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강자이고 무엇이 약자인가!?

끝까지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장애인의 몸으로써 마물들을 무찌르는 베르세르크 가츠.

노골적으로 말하면 약육강식이 아니다 강육약식이 영원불멸한 강자의 진리이다.
강자가 약자의 고기를 먹는 게 아니라 약자가 강자의 피와 고기에 의존하는 게 진정한 삶의 법칙이다.
그렇기에 자기의 피와 고기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강자이고,
그런 강자의 피와 고기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약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강자가 갑이고 약자가 을인 것이다.
이것이 강자와 약자의 영원불멸한 진리이다.
만약 약육강식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이것은 강자와 약자가 거꾸로 된 가진 것 없는 약자인 기득권들이 강자 행세하는 빙의령 기생충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약육강식한다는 그런 개념은 진정한 강자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는 기생충들만의 망상이고 마귀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무엇이 강자이고 무엇이 약자인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강자는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달성하고 가진 갑이고 약자는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가지지 못한 을이라는 사실은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몰라도 영원불멸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또는 물질적으로 가져 나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 노력은 아주 올바른 노력이다.
그럴 노력을 하지 않을 때 범죄자 범법자가 되어서라도 강자 행세를 하려는 게 사람들의 부정적인 본능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강자가 모든 분야에서 강자는 아니고 약자도 모든 것에서 약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물질적으로는 갑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을일 수도 있고 육체적으로는 갑일 수 있어도 물질적으로는 을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갑과 을의 관계는 기득권처럼 고정되어 불변한 게 아니라 상황과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동된다.
결국 한 분야의 강자가 모든 분야의 갑이 될 수는 없고 또 다른 분야에서는 을이 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니 절대적인 강자도 없고 절대적인 약자도 없는 게 삶의 법칙이라 말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보자면 "빙의"라는 개념을 순화시켜서 사용하자면,
빙의 당하는 사람이 방송인이고 연예인고 빙의하는 사람들이 시청자이고 연예인의 팬이다.
곧 빙의 당하는 자가 곧 갑이고 빙의하는 자가 곧 을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진리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아마 현대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노골적으로 빙의하는 자는 빙의 당하는 자에게 의지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빙의 당하는 자에게 의지하는 자를 긍정적인 팬이라 하고 빙의 당하는 자에게 의존하는 자를 안티팬이라고 한다.
나름 연예인들의 안티팬도 연예인들에게 악플 달며 빙의하고 의존하는 약자인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면,
과연 인싸라는게 무엇인가!? 인싸가 소위 인파이터고 파이팅을 하게 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라고 규정한다면,
두들겨 맞는자가 인싸인가 두들겨 패는자가 인싸인가!? 정답부터 말하자면 인싸라는건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두들겨 맞는자를 의미한다.
두들겨 패는 자가 인싸가 되는 게 가능한가!? 그 누구도 두들겨 맞기를 원치 않는다.
인싸라는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대신 기꺼이 두들겨 맞을 수 있는 자 그것이 진정한 인싸인것이다.
인싸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두들겨 맞으므로써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대신 두들겨 맞는 자가 진정한 인싸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두들겨 패는 자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기 대신 두들겨 맞는 자들을 원한다.
사람들 대신 두들겨 맞을 수 있는 자가 진짜 영웅이고 진짜 인싸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스타란 무엇인가!? 스타란 노골적으로 말해 타인의 저주를 달갑게 받고서도 되려 그 사람을 축복해 줄 수 있는자가 진정한 스타다.
보통은 저주와 멸시를 받으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보이지 않게 복수하며 두고 보자 하며 보복을 한다.
그런 자는 스타가 될 수 없다.
저주와 멸시를 받아도 인생의 쓴맛을 달가움으로 받아들이며 마치 눈물을 머금고 웃음 지으며 사람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자 이런 자가 진정한 스타다.
인생의 쓴맛을 겪고 다른 사람 또한 자기와 다르지 않게 삶의 시린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알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진심으로 사람들에 고통에 공감하며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한 번 건넬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진정한 스타다.

강자와 약자에 대한 또 다른 관념에는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가!? 강한 자가 살아남는가!?"라는 것도 있다.
정답은 단연코 자명하다.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면 배트로얄 우승자가 최강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배틀로얄 우승자를 강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배틀로얄 우승자가 강자라면 강함의 극한의 상징인 영웅이란 개념이 아주 비참해진다.
그런 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자가 영웅이라면 그 강함이 얼마나 비참해질까!? 그런 자들은 강한 게 아니라 그냥 괴물처럼 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센 것이 강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버리지 않고 강해야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의 본질을 벗어난 자는 강한 게 아니라 그냥 무지막지하게 괴물처럼 세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의 본질을 벗어난 괴물은 무지막지하게 쎌 지언정 절대 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괴물은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타가 운 좋게 나쁜 자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괴물이란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쁜 놈들도 잡아먹지만만 선하고 착한 선량한 자도 거침없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죽는 게 겁나서 사람을 잡아먹고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를 괴물이라고 하고 당연히 이렇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게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람답게 죽어야 할 대 함께 같이 죽어 줄 수 있는 용기 그런 게 진정한 강자의 진정한 미덕 아닐까!?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강자가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있으려는 강한 마음과 의지로서 자신의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괴물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다.
고로 겉으로 봤을 땐 완전히 나약해 보이지만,
그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살아남아 뭔가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강자이기 대문에 살아남은 것이지,
살아남았기에 강자 아닌 것이다.
살아남았으니 강자라는 말은 곧 그 사람의 강함과 치열한 노력을 부정하는 말이다.
살아남았기에 강자는 많다.
괴물이 되어서라도 살아남은 것도 나름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괴물을 강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괴물은 쎄다고 말하지 절대 강한 자라로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살아남기 위해 이미 사람의 마음을 버렸기 때문이다.
진정한 강자란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남은 이후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람 자기 자신으로써 존재하는 자를 진정한 강자,
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남은 자는 또 다른 괴물 악한으로 변모하기도 하는 게 세상사의 변하지 않는 인지상정이다.

