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 중에 내담자가 보이는 감정의 겉껍질을 살짝 들추어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감정이 드러나도록 도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2차 감정(secondary emotion) 아래 가려진, 1차 감정(primary emotion)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레슬리 그린버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을 크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1차 감정은 어떤 사건 직후 즉각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나의 뇌 회로에 이미 새겨져 있어 본능적이고 반사적이며 순진합니다. 불같이 일었다가도, 자극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세 가라앉습니다. 기쁨, 슬픔, 공포, 분노, 혐오, 놀람 등과 같은 1차 감정은 어디에서 배워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역사와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2차 감정’은 ‘1차 감정에 대한 감정’ 혹은 다른 고통스러운 과거의 일들이 엉키어 만들어진 감정입니다. 왜곡된 생각들이 장난을 친 감정들입니다. 수치심, 좌절감, 절망감, 질투, 짜증, 불안, 증오, 원망. 2차 감정은 자극이 없을 때도 물밀듯 밀려와 오래도록 지속하고, 시간이 갈수록 이 감정은 점점 강렬해집니다.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 해도, 화가 너무 나서 혹은 절망감과 불안감으로 마음의 고통이 커집니다. 이미 며칠 전 혹은 몇 년 전에 끝난 상황임에도 증오와 원망이 사그라지지 않아 나의 일상이 흔들립니다.
예컨대, 소중한 것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슬픔’ 혹은 나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느끼는 ‘분노’는 우리가 좌절한 순간 즉각적으로 올라오는 1차 감정입니다. 그럴 때면 슬픔은 ‘너 당연히 힘들지. 너 너무 고생했잖아. 일단 엎어진 김에 좀 쉬고 즐기자’는 메시지를 던지거나, 분노는 ‘너를 지켜. 네가 최우선으로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게 뭐라도 해보자’는 등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잘 적힌 편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역사와 나의 감정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요.
그러나 내 감정을 차마 경험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때, 나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 혹은 ‘이런 약해 빠진’ 감정을 느끼고 있기에 너무나 불안할 때, 2차 감정은 굉음을 내고 난리법석을 떨면서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지금 당장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그렇게 우리는 좌절 경험에 대해 자칫 수치스러워하고, 자칫 죄책감을 경험하며, 자칫 주변의 약한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스스로 고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수치스러울 일도 죄책감을 경험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요. 원하는 바가 있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뭘 어떻게 더 하란 말인가요. 그 일은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챕터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짜증이나 원망은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도 않습니다. 2차 감정은 1차 감정을 숨기려다 사람들을 밀어내어 버립니다. 내 약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날을 세우면서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이전의 나와는 너무도 다른 나를 만들어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합니다. 이미 충분히 힘든 일이 벌어졌는데, 왜 그렇게나 자신과 타인을 증오하며 외로워하나요.
자신을 위해 마땅히 경험했어야 할, 최초의 감정을 찾아내세요. 방법은 이렇습니다. 당시 사건에 누가 보아도 직접 관련이 있는 감정이고, 사건이 종결된 후에는 희미해지고 있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툭툭 던져준다면, 1차 감정입니다. 힘들었던 또 다른 과거의 일들을 함께 떠올리게 하거나, 사건이 이미 종결된 후에도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고 심지어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면 2차 감정입니다. 우울과 불안을 깊게 해 나의 일이나 관계, 삶을 방해하고 있다면, 당신을 지독히도 괴롭히는 그 감정은 당신이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이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화나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입니다. 증오에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불안한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외로운 것입니다. 당시 마땅히 경험했어야 할 진짜의 감정을 찾아냈다면 지금껏 숨죽여 있던, 서툴게 적힌 편지를 읽어 내리세요. 무엇을 느끼나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깊이 호흡하고, 자신을 잘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정돈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과 요구사항을 명확히 나와 타인에게 전달하세요. 누구든 감정을 다루는 일에는 서툴기에, 이제 조금쯤 심리학적 통찰이 생긴 당신이 대본을 짜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힘들다고 당신에게 힘들게 이야기를 꺼낼 때, 그냥, 많이 힘들었겠다, 하면서 들어줬으면 좋겠어’ 처럼요.
가장 처음의 감정을 찾아 나서세요. 실은 슬프다고, 불안했다고. 실은 화가 많이 났었다고,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아, 내가 정말 그 일을 바랐구나’, ‘나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었구나’ 하고 내가 정말 바랐던 방향을 다시 살펴주세요. 그제야 보이는 길이 있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