국내 비만 치료제 시장 1위 제품이다.
투여 주기를 늘린 ‘위고비’도 개발했는데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등이 사용하며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노보 노디스크 성공에 글로벌 제약사들이 앞다퉈 이 ‘초거대 시장’에 뛰어들었다.
일라이릴리도 비만 치료제 최종 임상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는 22일 먹는 비만약 임상 2상 결과를 발표했다.
효능은 현재 나온 비만약과 비슷한데 기존 방식과 달리 먹는 약 형태라 훨씬 편리하다는 장점을 내세우고 있다.

▶인류가 약으로 비만을 다스리는 시대가 임박한 것일까. 인류는 원시 시대부터 기아에 적응하느라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꺼내 사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비만 치료제는 수많은 인체 작용 중 한두 가지 정도에 영향을 주는 수준이다.
비만 치료제의 부작용도 줄었다고 해도 아직 만만치 않다.
의료계는 아직 약물만으로 인간이 적정 체중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역시 적절한 음식 섭취와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챗GPT는 질문이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동료 작가와 챗GPT가 쓴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번역가 선배가 툭 던진 ‘침몰론’이 떠올랐다.
우리가 타이태닉 호의 악사들처럼 모두 가라앉는 중이라는 것이다.
챗GPT의 등장 이후 회계사, 변호사, 기자,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이 대체되거나 사라질 거라는 기사를 보며 7년 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의 충격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그랬다.
영화관은 이제 끝났다고 했지만 이후 영화산업은 훨씬 더 발전했다.
19세기에 사진이 발명됐을 때, 화가들 역시 회화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절망했다.
그러나 똑같이 재현해 그리는 것을 미덕으로 삼던 회화는 ‘재현’에서 ‘표현’으로 넘어갔다.
오히려 사진 발명 이후,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 다양한 심상의 표현이 나타나며 미술시장은 더 진일보했다.

챗GPT가 나타나자 많은 직업군의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문제는 챗GPT와의 경쟁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더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인간이 말과 달리기를 해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 위에 올라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들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대한다고 말했다.
검색의 시대에 사색은 점점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추어선 안 된다.
챗GPT의 핵심은 질문이며 그것의 기반이 곧 ‘사유’이기 때문이다.
질문의 밀도와 창의성이 좋은 답변을 만든다.
덧붙여 우리에겐 답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성의 의무가 있다.

기계가 많은 것을 대체하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핸드 메이드’라는 라벨이 붙은 제품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더 중요한 건 역설적으로 “무엇이 변하지 않는 것인가!”이다.
전자계산기의 등장 이후 사라진 건 ‘주판’이지 ‘수학’이 아니다.
형태는 변해도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프로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10년 전, 자기 분야에서 가장 일 잘하는 남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 말미에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 질문을 던졌다.
흥미롭게도 거의 모든 사람 답이 ‘시간’이었다.
하루 24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사람에 따라서 시간의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프로는 시간을 잘 경영하는 사람이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의 정신 사나운 발밑을 상상해보라.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발밑도 비슷하다.
내가 여러 분야 프로들을 인터뷰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노력보다,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훨씬 더 절박하다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가로 살기 위해 처음 필요한 건 재능이고, 이후는 체력이라고 말했다.
고치고 고쳐서 더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한 번 더 고치는 사람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할란 엘리슨의 말처럼 “관건은 작가 되기가 아니라 작가로 살아가기”다.

쉽게 쓴 것처럼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쉽게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퇴고와 연습이 필요한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이라는 단어는 프로가 듣는 최고의 상찬 중 하나다.
예전에는 열정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돌진하는 ‘뜨거운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제 열정이 포기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서늘한 인내심’이라는 걸 안다.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원치 않는 많은 글을 쓰고, 원하는 옷을 입기 위해 모델은 혹독한 식단 조절을 한다.
“영감을 찾는 건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는 소설가 필립 로스의 말처럼 프로는 ‘그냥’ 하는 사람들이다.
‘그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열정의 다른 이름인 ‘인내’가 만든다.
좋아하는 곳에 가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더 많은 곳에 기꺼이 가 본 사람, 우리가 그들을 프로라 부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지난주 공원 벤치 앞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언쟁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 아이 중 한 명은 중재 중이었고 두 명은 계속 언쟁을 이어갔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내가 트라우마가 생겼어!”라는 말이었다.
‘스트레스’라는 말까진 이해가 됐지만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다소 놀라웠다.
요즘은 어린이들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참 거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심리 상담에서나 들어볼 용어들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일상어처럼 사용되는 요즘이다.
가스라이팅, 공황장애, 트라우마 같은 용어들 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수많은 심리적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삶에서 벌어지는 안 좋은 상황을 모두 상처(피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아픈 걸 모두 상처로 정의하는 순간, 나는 치료 대상 즉 환자가 되기 때문이다.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의 책 ‘그렇다면 정상입니다’에는 ‘생활기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생활기스는 보통 중고품을 거래할 때 쓰는 단어로 망가진 것이 아닌 정상 작동되는 물건을 말한다.
우리도 살다 보면 상처(기스)의 순간을 수시로 만난다.
인생에서 작은 상처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은 그저 덕담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울퉁불퉁한 인생에 꽃길은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음의 생활기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증상이 치명적이지 않다면 “이런 일로 더 이상 병원에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치료자로서 그 마음이 백번 이해됐다.
윤석중의 동시 ‘꽃밭’은 꽃밭에 넘어진 아이가 정강이에 묻은 새빨간 피를 보고 ‘으아’ 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한참 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이 피가 아니라 ‘새빨간 꽃잎’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살다 보면 상처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도 찾아온다.
피가 꽃이 되는 마법처럼.