총론

흔히들 약육강식이고 적자생존이 강자의 요건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편협된 개념이다.

약자의 고기를 강자가 먹는다 한다면,
사람이나 동물 몸에 기생하는 세균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기생충은 그럼 강자인가!?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생존하지 못한다.
하지만 숙주는 기생충이 전혀 필요 없다.
과연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일까!? 이런 관계는 비단 사람 몸과 기생충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것에서 발현된다!! 그렇다고 당연히 약자를 비난하는 건 아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모든 분야의 절대적인 강자도 없고 모든 분야의 절대적인 약자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약자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강자 행세하는 인간의 본질을 벗어난 약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약자가 스스로의 약함을 부정하고 쎈척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괴물이 되었을 때,
그 괴물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선한 자 행세하고 영웅 행세를 하게 된다.

약자가 스스로의 약함을 받아들인다면 진정으로 강해져서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스스로의 약함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자기의 괴물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선한 행세하며 영웅 구원자 행세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가짜 영웅들이 영웅 행세를 할 때 진짜 영웅들은 비참하게 죽는다.
마치 전쟁에서 자기 동료조차 집 밟고 비겁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자가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웅 대접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짜 영웅들이 초개와 같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던진 때 비겁한 간신배들은 영웅의 목숨을 잡아먹고 단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영웅 대접받는다면 누가 대의와 정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불사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이 영웅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마귀 세상이며 기득권 세상이다.
세상이 기득권같이 불의로 가득할 때 진짜 영웅은 죽고 가짜만 살아남아 영웅 행세를 하게 된다.
정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의 세상이다.
누가 진짜 영웅이고 누가 진짜 구원자인지 스스로 각자의 책임하에 오로지 각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누구 노래 따라 가짜와 짜가가 판치는 세상이다.

조심조심.

노자의 도덕경 - 도덕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열쇠이다.
- 삶의 시크릿!!

과연 절대적인 악이란 존재하는 게 가능할까!? 절대적인 악이 존재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파멸로 이끄는 게 가능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그 누구도 그런 파괴자가 되어 모든 악명을 짊어질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고 훌륭하고 위대한 영웅이 되고 싶지,
누가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절대악이 되고 싶겠는가!? 만약 그런 자가 존재한다면 나는 절대악이고 모든 것을 파기한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고 누군가가 자기의 악행을 간절히 멈춰주길 바라는 관심 종자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절대적인 악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전제하에 사람의 마음엔 누구나 선하고 올바른 마음이 조금씩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과연 모든 인간다움을 버리고 괴물로써 최강자가 되는 게 가능할까!?

모든 인간다음을 버린다면 괴물로서의 최강자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모든 의식을 잃어버린 지능이 없는 크리처가 될 뿐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의 진화와 발전에 대한 예기다.
노골적으로 말해 인간이 도덕성을 잃어버린다면 인간의 진화와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외계인이 되거나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괴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파괴력만을 강화시키는 게 진정한 단련이고 강함일까!? 과연 발전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진보는 무엇이고 진화란 무엇인가!?

인간이 발전하고 진보하고 진화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더더욱 인간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고 단순히 힘과 능력 파괴력만이 세지는 건 그저 돌연변이일 뿐 진정한 진보와 발전과 진화가 아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을 잃으면 결국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신선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신선은 사람이 아닌가!? 만약 신선이 사람이 아니라면 신선은 그저 돌연변이 병자에 불과하다.
신선이 더더욱 사람답게 도를 닦고 수행을 해서 인간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하여 더더욱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을 때 신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신선은 신선이 아니라 신선 행세하는 돌연변이 요괴에 불과한 것이다.
선인 도인 도사 부처 여래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이 아닌 사람이다.
사람이 도를 닦고 수행을 하는 이유는 더더욱 사람답게 돼서 자기와 같은 시련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사람으로서 돕기 위함이지,
인간의 허물을 벗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서 수련과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수련과 수행을 하며 깨달았다며 자기는 이제 신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다 정신이 병든 자들이다.

사람은 영원불멸히 사람일 뿐이지 절대 신이 될 수가 없다.
다만 수련과 수행을 통해 창조주의 신성을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그리고 신선 인 도인 도사 부처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신은 아니다.
아주 지극히 더더욱 사람다운 사람 인간 다운 인간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도덕경의 요지이다.
사람이 도덕을 잃고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무한대로 진화 발전할 수가 없다.
사람이 도덕을 지키고 더더욱 사람다워져야지만 사람으로서 신선 선인 도사 도인 부처가 되는 것이지,
도덕을 잃으면 그저 겉만 그럴싸한 요괴로 전락하고 만다.
신선과 부처가 영원불멸히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불멸히 무한대로 수련 수행을 하여 자기의 공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신선과 부처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그 순간 더 이상 수련과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 발전시킬 수가 없다.

세상 살이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으면 겉만 화려한 요괴처럼 신행세하며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하며 기득권 행세나 할 뿐 진정으로 사람을 다스릴 수도 없고 진정으로 성장 발전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선도할 수도 없다.
사람이 도덕성과 사람다움을 잃으면 이미 그 사람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왜냐면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절대악이 될 수도 없고,
사람 내면의 본질적인 의로움의 씨앗은 사람의 창조 때부터 영원불멸히 제거가 불가능하기에,
아무리 공포와 악행으로 사람 위에 군림한 악한이라도 결국 자기 내면에 영원불멸히 절대로 제거될 수 없는 의로움의 씨앗으로 인해 결국 자괴감을 느끼고 스스로 괴멸하게 되거나 자기의 악행을 끝내줄 의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악한이란 잠시 흥하리라도 결국엔 멸망하게 되는 게 근본 이치이니 미리미리 자기의 사람다움을 지키며 올바르게 노력해 나가는 게 오래도록 승승장구하는 비결이고 삶의 시크릿이다.
이것이 도덕경이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개개인 고유의 잠재된 스타일이다.

과연 앞날은 정해져 있을까요!!? 창조주 입장에서 전지전능함으로 미래를 보았을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창조주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운명이라는 이치와도 같아요!! 일종의 예언이죠!! 창조주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같은 예언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긍정적으로 성취되던 부정적으로 성취되던 그 성취된 예언의 특성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엄청나게 노력하면 안좋게 일어날 예언이라도 긍정적으로 성취될 수도 있고 더 노력하면 불가능한 예언도 기적적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런게 사람의 노력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안좋은 예언이라도 인간의 노력으로 긍정적으로 성취된다면 창조주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미 예언은 성취되었으므로 장초주의 선하신 목적은 달성하신것이니까요!!

인간적으로 예기하자면 사람은 확실이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기 마련이죠!! 반드시 한번은 죽지만 어떻게 죽느냐는 그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달라지고 그럼으로 나름 자기의 죽음을 본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노력을 하며 살면 고통없이 정말 뿌듯하고 행복하게 지복속에서 하늘나라로 갈수 있고 부정적인 노력을 하면 고통과 회환 속에 지하로 무너저 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죠!! 자기 노력이 당당하다면 굳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던 본인만 스스로 결백히 당당하다면 최선을 다해 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대로 순리대로 갈데로 가면 됩니다.
사는게 걱정이지 죽는 게 걱정일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그저 삶의 결과물에 불과하니까요!! 자기 살아온 삶에 따라 죽음의 결과물이 다 달라집니다.
한치 오차도 없이 변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죽을 지 알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도 그 사람이 언제 죽을 지 창조주 본인조차 모릅니다.
다만 이 사람이 이런 행위를 해왔고 이런 행위를 아직도 하고 있으니 아마도 언제 쯤에 이런 죽음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겠구나 하고 예측하는것입니다.
그 예측의 정도가 사람이 아닌 창조주의 예측이기 때문에 그 정확도가 클뿐이지 창조주도 딱 날자와 시간을 쪽집게처럼 찝어서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쪽집게 같은 사망선고는 예측이 아니라 그냥 고의직인 마귀의 암살일 뿐이지 예측도 예언도 아닙니다.

죽음이란 삶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므로 죽음은 자연적으로 죽을 때가 되면 찾아옵니다.
그저 죽음에 신경 끄고 최선을 다해 사는데 집중해야합니다.
죽음은 삶의 결과물일 뿐이고 언제 어떻게 올지도 창조주조차 정확히 모릅니다.
그저 신행세하는 무당 점쟁이들이나 아는척 할 뿐이지요!! 그러니 삶에 방해가 되게 죽음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고 집착하는게 인생을 낭비하는거고 그것이 더 심해지면 아!! 참 먹고 살기 바쁜데 아 사람은 정말 한가해서 삶에 대해 장난하고 있구나 하고 오해같지 않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깨어서 경계해야 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요!?

선천성과 후천성이 있지요. 누구나 선천적으론 자기답게 훌륭하게 완벽하게 태어납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이 완벽하게 순수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유지요. 그런데 후천적으로 잘못해서 변질되고 타락합니다.
그런 사람은 타고 나느니 천재니 어쩌니 하며 세상 탓만하고 남탓만하고 노력하지 않으니 선천적인게 더더욱 퇴색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됩니다.
완전히 세상에 쪄들게 되는거죠. 운명은 각자의 스타일이에요. 자기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으면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운이 좋아지면서 일이 잘됩니다.
운명이란 한마디로 각자의 정해진 완성된 또는 만들어가는 스타일일 뿐이지 억지로 하게 하고 억지로 못하게하는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운이 좋아지려면 자기 스타일을 알아야 해요.남의 스타일이 아무리 근사해도 그것이 자기의 스타일이 아니면 우스꽝스러울뿐이고 되려 더 재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타일을 아는 방법은 mbti나 사상채질 등 여러가지를 참고 할수 있습니다.
자기 본연의 스타일을 알때 선천적인게 후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나며 작용합니다.

운명이란 각자의 스타일이고 자기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지 알면 운명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용기가 필요하죠.

부정적인것과 긍정적인것은 한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정적인것을 제거하면 긍정적인게 살아날 줄 알고 착각하는데 부정적인것은 긍정적인것의 거름입니다.
부정적인걸 받아드리고 반성해야 그것이 거름이 되서 긍정적인것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부정적인것에 대해 결벽증이 있어서 더럽게 여기고 혐오하고 멀리하고 제거하려고만하지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업보가가 거름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하게 하고 그로인해 긍정적인 열매를 맺을수가 없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겁니다.

미래는 무한대입니다.
무한대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물론 정해져 있는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고 남자는 영원히 남자고 여자는 영원히 여자고 본인은 본인 그대로 영원히 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것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무한대의 진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사람은 언젠가 괴물이되고 외계인이 될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해지는게.무슨 소용이고 능력있는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면 이미 모든걸 잃어버린겁니다.
왜냐면 사람은 철저히 사람일때만 무한대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다 자기 노력하기 나름이고 영원히 각자의 행위대로 공짜없이 그대로 받는겁니다.
그런게 영생의 공정한 시스템입니다!!