달리기 위해 멈추고,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농사를 지은 땅의 지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쉬는 땅을 휴경지(休耕地)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인삼밭이 그렇다.
인삼을 재배하고 나면 몇 년은 휴경한다고 한다.
‘해거리’라는 말도 있다.
과실이 한 해에 많이 열리면 그다음 해에 결실량이 현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데,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처럼 우리가 아는 많은 나무가 해거리를 한다.
해거리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천천히 한 해를 쉬는 ‘나무들의 안식년’인 셈이다.

하지만 과실을 수확해야 하는 농부 처지에선 수확량 감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해거리를 방지하고자 이들이 하는 일이 ‘가지치기’다.
썩은 가지는 물론이고 복잡한 잔가지와 큰 가지를 ‘미리’ 잘라 병충해를 막고 성장을 좋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지치기는 나무를 위해 인간이 해주는 ‘나무들의 디톡스’다.

‘해거리’와 ‘가지치기’는 ‘힘과 쉼’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양면의 지혜다.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멈추고, 더 가득 채우기 위해 비우는 자연과 인간 모두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뛰느라 이마에 흐르던 땀이 눈가에 맺혀 흐르면 먼 곳에 있던 사람 눈엔 눈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땀과 눈물이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 놓이는 위치와 자리에 따라 냄새나는 음식물 잔반도 귀한 퇴비가 된다.

힘과 쉼 역시 그렇다.
얼핏 정반대 성질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힘을 빼고 천천히 멈춘 상태가 ‘쉼’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성장을 위해 힘을 내고, 달리고 나면 반드시 힘을 빼야 한다.
이것이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와 가지치기를 하는 성실한 농부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다.
가지치기하는 농부의 마음은 지금 휑하게 잘린 텅 빈 가지에 있지 않다.
그들 눈은 더 많은 열매가 달린 미래의 나무를 본다.
열심히 노동한 후, 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천지창조 후 신 역시 “보기에 좋았다”를 외치며 하루를 쉬었다.
신에게조차 휴식은 중요했다.

깊이에서 오는 충만감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조금만 덜 먹을 걸!”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폭식 끝에 남는 건 소화제인데도 멈추지 못한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후행적이다.
충분하다는 느낌을 넘어 만족하는 순간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찬다.
폭식, 폭음, 과로 역시 충분함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생존과 적응을 위해 ‘불안’을 느끼는 능력이 진화된 것에 비해, 만족감은 ‘안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애써 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분함에 대한 감각을 깨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니처럼 불필요한 기관을 달고 사는 건 진화의 느린 속도 때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양껏 먹어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원시인의 뇌가 아직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맹수에게 물어뜯길까 봐 경계하는 건 원시 시대에 어울린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을 벗어나, 반대편에 있는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기술이다.

충분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선 나를 타인과의 비교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할 건 비교의 특징이다.
우리는 주로 직업이나 나이,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시기한다.
작가는 작가를, 정치인은 정치인을 시기한다.
걸인 또한 부자보다는 자신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걸인을 시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기적으로 비교 지옥의 대명사인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불만족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독서가 끝나면 우리는 책을 덮는다.
완벽히 문이 닫힌 것이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둔 채 끊임없이 새 창을 여는 인터넷과 책의 물성은 다르다.
종일 검색해도 새로운 최저가, 초특가 티켓이 나오는 ‘검색’과 달리,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만족감은 닫힌 세계가 약속하는 ‘사색’의 만족감이다.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충분함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무엇이든 쏟아지는 시대의 처방은 닫는 것이며, 그 답은 넓이가 아닌 깊이에 있다.

고통을 누르는 다른 고통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김연수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는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커서 치과 의사에게 통증이 있다고 거짓말한 후, 멀쩡한 생니를 뽑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생니를 뽑아내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운다.
그는 온 몸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가 떠난 뒤 남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만성적 이명으로 고통 받던 선배가 흥미로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명 때문에 늘 굶주린 모기와 함께 동거하는 음울한 기분이었는데 그만 대상포진에 걸렸다는 것이다.
몇 주를 지독히 아프고 난 후 생각하니, 몇 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이명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곧장 이비인후과에 달려가 다시 검사를 한 선배는 의사에게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상포진의 부작용으로 이명이 나은 걸까?” 그가 한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문득 고통이란 더 큰 고통으로만 잊히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질적인 견비통은 찌르는 치통 때문에, 오랜 이명은 후벼 파는 편두통 때문에 묻히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심한 복통을 느끼면서 두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고통이란 복수가 아닌 철저히 단수이며 가장 강한 것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중 어느 것이 더 아플까. 명확한 건 1기에서 4기까지 분류하는 암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별이나 배신의 상처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니를 뽑은 남자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치과 의사는 마취 없이 이를 뽑았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남자의 이는 멀쩡하지 않았다.
실연의 고통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뿌리부터 썩은 치아라 뽑아도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신적인 고통에는 오로지 육체적 고통이라는 한 해독제만 있다”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할 때, 집 밖을 달리거나 집 안을 청소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달리기는 숨이 찰수록, 집 안은 더러울수록 효과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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