무엇을 할때 힘들다는것은 그것이 자기 스타일에 안맞는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이런 운동을 하는데 너무 힘들다 그럼 운동 방법이나 강도 운동 종류 스타일을 변경해야 하는겁니다.
또는 자기가.어떤 스타일로 뭔가를 하는데 그 스타일이 왠지 힘들다 그럴땐 자기 그타일을 점검하고 변경해야 합니다.
과연 이게 내가 아는 내가 맞을까!? 나의 성격에 맞을까 !? 이렇게 자기 스타일을 점검하고 검증해야됩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 근사한 스타일 따라가단 죽도 밥도 안되고 무진장 힘들기만합니다.
자기 스타일을 알고 추구해야죠. 모든면에서. 그래서 요즘에 뜨는게 mbti 적성검사 사상체질 사주팔자 뭐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이 스타일이란 것이 운명과 관련되 있어서 자기 스타일을 알고 올바르게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면 자연스럽게 운명의 올바른 흐름을 탈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타일의 집착하기도 하는거죠. 근데 자기 스타일이 아닌 남의 스타일을 그져 흉내내는거라면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죠. 자기는 자기 운명 자기 스타일이 제일인것이거든요. ^^

사람이 노력해서 자격이 주어지고 준비가 됬을때 환경이 만들어지지 환경이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면 기득권이 되는거고 탐관오리로써 백성들의 피나 빨게 되는것입니다.

운명이란 각 사람 본연의 스타일이고 사주팔자란 각 사람의 환경일뿐입니다.
사람이 노력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뿐이지 사주팔자란 환경이 그 사람 운명을 좌지우지 할수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의 사주팔자를 극복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합니다

모든것이 노력없이 되는것은 없습니다.
운이 좋은것 같은 행운 축복이라도 본인도 알지 못하는 본인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겁니다.
모든것이 다 노력한데로 될뿐 공짜는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이죠!! 단 조심해야할것은 망할 노력을 하면 반드시 망하고 흥할 노력를 하면 반드시 흥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노력대로 된다는게 황극의 진리이자 술의 이치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운를 실력이라 할수는 없다.
운조차 노력이다.
"

사람들은 좋은 세상이 도래하고 의로운 세상이 도래하며 자동적으로 자기도 좋게 의롭게 되는줄 착각하는데 아무리 의롭고 선한 세상이 도래하여도 올바른 노력을 하지 않는자는 그 이전보다 더더욱 타락하고 더 망가지게 되는법입니다,
세상이 밥먹여주지는 않습니다.
노력없인 아무것도 안되는것 또한 영생의 진리!! 올바르게 노력하는자들이 더 노력해가고 진정으로 이긴자들이 더 이겨가고 진짜로 가진자들이 더 가져 나간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여기서 가져나간다는 건은 비단 물질적인것만을 의미하는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 비록 가진게 없어도 진정으로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걸 가진 진정으로 성공 출세한자들도 많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것들은 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스스로를 고치고 되돌이킬 수 있는자는 오로지 스스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되돌이키지 않으려는 자들은 백날 도와줘도 그 도움을 장난으로 여길뿐 그 도움의 귀함과 도우려는 자들을 기만하는 무서움을 모르고 더더욱 자기의 타락한 행위를 반복하게 됩니다.
스스로 되돌이키지 못하면 그 누구도 되돌이켜 줄수 없습니다.
타락한 자들과 타협하며 보증을 서지 않고 타락한 자들을 배려하며 졌잘싸 하며 한걸음 한걸음 더더욱 나아가는게 노력하는자들의 타락한자들에 대한 최선의 예의입니다.

인과응보란게 있죠. 좋은 일이 일어나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한다고 다 잘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흥하는 노력을 하면 흥하고 망하는 노력을 하면 망합니다.
그것은 사람은 창조주의 피조물이라 다 노력한데로 이루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서운 진리죠. 왜냐 죽을 노력을 하면 어떻든지 결국 죽게 되고 살 노력을 하면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산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진리인가요!?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자살할 노력을 하면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살 노력을 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하는 노력이 어떤 노력인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즉시 되돌이켜야 합니다.
그런걸 회개라 그러죠. 근데 대부분은 자기가 하고 있는 노력이 아주 선하고 의롭다고 판단하므로 그 속임수와 죄악이 쌓이고 쌓여 큰 재앙으로 나타나게 되는것입니다.
항상 스스로를 스스로가 속이거든요. 지근 내가 하는 이 노력은 사회적으로 아주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나는 잘 될꺼야 하며 자위하며 살아가다 큰 화를 당하게 되는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은 바로 회개합니다.
아! 이게 아니다.
하면서요.

총론

선천적인 것은 있지만 타고 난 것은 없습니다.
선천적으론 누구나 다 좋게 완벽하게 태어납니다.
다만 후천적으로 노력을 잘못해서 잘 안되는것이지요. 타고 났다는 말은 후천적인 노력을 부정하고 선천적인걸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타고 난건 없습니다.
스스로 타고 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난 광대 딴따라라고 스스로 고백하는거와 같습니다.

아이큐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고 아이큐로 지능을 분류할 수 없습니다.
아이큐는 100 내외로 적당하면 됩니다.

선천적으로는 누구나 다 좋게 완벽하게 태어났는데 왜 후천적으로 안좋게 되느냐!? 그건 변하지 않는 자기의 선천성을 잘 몰라 에너지와 노력의 낭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격진로체질 검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누구나 자기 선천적인 스타일만 파악할 수 있다면 후천적으로 노력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죠. 파이팅 하십쇼. 잘난척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유능한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못남을 알고 꾸준히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노력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릇이란 곧 마음의 크기입니다.
큰그릇이란 대기만성형으로 채우는데 오래걸리지만 한번 채우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태음인 태양인 체질이죠!! 작은 그릇이란 자수성가형으로써 그릇이 작기 때문에 큰그릇보다 비교적 쉽게,
초기부터 나름의 두각을 나타내며 성과를 냅니다.
소확행입니다.
체질로서는 소음인과 소양인 입니다.

이렇게 그릇이 크다고 좋은것도 아니고 그릇이 작다고 나쁜것도 아닙니다.
다 각자마다 선천적으로 자기에 알맞은 그릇으로 태어납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면 잘 안풀리는거고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면 좋은 운명이 발현되며 일이 잘 풀리게 됩니다.

자기 그릇이란 어려운게 아니라 일종의 자기의 선천적이 체질이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운이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그릇이란 선천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운명이고 곧 자기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각자에게 알맞은 최선의 운명으로 완벽하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부모 탓하고 세상 탓하며 그런 긍적적인 운명이 마치 양날의 검처럼 부정적으로 발현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운명이 장군으로 태어났는데 올바르게 노력하면 정말 인자하면서 강인한 군인 또는 법관 경찰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바르게 노력하지 못하면 살인마 조폭 학살자 등이 될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게 운명의 특징입니다.
분명히 장군이란 운명은 그 누군가에게 정말 합당한 최선의 완벽한 스타일일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스스로의 스타일을 남과 비교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혐오하며 비천하게 대하니 운명이 부정적으로 발현되 살인마 조폭 학살자 등이 될 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모든 운명이 이와 같습니다.
모든 타고난 운명이 각 사람에게 완벽하게 최선이지만 사람이 자기 환경과 비교의식에 의한 열등감으로 스스로 올바르게 노력하지 못하여 변질되므로 끝도 없이 부모탓 세상탓 운명탓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고 운명이란 그사람에게 걸맞는 옷과 같아서 옷이 없이는 세상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정적으로 변질된 옷이라 하더리도 그 옷을 입고 불평불만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완벽히 지어주신 그 각자의 최선의 옷을 스스로 올바르게 노력하지 못해 부정적으로 변질시켰는데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수 있겠습니까??

강호순이라는 범죄자도 올바르게 노력했다면 최고의 능력있는 수사관이 될수 있었을겁니다.
그게 그 사람의 운명이고 스타일이고 그릇이니까요!!

아래는 참고 "60갑자란 60개의 스타일의 운명의 양상" 운명 요결!!

도의학 10. 운명과 체질에 대하여

운이란 선천성으로 아버지로 부터 오고 역리의 상징이다,
보통 하늘을 순리라 하지만 하늘은 아주 거칠고 변화무쌍한 역리이다.
명이란 후천성으로 어머니로부터 오고 순리의 상징이다.
땅은 본디 아주 고요한법이고 하늘의 변화를 순리로서 받아드린다.

운이란 곧 캐릭터를 의미하고 명이란 그 캐릭터의 특성 곧 능력을 의미한다.

체질은 태극(본질) 남녀(음양) 삼재(천인지 인성) 사상(목화금수 본성) 오행(목화토금수 성격)

이렇게 해서 1*2*3*4*5 의 경우의 수로 120체질이 있다.
120이 곧 모든 사람의 운명의 형태의 수이다.
여기서 남녀를 반으로 가르면 남자 60체질,
여자 60체질 이렇게 60 갑자가 된다.

하지만 편의상 120가지의 운명의 스타일이라 부르고 체질은 그냥 4상 체질로 쓴다.

태극이란 그 사람의 종족적인 족보적인 마치 토템과도 관련이 있다.

음양이란 곧 남녀를 의미한다.
남녀 모두 아버지의 양과 어머니의 음이 함께하지만 남자는 순양이고 여자는 순음이다.

삼재란 사람의 인성을 말하고 천재 인재 지재가 있다.
천재는 울상이고 인재는 무표정이고 지재는 웃상이다.
천재는 식물을 좋아하고 인재는 사람을 좋하고 지재는 동물을 좋아한다.
왜냐면 천제는 위급할때 하늘의 도움을 원하는데 하늘을 닮은 것은 바로 식물이기 때문이다.
인재는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지제는 땅을 닮은 동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사상이란 본성이며 곧 그릇의 형태로 공력의 특성을 나타낸다.
토를 제외한 목 태양인 화 소음인 금 소양인 수 태음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상의 핵은 토로서 사상체질의 본질은 의로움이다.

오행은 곧 성격으로 목화토금수의 다섯까지 성격이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과 악,
죄와 의로움의 본질!!(성경외전)

정의가 뭔지를 알기 위해선 선과 악,
죄와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과연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일까!? 선과 악이란 과연 무엇일까!?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성경의 관점을 빌릴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선의 상징은 양이고 악의 상징은 염소다.
그리고 그 양을 대변하는 게 바로 미카엘이란 대천사고 악을 대변하는 게 루시퍼이다.
이 미카엘과 루시퍼는 사실 쌍둥이 천사인데,
그래서 선과 악은 양면의 동전이라고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예기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기원한다.
선하단 말은 곧 착함이다.
악하단 말은 나쁨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소위 여자들끼리 말하는 매력적인 나쁜 남자라는 말이 있다.
그 나쁜 남자는 선한 걸까 악한 걸까!? 만약 그 나쁜 남자가 진짜로 악한 남자라면 나쁜 남자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소위 양아치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정말 선하게 생기고 매너 좋은 사이코패스가 있다 하자,
그 남자는 선한 남자일까 악한 남자일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잘 알지 못한다면 어쩐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안 좋은 사람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고 가스라이팅 당할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은 원래 오해의 소지가 많은 어려운 개념이라 더 돌려서 얘기해 본다.
노골적으로 정답부터 말하자면 선하고 악한 건 스타일의 문제이다!!

이건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지식일 수도 있음에 양애를 구한다.

선하다는 건 곧 인파이터를 말한다.
악하다는 건 아웃파이터를 말한다.
소위 말해 선하다는 건 인싸를 의미하고 악하다는 건 아싸를 의미한다.
인싸는 주로 공격 위주로 디펜스를 하며,
아싸는 디펜스 위주로 공격을 한다.

성경에서 인싸를 알파라고 하고 아싸를 오메가라고 하는데,
알파는 공격을 담당하고 오메가는 수비를 담당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과 악은 그저 스타일의 문제이지 선이라고 꼭 그렇게 올바른 것도 아니고 악이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럼 왜 선을 긍정적으로 보고 악을 부정적으로 볼까!? 그건 불의한자 소위 말해 성경에선 마귀라 그러는데,
마귀라는 불의의 상징이 선과 악을 이간질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장이고 한 쌍둥이 형제인 미카엘과 루시퍼를 서로 이간질 시키고 투쟁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을 이간질 시키는 불의의 상징 블랙맘바가 곧 모든 죄악의 원흉이고 옛뱀 곧 마귀 사탄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런 불의와 타협하게 될 때 그런 상태를 타락이라고 부른다.
사실 루시퍼는 타락한 게 맞다.
하지만 그 타락락엔 불의 속한 마귀 곧 사탄의 수작이 있었던 것이다.
오메가 곧 악이 타락하면 소위 말해 마치 지옥의 악마처럼 괴기하고 포악하게 변해버린다.
반면에 알파 곧 선이 타락하면 소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치 흡혈귀처럼 창백하고 무시무시한 마귀의 형상처럼 변한다.
이것이 바로 불의에 의한 선과 악의 타락이다.
한마디로 선하고 악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여 불의하느냐 아니면 타협하지 않고 의롭느냐가 중요한 쟁점인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선이 불의와 타협하면 마치 흡혈귀처럼 간교하게 변한다.
이런 상태를 가증하고 간교한 선이라 칭한다.
악이 불의와 타협하여 변질되면 흡사 괴물 괴수 악마처럼 포악하게 변한다.
본디 악이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질색으로 생각하고 매너가 있는 게 정상적인 악이다.
하지만 악이 불의와 타협해서 변질되면 아주 포학하게 변하여 타인의 삶을 파괴하며 해를 끼치게 된다.
선함도 마찬가지다.
본디 선이란 타인을 속이는 걸 딱 질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의와 타협한 선은 마치 마귀와 같이 사기꾼처럼 간교해 저서,
온갖 선량한 듯한 가면을 자랑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 치는 행위를 즐기게 된다.
이것이 선과 악의 타락이다.
한마디로 선이라고 다 올바른 게 아니고 악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란 뜻이다.
이런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이 선한 가면을 가증스럽게 추구하고,
자기 권세를 자랑하며 센척하여 약해 보인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럼 선과 악의 개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좀 더 현실적으로 탐구해 보자!!

위처는 선한가 악한가!? 위처는 악한 의로운 퇴마사이다.
강력계 형사들은 선한가 악한가!? 강력계 형사들은 악한 형사들이다.
강력계 형사가 악하지 않고서는 포악한 범죄자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악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정의로운 마치 위처 같은 형사만이 강력계 형사가 될 수 있다.

그럼 사기꾼과 사이비 교주는 선한가 악한가!? 본질적으로 말하면 사기꾼과 사이비 교주는 선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변질되고 타락한 선함에 이끌려 사이비 교주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선하지만 아주 불의한 간교한 선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이란 것이 분별 법이다.

그럼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선과 악은 무엇일까!? 타락하지 않은 선은 마치 토르처럼 강력하다.
타락하지 않은 악은 로키처럼 익살스럽기도 하면서 능력이 있다.
토르와 로키가 한 형제로서 마치 미카엘과 루시퍼처럼 선과 악의 한 쌍을 이룬다.
토르는 선하고 로키는 악하지만,
서로 협력하고 힘을 합쳐 불의한 타노스와 싸워 나간다.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의 본질이다.
또 예를 들어 손오공은 선하고 베지터는 악하여,
처음엔 서로 괴리감을 느끼며 싸우지만 서로 서로의 본질적인 공통의 의로움을 알게 되며 함께 하며 불의한 자들을 상대해 나간다.
서로 서로의 소중한 사람들을 공의로써 지키기 위하여!!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의 본질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분별할 때 이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를 함부로 판단하다가는 간교한 선인 사기꾼이나 사이비 교주들에게 사기당하기 쉽상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선하냐 악하냐는 중요치가 않다.
그 사람이 사람으로서 진정성이 있고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느냐가 판단 기준이 되어야지 겉모습 겉행색만 보고,
이 사람은 신사처럼 잘 빼입고 매너 좋으니까 선한 사람이야,
또 이 사람 행색은 더럽고 별로야 하면서 경멸하고 멀리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면 여러모로 스스로가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

총론 -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곧 선과 악을 조율하고 선과 악이 타락하여 서로 싸우지 않게큼 하는 절대적인 벼락같은 올바름 이것이 바로 정의다.
선한 자의 편에서 서서 악을 응징하는 건 간교한 선일뿐이지 정의가 아니다.
또 강자로써 사람 머리 위에 군림하면서 기득권 짓을 하는 것도 세상 사람을 선도하는 것이 아닌 선한 가면을 쓴 간악한 기득권 악일뿐 정의가 아니다.
정의란 선과 악을 조율하고 서로 타락하지 않게 끔 지켜주는 절대자의 벼락과 같은 올곧은 칼 이런 것이 바로 정의이다.
함부로 정의란 말을 입에 담는 자는 정의와 심판이라는 명분으로 마치 바티칸의 마녀사냥이나 십자군의 이교도 학살 같은 포악한 짓을 하게 된다.
정의라는 이름과 심판이라는 명분으로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며 정죄하지 말고,
사람 무서운 줄 알고 자기나 잘하는 게 사람이 사람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정의이다!!

참고 성경 외전 "이화세계 - 선과 악이 화평 조화를 이루는 세상"

"이로써 여호수와 예수께서 알파를 이루시고 재림예수 여호와께서 오메가를 완성하시니 태초에 순수한 천사들을 타락시켜 악마로 만들어 추방하고 남아있는 강고한 천사들을 쇠약하게 만들어 집어삼키려는 타락의 상징 마귀들의 두목 아몬이 잡혔으니 선의 상징인 미카엘과 그의 쌍둥이 친동생 악의 상징인 루시퍼가 서로 화해하며 예수님의 의로써 영원불멸한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의 화평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동안 악을 포악하게 만들고 선을 간교하게 만들던 마귀 곧 아몬은 그의 자식들인 적그리스도 666들과 함께 영원히 지상에 속박되어 세상의 노예로서 세상 권세를 자랑하며 살아간다.

천국에 거주하는 자는 의로운 선을 훈련하며 영원히 자상의 마귀 아몬을 대적하며 발전 진화 진보하며 지옥에 거주하는 의로운 악은 악과 깡을 훈련하며 영원히 지상의 마귀 아몬을 역시 상대하며 성장 발전 진화 강화해 나간다!!

곧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귀가 영원 유일 불의의 상징으로서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의 공동의 적이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이 사는 곳과 스타일은 틀려도 예수님의 보혈과 의로써 다시 한 형제가 되었으니 마치 토르와 로키처럼 한 형제로서 인간 세상과 모든 것을 무로 돌리려는 마귀 타노스들을 공의로서 영원히 함께 상대해 나간다!! 천국에 속한 자와 지옥에 속한 자가 위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의로서 함께한다!!!

선에 속한 자는 영원한 보상을 받고 악에 속한 자는 영원한 보수를 받는다!! 보수 또한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로다!! 선에 속하지도 못하고 악에 속하지도 못하며 선과 악을 타락시키고 이간질한 마귀들은 천국과 지옥 애도 가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이라는 매트릭스의 노예로서 매트릭스에 기생하며 구천을 떠돌며 그들이 해왔던 대로 인간을 유혹하고 장난이나 하며 인간들을 현혹하고 미혹하리라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마귀 666 들의 영원불멸한 형벌이자 그들의 대가이자 그들의 수고비다.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의로운 영원히 완성된 줄도 모르고 마귀들은 신인류니 신세계니 온갖 음모를 꾸미며 영원히 장난질을 하리라!! 세상과 성경 말씀에 속박된 체로 영원불멸한 형벌을 받으리라!!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형벌은 이미 그들의 음모가 영원불멸의 끝난 줄도 모르고 무한히 그들의 음모를 반복하는 것!!

선한 자도 악한 자도 666표를 받지 않는다!! 오로지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아닌 장난이나 하며 신성모독을 하는 마귀들만이 666표를 받게되리다.
666표는 곧 세상의 노예의 상징이다.
666표를 받은 자는 영원히 세상의 노예로서 지상에 속박되어 끝없는 장난질을 하게 되리라!!!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의로운 성장을 위해서 공동의 적인 마귀를 영원히 상대하며 서로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리라!! 이것이 영원불멸한 세상살이와 영생!! 이 시스템은 이미 완벽하게 완성 확정되었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세상과 영생의 영원불멸한 시스템!!

이미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영원히 사람답게 사는 것!! 그것을 훼방하는 모든 자들이 곧 마귀요 짐승이요 666 들이다!!! 아멘!!

선한 자는 영원불멸의 천국에서 거주하며 영원한 보상을 받으며 토르처험 강고해진다 악한 자들은 영원불멸히 지옥에서 거주하며 영원한 보수를 받으며 토르처럼 순수해진다.
마귀들과의 아마겟돈 과정 중 또 예수님 심판 이후에 영원히 일어날 일. 마귀 666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는 자들로서 죄도 없고 의도 없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무로 돌아가자며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자들. 그런 자들은 선과 악의 공공의 안전을 위해 666으로 구속되고 영원불멸한 선과 악의 공공의 적으로써 천국에도 가지 못하고 지옥에도 가지 못하고 이 지상에 속박되며 영원히 세상의 노예로써 살아가게 된다.
이런 마귀란 불의의 시스템도 영생이란 시스템의 일부.

하나님은 공짜가 없으신 분이라 선한 자는 영원히 보상을 악한 자는 영원히 보수를 마귀들조차도 영원히 선과 악을 대적하고 인류를 유혹하는 수고를 받게 된다.
아멘."


플라토닉 러브의 정체는 나르시시즘이다

라톤이 말하는 사랑은 자기의 불멸을 희구하는 ‘자기 사랑’으로 귀착됩니다.
그것은 타자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상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사랑이죠. 타자의 아름다움을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소유욕이죠. 지치지 않는 그 욕망은 무한한 소유,
절대적인 소유,
영원한 소유,
불멸의 소유를 갈망합니다.
이런 사랑에서 타인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죠. 이런 사랑론에서는 연인인 타자도 자기 사랑의 방편에 불과하며,
육체의 자식이든 영혼의 자식이든,
자식으로서의 타자도 불멸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숭고한 희생의 대명사로 불리는 부모사랑마저 나르시시즘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복제를 통해 자기 불멸을 설파했던 플라톤은 말할 것도 없고,
외관상 플라톤과는 철저히 다른 사랑론을 전개했던 현대의 프로이트 역시 이 점에서는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의 자식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 자아의 불멸성이 위협을 받는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자식에게서 피난처를 찾아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너무도 감동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치한 속성을 지닌 부모의 사랑이란,
결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대상 사랑으로 변모되어 그 과거의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살아난 부모의 나르시시즘,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랑론에도 희생처럼 보이는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불멸하는 이념,
전체,
진리를 위한 개체의 희생은 이런 사랑의 주요 덕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
자신이 고안한 자기 불멸의 길을 따르는 것일 뿐이죠. 공동체라는 자아가 확대된 전체에 영원히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일 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사랑에는 타자성이 빠져있습니다.
있더라도 그것은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처럼 ‘착각’의 산물일 뿐이죠. 자기 사랑마저도 사랑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자성이 필요합니다.
타자라는 외면성(外面性),
타자적 자기 외화(外化)의 계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 역시 나만을 위해 일하기보다,
전체를 위해 일하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동성(同性)인 자기 모습에 반합니다.
여기에서 그의 동성애는 상식적인 의미의 동성애가 아니라,
타자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중심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토닉 러브의 핵심은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그것의 관념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플라토닉 러브는 차라리 ‘에로틱한 러브’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남성 간의 동성애에 가깝다.
또한 하나의 유추이지만 영혼마저 에로틱한 사랑을 한다고 묘사하지 않던가요? 『향연』의 찬미 대상은 사랑의 또 다른 고대 그리스 낱말,
즉 우정에 가까운 “필리아(φιλíα)”나 신적 사랑인 “아가페(αγάπη)”가 아니라,
바로 성적 뉘앙스를 가진 “에로스(Ἔϱως)”입니다.
하여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는 한갓 정신적 사랑이 아닌 다른 곳,
즉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불멸을 동경하는 자기 사랑’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신적인 것에 대한 광기 어린 열정을 빙자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친 사랑의 독백이라는 점,
바로 그것이 플라토닉러브의 요체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이 바로 서양 사랑 담론의 한계 지점입니다.
고대의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프로이트,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랑 담론은 자기중심적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플라톤의 사랑 담론에서 현격하게 벗어나 있다고 평가되는 바르트의 사랑 담론조차 여기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한 구절만 인용해 보기로 하죠. 그에 따르면,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자체이지,
그 대상이 아니다.

사랑에서 사랑의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자’가 ‘아닌’ ‘존재’를 말하듯이(존재론적 차이),
사뭇 심오한 말처럼 들립니다.
대상화되고 실체화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과정과 역동적인 국면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죠. 그러나 여기에서 사랑은 다시 자기 사랑,
자기 욕망으로 추락합니다.
그에 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던져 주었던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결국 타자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사랑의 한 가지 모습이기는 하지만,
사랑의 전모(全貌)는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사랑의 대상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을 동화(同化) 시키면서 그것에 이화(異化)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타인을 동화시켜(영혼의 날개는 타자의 아름다움을 섭취․소화하면서 움튼다는 플라톤의 말을 상기하기로 합시다.
자신을 확대시키는 감정일 뿐만 아니라,
이화(異化) 되어 자기를 상실하였기에 생기는 텅 빈 충만감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장과 자기 상실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짜인 욕망의 그물입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천을 직조하기 위해서는 한번은 씨줄을,
다음번은 날줄을 번갈아가며 짜 넣어야 합니다.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
사랑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번 한 해의 목표를 저는 '사랑 공부'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잠시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세상 모르며 방황하던 20대 초반,
저는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고 결정했습니다.
실은 그저 우연히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일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두고 친구들끼리 밤샘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내린 선택이었죠. 친구들이 이야기했던 소중한 것들,
예컨대 진리,
정의,
자유,
아름다움,
돈,
명예,
권력 등보다 더 소중한 가치로서 저는 사랑을 택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뾰족한 근거 제시도 없이 막무가내로 우겼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건 피가 뜨겁기만 했던 젊은이의 얄팍한 직관이었을 겁니다.
사랑의 심연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풋내기의 객쩍은 주장에 가까웠을 겁니다.
숱한 대화 내용이 그렇듯이,
쉽게 잊힐 수도 있는 발언이었죠. 하지만 이후에도 저는 이따금 젊은 날의 이 대화를 기억해냈습니다.
아니,
기억하려고 노력했다기보다,
우긴 것이 창피해서 잊고 싶을 만한데도 이상하게 잊히지 않았죠. 그리고 그때의 내 발언을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고자 했습니다.
정말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예술,
'사이(between)',
멜랑콜리,
생명 등의 주제를 가지고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이란 주제에 올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랑을 중심에 두고 지금까지 공부했던 내용을 새롭게 배열하고 심화시키기로 한 것이죠. 2024년 새해의 목표 역시 이 주제에 천착한 글을 써내는 데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

라는 롤랑 바르트의 진단은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도 적절해 보입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저는 사랑 담론의 고독에 동참하려고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도 기꺼이 젊은 날에 내뱉은 말을 입증하는데 바칠 생각입니다.

몇년 전 아이들 사진

심지어 내 일생만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아이가 생겨나자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를 가훈으로 삼기까지 했으니,
여전히 세상 모르는 한심한 인간이란 소리를 들을 만도 합니다.

*** 이 글은 제 책 <철학자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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